한국조선해양이 후판 가격 상승세로 실적에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
앞으로 선박을 수주할 때 원재료 가격의 상승분을 충분히 반영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셈이다.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영업 전문가로 꼽혀 온
가삼현 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 조선업종 최대이슈는 후판 가격, 한국조선해양 시름
현재 조선업종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슈는 바로 후판(두께 6mm 이상의 두꺼운 강판으로 조선업에 많이 쓰인다) 가격이다.
선박 1대를 만드는 데 드는 원재료 비용 가운데 후판 가격의 비중은 통상 20~30%로 알려져 있다. 후판 가격의 급등은 조선사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조선사들은 철강사들과 통상 1년에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후판 가격을 협상한다.
하반기 후판 가격은 톤당 100만 원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포스코는 국내 조선3사에 후판 가격으로 톤당 115만 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반기 후판 가격이 톤당 70만 원가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40% 이상 가격이 급등하는 셈이다.
철강사들은 후판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후판의 원재료인 철광석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철강사들은 지난 5년 동안 조선사들이 수주가뭄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철광석 인상분을 후판 가격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한국조선해양은 이미 후판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을 크게 안고 있다.
조선사들은 후판 가격 상승에 따른 부담을 충당금으로 미리 재무제표에 반영한다. 한국조선해양은 1분기에 후판 가격 인상에 따른 충당금으로 1861억 원을 반영했는데 2분기에는 이 금액이 9162억 원으로 급격히 늘었다.
매우 보수적으로 회계처리를 한 것인데 사실상의 ‘빅배스’(부실자산을 한 회계연도에 모두 반영하여 위험요인을 일시에 제거하는 회계기법)라고 증권가는 해석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후판 가격 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늘어나는 비용을 메울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원재료 가격 인상을 명분으로 선박을 수주할 때 금액을 올려받는 것이 최선이다.
한국조선해양이 앞으로 1~2년 동안 낼 실적은 최근 1~2년 동안 수주한 물량에서 나온다. 이 물량에는 후판 가격 인상분이 반영돼 있지 않기 때문에 손실을 피할 수 없다.
앞으로 수주할 때 높은 가격에 물량 따내지 못하면 한국조선해양의 미래가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
◆ 현대중공업그룹 영업 전문가 가삼현, 선박 건조가격 인상에 영업수완 발휘하나
이 때문에
가삼현 한국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이 보여줄 위기관리능력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가 사장은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자타공인 영업 전문가다. 2009년 현대중공업 선박영업부 상무에 오른 뒤 10년 가까이 현대중공업그룹의 영업을 맡았다. 대한축구협회에 파견근무를 나가기 전에도 선박마케팅부문에서 업무역량을 높이 평가받으며 해외영업 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에 복귀한 뒤 그룹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를 맡으면서 현대중공업그룹 조선3사인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의 영업업무를 총괄했다.
현재 현대중공업 그룹선박해양영업본부 대표는
정몽준 회장의 장남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이 맡고 있다. 하지만
가삼현 사장이 현대중공업그룹의 조선3사를 지배하는 중간지주사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산하 조선사들의 영업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가 사장이 현대중공업그룹 조선3사의 후판 가격 인상에 따른 원가부담을 선박 건조가격에 얼마나 반영하느냐가 미래를 위한 핵심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앞으로 선주들과 선박 가격을 놓고 치열한 줄다리기를 해야만 한다.
한국조선해양은 당장 하반기부터 원재료 가격 상승을 이유로 선박 가격을 올리려는 시도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발주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상반기만 하더라도 척당 1억9천만 달러 하던 선박 가격이 하반기에 갑자기 2억 달러 이상으로 높아지면 발주를 꺼릴 가능성이 높다.
한국조선해양 소속 조선3사가 올해 신규수주에서 호조를 보이면서 일감을 충분히 확보했다는 점은 발주처와 향후 가격협상에서 그나마 유리한 부분이다.
한국조선해양에 따르면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등이 올해 상선부문에서 새로 확보한 일감은 6월 말 기준으로 127억8900만 달러다. 올해 목표치의 90%를 달성했다.
7월에 딴 일감까지 고려하면 목표는 이미 초과달성했다.
신규수주에서 좋은 흐름을 보이면서 매출기준 수주잔량도 크게 늘었다. 한국조선해양 조선3사가 보유한 매출기준 수주잔량은 236억5100만 달러다. 2020년 말보다 수주잔고가 36.7% 증가했다.
한국조선해양이 보유한 수주잔고는 최소 2년치가 넘는 일감에 해당한다. 급하게 도크를 채울 필요가 없어진 셈인데 이를 무기로 삼아 선주와 협상에 나선다면 발주처들이 선박 가격을 높게 부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발주처들이 급격한 가격 인상에 반발해 발주를 최대한 늦춘다면 한국조선해양으로서도 일감 확보를 위해 적정한 가격에 타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국내 조선사들이 앞서고 있는 기술력과 품질을 바탕으로 영업활동을 할 것"이라며 "현재 선박시장은 수요자보다 공급자가 주도권을 들고 있는 상황이고 객관적 데이터로도 선박 가격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주목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가 사장이 10년가량 현대중공업그룹의 영업을 진두지휘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수완도 주목된다.
가 사장은 탁월한 교섭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일하던 시절 히딩크 감독을 데려온 일화는 유명하다.
가 사장은 현대중공업에 합류하기 전에
정몽준 회장을 따라 대한축구협회에서 오랜 기간 일했다. 2000년 직접 히딩크 감독을 만나 “당신은 이제 한국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기선을 제압하는가 하면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선수들에게 나무를 오르라고 해도 되겠느냐’는 히딩크 감독의 물음에 “당신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이른바 당근과 채찍 전략을 통해 히딩크 감독을 한국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셈이다.
◆ 2021년과 2004년은 조선산업 ‘데자뷰’, 현대중공업 재도약도 재현되나
일각에서는 현재 조선업의 상황이 ‘조선업 슈퍼사이클의 시작’이었던 지난 2004년과 비슷하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2004년에도 9개월 만에 후판 가격이 60% 넘게 급등해 조선업이 휘청거렸다. 후판 가격은 2003년 12월 톤당 376달러였는데 2004년 9월 620 달러까지 뛰었다.
하지만 선박 가격은 가파른 원재료 가격을 따라가지 못했다.
신조선가(선박 가격을 보여주는 지표)는 같은 기간 119포인트에서 140.89포인트까지 늘어나면서 18.3%의 상승률을 보였다.
한국조선해양도 실적에 큰 타격을 받았다. 한국조선해양은 2004년에 매출 9조845억 원, 영업손실 981억 원을 냈다. 2003년보다 매출은 11.4% 늘었으나 적자로 전환했다.
그러나 후판 가격 급등에 따른 신조선가가 꾸준히 오르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후판 가격은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톤당 600달러대에서 안정화했지만 신조선가가 2007년 184.83포인트까지 오르면서 결과적으로 조선사들은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한국조선해양은 2004년을 저점으로 2010년까지 매출과 영업이익의 동반 상승세를 보이기도 했다.
현재 상황도 2004년과 비슷하다. 후판 가격이 상승세뿐 아니라 신조선가도 분명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16일 기준 신조선가는 141.16포인트다. 금융위기 이후 조선업계 최고 사이클이었던 2013~2014년의 고점인 140포인트를 넘어선 것이다.
2021년 들어서 30주 넘게 오름세를 보이면서 앞으로 선박 가격이 계속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을 밝히고 있다.
증권가에서도 후판 가격 상승에 따른 선박 가격의 상승이 가능할 것이라는 긍정적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후판 가격 급등에 따른 단기적 조선사들의 실적 저하를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이동헌 대신증권 연구원은 “후판 가격 상승에 대한 조선사들의 예정원가 충당금은 현금유출이 아닌 회계적 계상”이라며 “향후 선가 상승이나 강재가 안정화 때 충당금이 줄어들거나 환입될 여지가 있으며 조선사 단기 실적이 당장의 주가 변수가 아니듯 주가는 좀 더 긴 시계열의 실적 전망을 반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반기 선박 가격의 시금석은 카타르에서 발주하는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100여 척의 실제 계약가격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3사는 2020년 6월에 카타르에서 LNG 운반선 100여 척의 건조 슬롯을 예약받았다. 계약기간이 2027년까지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하반기부터 본격적 발주가 예상된다.
한국조선해양을 비롯한 국내 조선3사가 이 물량들을 얼마에 계약하느냐에 따라 선박 가격의 대세적 상승기 진입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카타르 발주건의 경우 향후 협상의 결과를 예단해 말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채널Who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