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이 SK하이닉스의 파운드리사업을 키워낼 수 있을까?
SK하이닉스는 ‘메모리반도체’ 전문기업이다. 파운드리사업은 비중이 매우 적다.
박 부회장은 갑자기 왜 파운드리를 들고 나온 걸까? 그리고 박 부회장은 SK하이닉스의 파운드리사업을 어떻게 키워내겠다는 걸까?
박 부회장이 그리고 있는 SK하이닉스 파운드리의 청사진은 국내 파운드리 1인자이자 세계 2인자, 삼성전자의 파운드리와는 어떻게 다를까?
◆ 박정호의 SK하이닉스 파운드리를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 ‘8인치’와 ‘중소 팹리스’
SK하이닉스가 갑자기 파운드리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두 가지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바로 8인치다.
시스템반도체를 제조하는 데는 웨이퍼라는 ‘판’이 필요하다. 이 판에다가 특수공정으로 회로를 새기는 것이 바로 파운드리 사업이다. 8인치 반도체, 12인치 반도체라고 말하는 건 바로 이 웨이퍼의 크기를 말한다.
이 웨이퍼 크기의 차이가 생산성을 결정하기 때문에 삼성전자, TSMC 등 대형 파운드리업체들은 지금까지 12인치 웨이퍼 반도체의 공정을 첨단화하는 데 집중해왔다. 그 반작용으로 8인치 웨이퍼 반도체 생산장비들에 적용된 공정기술은 점점 구식이 되어갔다.
하지만 8인치 웨이퍼의 ‘공정이 구식이고 생산량이 낮다’는 단점은 ‘다품종 소량생산’이 필요한 시장에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 8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를 얘기할 때 주로 나오는 전력관리칩(PMIC), 디스플레이 구동칩(DDI), 차량용 반도체 등이 바로 이런 시장이다.
특히 최근 4차산업혁명 붐을 타고 이미지센서, 무선통신칩 등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그동안 ‘밀려난 기술’ 취급을 받았던 8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는 없어서 못 사는 존재로 환골탈태했다.
SK하이닉스가 노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시장이다.
글로벌 초대형 파운드리인 삼성전자와 TSMC가 12인치 웨이퍼 첨단공정에 집중하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른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장밋빛 전망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8인치는 12인치보다 생산성이 떨어진다. 또한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특성상 대규모 양산이 어려워 수익성도 좋지 못하다.
8인치 시장의 공급부족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된다는 보장도 없다. 생산량을 늘렸다가 지금처럼 폭발적 수요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공급과잉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SK하이닉스에게 8인치 반도체의 수요를 유지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SK하이닉스는 어떻게 8인치 반도체의 수요를 유지하려 할까?
여기서 바로 SK하이닉스의 두 번째 키워드가 등장한다. 바로 ‘중소팹리스’다.
◆ 박정호, ‘비메모리 생태계’ 외치며 8인치 수요 변동에 대비하다
박 부회장이 파운드리 생산능력을 확대하면서 매우 강조한 게 있다. 바로 국내 중소팹리스들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반도체기업들은 세계 반도체시장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기를 못 펴고 있는 반도체분야가 있다. 바로 시스템반도체 ‘팹리스’분야다.
우리나라 팹리스업체들의 세계 팹리스시장 점유율을 전부 합해도 1%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팹리스기업들을 키워야한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박 부회장이 국내 중소팹리스 육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SK하이닉스가 국내 중소팹리스들이 클 수 있는 양분이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SK하이닉스가 국내 중소팹리스를 지원해 얻는 이점은 무엇일까?
현재 8인치 반도체 수요는 대부분 중국 팹리스들에서 발생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중국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청주 8인치 파운드리 공장을 중국 우시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8인치 수요가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는 절대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파운드리 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해 자국 팹리스 업체들의 수요를 그쪽으로 몰아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SK하이닉스가 8인치 반도체 공급부족의 수혜를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지 예상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란 뜻이다.
이렇게 통제불능인 상황을 SK하이닉스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내린 답이 바로 국내 비메모리반도체 생태계 육성이다. 우리나라 팹리스들을 키워내서 파운드리 수요를 확보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부회장의 발언에서도 이런 전략을 읽을 수 있다.
박 부회장은 4월2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월드IT쇼에 참석해 "국내 팹리스업체들에게서 TSMC 기술 수준의 파운드리서비스를 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고 이에 공감한다“며 ”국내 팹리스들에게 대만 TSMC 수준의 파운드리서비스를 제공하면 이들 기업은 여러 기술 개발을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중소팹리스들을 육성해 그들이 파운드리 수요를 창출한다면 그 과실은 SK하이닉스가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가 주력하고 있는 12인치 반도체는 중소팹리스들이 활용하기에는 너무 비싼 공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우리나라 중소팹리스업체들이 파운드리를 맡길 곳이 없다”며 “첨단공정은 대부분 퀄컴이나 엔비디아, AMD 등 글로벌 리더급의 팹리스회사들의 무대”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것은 중소팹리스업체에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불만이기도 하다. 한 중소팹리스업체의 대표는 언론사에 보낸 기고문에서 “첨단 EUV 공정사용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시제품 개발에 수천억 단위 EUV 공정을 사용할 수 있는 중소기업이 얼마나 될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박 부회장이, SK하이닉스가 8인치 생산능력 확대와 비메모리 생태계를 동시에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국내 팹리스업체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적절한 수준의 파운드리를 공급하면서 이들을 육성한다면 이들은 8인치 파운드리 수요를 끊임없이 채워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SK하이닉스의 길, 대만을 팹리스 강국 만든 TSMC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박 부회장과 SK하이닉스의 구상은 과연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일까?
박 부회장이 중소 팹리스 육성을 이야기하면서 TSMC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힌트가 될 수 있다.
박 부회장의 구상은 TSMC가 세계 최대의 파운드리업체로 커진 ‘성장스토리’와 굉장히 닮아 있다. SK하이닉스의 구상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한 차례 성공사례가 있는 구상이라는 뜻이다.
대만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세계 팹리스시장에서 미국 다음으로 점유율이 높은 ‘팹리스 강국’이다.
모바일AP 세계 점유율 1위인 미디어텍이 바로 대만 기업이다. 또한 AMD의 리사 수, 엔비디아의 젠슨 황 등 세계 주요 팹리스기업의 CEO도 대만 출신이다.
대만은 어떻게 팹리스 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이 바로 TSMC에 있다.
TSMC는 대만 정부가 발벗고 나서 육성한 기업이다. 대만 정부의 목표는 단순히 TSMC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었다. TSMC는 파운드리사업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면서 대만 국내의 중소팹리스들과 같이 성장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협회 상무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세계에서 파운드리를 가장 먼저 시작한 게 대만이고 팹리스들이 크기 위해서는 제조를 담당할 파운드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팹리스들도 컸다”며 “TSMC가 팹리스들을 키운 것”이라고 말했다.
TSMC는 지금까지도 대만 국내의 중소 팹리스들을 잘 관리해주는 것으로 이름이 높다. TSMC의 고객사 수만 8천 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부회장과 SK하이닉스가 걸어가려 하는 길이 바로 TSMC의 길로 보인다.
첨단공정에 주력하는 삼성전자가 퀄컴, 엔비디아, AMD 등 대형고객들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해주지 못하는 옛 공정을 활용해 중소팹리스들이 팹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이 과정에서 마치 TSMC처럼 국내 팹리스들과 SK하이닉스의 파운드리사업이 같이 커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팹리스시장의 성장세는 매우 매섭다. 시스템반도체시장은 2025년까지 약 375조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가운데 팹리스시장이 무려 60%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팹리스산업의 현재 상황은 매우 좋지 못하다. 하지만 성장성까지 낮은 것은 아니다.
국내 중소 팹리스기업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실리콘웍스는 2020년에 연매출 1조 원을 넘겼다.
실리콘웍스는 주요매출원인 DDI의 고객를 최근 중국 디스플레이기업 등으로 확대해나가고 있으며 전력관리반도체(PMIC), 차량용 반도체 등으로 사업 다각화도 추진하고 있다.
마이크로컨트롤러 전문 팹리스인 어보브반도체 역시 가전용 반도체에서 산업용, 자동차용 마이크로컨트롤러 반도체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런 기업들 외에도 우리나라 팹리스시장에서는 에이디테크놀로지, 텔레칩스, 동운아나텍 등 현재 20개가 넘는 회사들이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성장성있는 팹리스 기업들이 많다보니 한쪽에서는 국내 중소팹리스기업들이 서로 인수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워서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한국수출입은행이 2020년12월 발간한 '시스템반도체산업 현황 및 전망' 보고서는 한국 팹리스시장의 가능성을 두고 “팹리스의 핵심역량은 설계인력으로 대규모 장치 투자가 필요하지 않으며 창업지원, 수요기업과 연계 강화 등이 이뤄진다면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정부 역시 현재 1% 수준인 국내 팹리스업체들의 세계 팹리스시장 점유율을 2025년에 5%까지 끌어올릴 계획을 세우고 정책적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
과연 박 부회장은, 그리고 SK하이닉스는 대만의 TSMC가 그랬듯이 우리나라의 팹리스기업들을 키워내면서 SK하이닉스의 8인치 파운드리사업도 같이 키워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미디어텍, 나아가 AMD, 엔비디아 같은 세계 최고의 팹리스기업이 나올 수 있기를 지켜볼 일이다. [채널Who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