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경영기조는 그대로지만 '과감한 도전'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다소 바뀌었다.
이 부회장은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위를 목표로 ‘반도체비전 2030’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여러 시스템반도체 분야 가운데 가장 경쟁력을 갖춘 사업으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가 꼽힌다.
이 부회장이 선택과 집중이라는 경영기조를 밝힌 만큼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사업을 확대하는 데 더욱 힘을 쏟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경민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31일 “2020년 진정한 슈퍼사이클(상승주기)은 D램보다 파운드리에서 온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며 “파운드리분야에서 최첨단 나노공정(선단공정)이 가능한 기업은 대만 TSMC와 삼성전자 2개 뿐이어서 선단공정 기준으로 삼성전자 점유율이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장 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0년 파운드리시장은 2019년보다 23.7% 증가할 것으로 집계됐다. 2021년에도 6% 수준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파운드리시장 점유율은 2020년 기준 TSMC가 54%, 삼성전자가 17%로 격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단공정에서는 삼성전자의 점유율 확대가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된다.
2020년 4분기 5~14나노 공정 점유율은 TSMC 70%, 삼성전자 30%인데 2021년 4분기에는 TSMC 65%, 삼성전자 35%로 격차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시스템반도체 분야 중에도 파운드리사업에 무게를 두고 있다. 11월 말 진행한 투자자포럼에서도 파운드리 전공정·후공정기술과 생태계를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파운드리 경쟁력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재용 부회장 역시 파운드리사업 경쟁력 확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도 10월 네덜란드 출장을 떠나 반도체 장비회사 ASML 경영진을 만나 협력관계를 다졌다.
ASML은 미세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회사다. 글로벌 반도체기업들의 장비 확보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오너로서 직접 나서 첨단장비 확보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사업 확대 의지가 강한 만큼 시장의 관심은 TSMC와 격차를 좁히기 위해 적극적 시설 투자에 나설지에 쏠린다.
삼성전자는 미국 오스틴 공장에 신규공장 부지를 확보하는 등 머지않아 증설투자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특히 경쟁사인 TSMC가 이미 미국 애리조나 공장 설립을 위해 대만 정부의 허가를 받고 2021년 착공을 계획하고 있어 삼성전자도 대응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도현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2021년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할 분야는 파운드리”라며 “파운드리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평택과 오스틴 등지에 투자를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내다봤다.
▲ 미국 텍사스 오스틴의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
글로벌 반도체 선도기업인 인텔의 전략 변화가 삼성전자의 미국 증설투자를 부추길 가능성도 제기된다.
인텔이 반도체 생산을 외부에 맡기려는 조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텔의 외부생산이 현실화되면 파운드리 일감이 늘어나 TSMC와 삼성전자의 유치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 있다.
최근 인텔 주주인 행동주의 펀드 서드포인트는 인텔 경영진에 보낸 서한에서 “인텔은 반도체 제조분야에서 TSMC, 삼성전자 등 경쟁사에 밀렸다”며 “이제 반도체 생산부문을 털어내고 갈 때”라고 요구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 인텔 주가가 5% 오르는 등 시장의 반향이 컸다.
반도체산업 사상 최고 거래인 엔비디아의 ARM 인수를 촉발한 것 역시 ARM을 보유한 소프트뱅크를 향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구조조정 압력이었다. 인텔이 주주제안을 흘려들을 수 없다는 시선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인텔 주주가 반도체 제조에서 삼성전자가 인텔보다 앞서 있음을 직시한 것은 이재용 부회장이 말한 '잘하는 사업'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사업에 자원을 집중해 인텔 일감 확보에 나설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밥 스완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취임한 2019년 이후 인텔은 사업 구조조정이 활발하다. 애플에 모뎀칩 사업을 매각했고 SK하이닉스에 낸드사업, 미디어텍에 전력관리칩사업 매각을 추진 중이다. 밥 스완 CEO가 GE와 이베이를 거친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 경영자라 추가 구조조정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텔이 반도체 생산에서 곧바로 손을 떼지 않더라도 외부생산 확대는 기정사실이라는 시각도 많다. 밥 스완 CEO는 7월 “7나노 이하 미세공정에서 외부 파운드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