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맨’들이 흔들리고 있다.
‘이재용 시대’ 들어 삼성그룹에서 대규모 사업구조 개편이 숨가쁘게 전개되면서 직원들의 불안감과 피로감도 높아지고 있다.
급변하는 사업환경에서 업무나 자리가 바뀌는 것은 대기업 샐러리맨들에게 일상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벌어지는 대규모 빅딜은 오너의 경영권과 깊이 연관돼 있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수도 있다는 직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또 한 번의 빅딜로 동요하는 '삼성맨'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새롭게 '롯데맨'이 될 '삼성맨'들을 달랠 카드를 내놓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불안한 '삼성맨', '실용주의'의 그늘
삼성정밀화학 노사공동 비상대책위원회는 3일 울산 본사에서 간담회를 열어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삼성그룹의 결정을 이해하며 롯데케미칼의 지분인수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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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노사공동 비대위는 성인희 사장과 이동훈 노조위원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비대위는 “회사지분 매각으로 충격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며 “우리의 고용과 처우에 대한 명확한 보장을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비대위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회사방문 요청을 비롯해 고용과 처우에 대한 명확한 보장, 삼성정밀화학에 대한 적극적 투자확대와 지원, 소통과 상생의 실천 강화, 창조적 파트너십 발휘 등 5개 사항을 요구했다.
삼성그룹은 지난달 30일 삼성SDI 화학사업 부문과 삼성정밀화학 등 화학 계열사들을 롯데케미칼에 넘겼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삼성테크윈 등 방산과 화학 계열사 4곳을 한화그룹에 매각했다. 당시 계열사 직원들은 하루 아침에 삼성맨에서 한화맨으로 처지가 바뀌게 되자 노조를 설립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비대위 주장에 따르면 삼성그룹과 롯데그룹은 양수도 계약만 체결하고 직원들의 고용과 처우 문제 등 세부사항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아직 진행되지 않고 있다.
롯데그룹은 지난 30일 합병을 발표하며 “인수되는 회사 임직원들에 대해 고용을 보장하겠다”고 밝혔으나 구체적 내용은 내놓지 않았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SDI 등 삼성그룹 화학 계열사 직원들의 평균연봉은 롯데케미칼보다 1천만 원 정도 높다.
이렇다 보니 직원들 입장에서 고용안정과 처우에 대한 불안감도 상당히 클 수밖에 없다.
삼성그룹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맞물려 사업구조 재편작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사업구조 개편의 대상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계열사 직원들의 불안과 동요도 큰 것으로 전해진다.
제일모직 리조트사업부에서 근무하다 올해 출범한 통합 삼성물산으로 소속이 바뀐 한 직원은 “2년 새 삼성에버랜드에서 제일모직으로, 다시 삼성물산으로 명함이 3번이나 바뀌었다”며 “중복되는 사업분야에 대한 대규모 인력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인맥이나 학연에 기반한 줄서기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삼성중공업이나 삼성엔지니어링 등 실적 악화로 사업구조 재편의 대상으로 꼽히는 중공업 계열사들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직원들은 연말 임원인사에서 살아남을 임원을 공공연히 꼽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이재용 부회장 체제에 접어들면서 실용주의 경영전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점은 사업부든 인력이든 언제든지 정리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키울 수 있다"며 "이는 1등 기업 삼성을 강조하며 직원들의 자부심을 심어줬던 과거와 상당히 다른 분위기"라고 말했다.
◆ '삼성맨'에서 '롯데맨'으로, 신동빈 어떻게 품을까
삼성정밀화학 비대위가 롯데케미칼 인수에 대해 공식적으로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각에서 삼성맨들이 느끼는 자부심과 소속감, 충성도가 그만큼 약해진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물론 삼성그룹과 한화그룹과 빅딜 과정에서 겪은 진통이 일종의 학습효과로 작용하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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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
삼성토탈과 삼성종학화학 직원들은 한화그룹에 인수되면서 1인당 평균 5500만~6천만 원 수준의 위로금을 받았다. 위로금을 지급한 주체는 한화그룹으로 인수된 개별회사들이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정밀화학 임직원들이 일단 환영의사를 밝힌 것은 앞서 방산과 화학 계열사들의 한화그룹 매각 당시의 경험에 비춰 무조건 반대만 할 수 없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롯데그룹과 빅딜에 따른 삼성맨들의 후유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가능성도 점쳐진다. 적정한 수준의 위로금과 처우개선 등 후속조치를 약속받고 이직을 하더라도 경영환경과 조직문화가 상이한 만큼 새로운 근무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삼성종합화학에서 지난해 11월 회사이름이 바뀐 한화종합화학의 경우 최근 극심한 노사갈등을 겪고 있다.
한화종합화학은 한화그룹 품에 안긴 뒤 올해 1월 한국노총 산하 노조를 설립해 임금협상을 시작했으나 노사간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한화종합화학은 노조가 전면파업에 나서자 지난달 30일 직장폐쇄에 들어갔다.
롯데그룹은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으로 기업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상황이다. 가뜩이나 롯데그룹은 금융투자업계에서 기업간 인수합병(M&A)이 추진될 때마다 평판이 좋지 않았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롯데는 인수합병(M&A)시장에서 큰 손으로 꼽히지만 정작 피인수기업들에게 기피대상이었다”며 “워낙 ‘짠물경영’으로 유명한 데다 다른 재벌그룹에 비해 임금이 낮고 고용안정성도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LIG손해보험이 매물로 나왔을 때도 롯데그룹이 유력후보로 떠올랐으나 LIG노조가 결사적으로 반대해 무산된 적이 있다.
삼성그룹과 롯데그룹의 화학사업 ‘빅딜’은 신동빈 회장이 먼저 제안해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신동빈 회장이 화학사업을 유통과 함께 그룹의 핵심사업으로 키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삼성맨을 품에 안아 이들의 반발과 우려를 잠재우는 것도 신동빈 회장이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