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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원 국무총리가 27일 사의를 표명하며 사과하고 있다. |
정홍원 총리가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세월호 참사 수습의 책임을 맡아 현장에서 물세례를 받는 등 봉변을 당한 정 총리다.
세월호 참사 사고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무능에 대한 비난 여론이 행정부를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는 상황에서 ‘속죄양’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정홍원 총리가 27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사의를 표명했다. 정 총리의 사의 표명은 지난해 2월26일 취임한 지 426일 만이다.
◆ "국정운영에 부담 줄 수 없어 사퇴 결심“
정 총리는 이날 오전 10시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비통함에 몸부림치는 유가족들의 아픔과 국민 여러분의 슬픔과 분노를 보며 국무총리로서 응당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정 총리는 “진작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자 했으나 우선은 사고수습이 급선무이고 하루 빨리 사고수습과 함께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책임있는 자세라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자리를 지킴으로써 국정운영에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사퇴를 결심했다”고 사퇴배경을 설명했다.
정 총리는 “이번 사고가 발생하기 전 예방에서부터 사고이후 초동대응과 수습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을 제 때 처리하지 못한 점에 정부를 대표해 국민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사고수습 과정의 혼선을 사과했다. 정 총리는 “이번 사고 희생자들의 영전에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하고 유가족 여러분께 마음깊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며, 구조되신 분들이 입은 상처의 쾌유를 빈다”고 말했다.
정 총리는 중국과 파키스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지난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현장으로 이동해 사고수습을 진두지휘해왔다. 하지만 범부처 사고대책본부를 이끌면서도 초동대처과정에서 실기로 수많은 인명손실을 자초했다. 또 부처간 혼선을 교통정리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 박근혜 대통령에게 비난 화살 차단 의도
정 총리 사의표명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수습 과정에서 정부의 허술한 대처 등으로 악화되고 있는 여론을 추스르고 국정운영의 정상화를 이끌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악화됐다. 특히 사고발생 12일이 지나도록 구조작업이 마무리되지 못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의 화살이 장관을 넘어 박근혜 대통령에게 쏟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자진사퇴 카드를 꺼낸 것으로 분석된다. 정 총리가 이번 참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박 대통령으로 향하는 비난을 차단하고 국정운영에 대한 부담을 덜어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인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고 사죄드리는 길이라는 생각이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여론이 내각 총사퇴를 요구할 정도로 악화되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의도도 깔려있다. 현재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 등 이번 사고와 관련된 부처 장관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장관들은 최근 임명된 데다 물러날 경우 사고수습에 차질이 빚어질 뿐 아니라 여론에 밀려 ‘개각 도미노’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정 총리가 이런 상황까지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양’을 자처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대대적 개각을 하기가 부담스러운 만큼 일단 총리 사퇴 카드를 통해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분석이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악화되면서 지방선거에 참패를 우려한 여권 내부에서 개각의 요구가 나온 것도 정 총리가 사의표명을 결심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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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원 국무총리가 17일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실종자 가족들의 저지를 뚫고 빠져나오고 있다. |
◆ 청와대와 사전조율 합작품
정 총리는 언제 사의를 결심했을까?
정 총리는 26일 오후 정부세종청사에서 세월호 참사 수습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정부와 여당 안팎에서 책임론이 나온 상황이었으나 이날 회의에서 거취와 관련된 얘기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정 총리는 세종시에 머물다 밤 9시께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 도착했다. 정 총리가 서울에 도착한 직후 총리실 일부 직원들은 27일 새벽에 출근하라는 휴대전화 문자를 받았다고 한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이나 이호영 총리 비서실장, 이석우 공보실장 등은 총리가 27일 오전 10시에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을 3시간 전인 이날 오전 7시께 파악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정황들을 보면 정 총리는 세종시에서 장관회의를 마친 뒤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이미 사의를 결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 총리가 27일 서울에서 특별한 일정이 없었던 만큼 26일 밤 서울행은 이미 사의를 결심하고 기자회견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때문에 "총리 본인이 외롭고 고독한 결정을 먼저 한 게 아닌가 싶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평소 정 총리의 성격에 비춰볼 때 어떤 형태든 청와대와 조율을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정 총리는 원만한 성격으로 주위에 적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월호 침몰사고 수습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는 상황에서 자칫 박 대톨령에게 정치적 부담이 줄 수는 있는 사퇴를 독자적으로 결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청와대는 민심이반이 가속화되고 내각 총사퇴가 거론되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경우 그 화살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점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6월 지방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존립기반을 뿌리채 흔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장 행정부를 전면적으로 개편해 분위기를 쇄신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단은 누군가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민심을 달래고 개각 등 후속조처를 하기 위한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정 총리 카드는 최적이다. 따라서 정 총리가 청와대와 교감 속에서 사의표명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분석이다. 사의표명도 정 총리가 먼저 결심했다기보다 청와대 측에서 메시지를 던지고, 정 총리가 이를 받아 박 대통령에게 알리는 수순을 밟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특수부 검사에서 국무총리까지
정 총리는 1944년 경남 하동에서 12남매의 10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부산 경남중에 다녔으나 유학자인 선친이 불러 고향에서 가사를 돌보다가 공부를 하고 싶어 진주사범학교 에 들어갔다. 정 총리는 그 뒤 교사 생활을 하다 성균관대 법대 야간과정에 진학하고 1972년 사법시험(14회)에 합격했다.
정 총리는 1974년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꼼꼼히 원칙을 지켜 ‘특수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사건, 1991년 수서지구 택지공급 비리 사건, 1994년 국회 노동위 돈봉투 사건, 1998년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등을 맡아 처리했다.
정 총리는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4년 5월 법무부 법무연수원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2004년부터 2년 동안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이명박 정부에서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정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 2012년 1월 새누리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장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정 총리가 위원장을 맡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 주변의 원로그룹이었던 김기춘 비서실장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총리는 공직자후보추천위원장으로 현역의원을 대거 물갈이하고 당을 친박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공헌했다. 박 대통령이 첫 총리로 정 총리를 지명한 것도 이런 공헌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