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의 ‘결단’만 남았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얘기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차그룹 문제에 손을 떼기로 결정하면서 앞으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진다.
하지만 환경이 조성되고 의지가 있다고 해서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니다.
순환출자 해소와 미래차시대 대응을 위한 사업구조 개편, 그리고 경영권 승계라는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풀어내면서 투자자들까지 만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정 수석부회장이 가야할 길은 아직도 많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세 가지 키워드
23일 증권가와 재계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현대차, 현대모비스, 기아차 지분 전량 매각에 따라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다시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개편에) 반대하는 주주들을 결집하는 역할을 수행한 행동주의 펀드가 사라짐으로써 지배구조 재추진 기대감이 높아질 것”이라고 바라봤다.
엘리엇매니지먼트가 2019년 말 기준으로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기아차 지분을 모두 판 것으로 파악되면서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불청객’이자 ‘가장 큰 걸림돌’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배구조 개편에 바로 속도가 붙기는 힘들어 보인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추진하려는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에는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지배구조 개편’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얽혀있는 순환출자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현대차→기아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차’ ‘현대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차’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 ‘현대차→현대글로비스→현대모비스→현대차’ 등 4개의 순환출자고리가 존재한다.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사업구조 개편’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미래 자동차산업의 중심은 부품기업으로밖에 갈 수 없다고 바라본다. 전장화와 모듈화로 나아가는 업계 흐름상 자동차 제조기업의 역량보다는 부품에 경쟁력을 지닌 기업을 그룹의 중심에 놓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2018년 3월에 내놓았던 지배구조 개편안에서 현대모비스를 투자와 핵심부품사업부문(존속 현대모비스), 모듈과 AS부품사업부문(분할 현대모비스)으로 인적분할하고 존속 현대모비스를 그룹의 최상단 회사로 두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감안해야 하는 것은 바로 지분 승계 문제다.
정 수석부회장은 2018년 9월 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사실상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아직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등 주력 계열사에 미치는 지분 영향력을 크게 높이지 못했다는 문제도 동시에 안고 있다.
◆ 정의선의 2018년 3월 개편안에는 무엇이 담겼었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하는 최선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 정 수석부회장에게 고민일 수밖에 없다.
지배구조 개편 관점에서만 보면 순환출자고리의 핵심은 '현대모비스→현대차'로 모아진다. 현대모비스가 현대차 지분을 모두 팔아버리면 순환출자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현대차에 대한 현대차그룹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 수석부회장 등 오너일가가 투입해야 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이라는 점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다.
현대모비스가 현대차 지분을 모두 처분한다고 가정했을 때 현대차그룹 오너일가가 현대차 지분을 다시 매입해야 하는 비용은 22일 현대차 종가를 기준으로 약 5조8천억 원이다.
현대제철과 현대글로비스, 기아자동차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처분하고 오너일가가 현대모비스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투입해야 하는 비용도 5조4천억 원에 이른다.
정 수석부회장이 이런 난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꺼내든 것이 ‘지배구조 개편’과 ‘사업구조 개편’을 엮는 것이었다.
정 수석부회장이 2018년 3월 꺼냈던 지배구조 개편안의 핵심은 분할 현대모비스를 현대글로비스와 합병이었다. 현대글로비스는 정 수석부회장이 지분 23.3%를 보유한 회사로 사실상 정 수석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핵심회사로 거론된다.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 합병법인의 지분을 기아차에 매각하고 그룹 최상단에 위치할 존속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하면 정 수석부회장은 순환출자고리도 끊고 사업구조 개편도 할 수 있다.
사실상 지주회사 역할을 할 존속 현대모비스 지배력을 끌어올려 사실상 ‘지분 승계’가 가능하다는 점은 ‘덤’으로 얻는 효과로 분석된다.
▲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2019년 10월22일 서울 양재사옥 대강당에서 '타운홀 미팅'에 직접 참석해 임직원들과 얘기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
◆ 정의선, 지배구조 개편에 '대결단' 요구받다
하지만 시장의 거센 반발에 이런 첫 번째 시도가 좌절됐다는 점은 뼈아픈 지점이다.
당시 글래드루이스와 ISS 등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들은 한결같이 분할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합병비율을 7대 3으로 해야 한다고 봤다. 현대차그룹은 6대 4로 제시했는데 현대글로비스의 가치를 더 낮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수석부회장으로서는 현대글로비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수록 현대모비스-현대글로비스 합병법인의 지분을 높은 가격에 매각할 수 있어 유리하다.
그러나 의결권 자문사들을 비롯한 외국인 주주들은 정 수석부회장의 방식대로라면 현대모비스의 가치가 현저하게 저평가된다며 이에 크게 반발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지배구조 개편안을 거둬들인 뒤 현재까지 이렇다 할 새 안을 시장에 꺼내놓지 못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사정 때문으로 여겨진다.
지배구조 개편과 사업구조 개편, 그리고 지분 승계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한꺼번에 엮으면서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정 수석부회장이 조만간 ‘결단’을 내릴 것으로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글로벌 완성차기업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미래차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투자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지배구조 개편 등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면 그만큼 현대차그룹의 미래 대응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경영권을 승계한 뒤 현대차그룹 혁신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기업문화를 젊게 다듬는 것은 물론 다소 우유부단하다는 지적을 받았던 외부기업과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모두 정 수석부회장의 결단 덕분이다.
엘리엇매니지먼트라는 불청객이 무대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정 수석부회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동안 여러 차례 보여줬던 결단을 지배구조 개편에서도 보여준다면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오래된 과제를 해결하고 미래차 시대 대응력을 높이는데 더욱 속도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자동차업계는 바라본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