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한국의 정유4사가 중동 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크게는 원유 수급의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국제유가 변동 등 실적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총괄사장(왼쪽), 허세홍 GS칼텍스 대표이사 사장.
7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각 정유사들은 모두 자체적으로 원유 수급선을 점검하는 한편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정유4사 모두 중동에서 들여오는 원유의 이번 선적분은 일단 이상 없이 선박에 적재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유4사가 느끼는 불안감이 해소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란이 자국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암살한 미국에 보복을 다짐해 양국 사이 무력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호르무즈 해협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의 페르시아 만과 오만 만을 잇는 해협으로 중동산 원유가 하루 2천만 배럴가량 지나가는 길목이다. 이는 글로벌 원유 물동량의 30% 수준이다.
한국 정유4사는 이곳을 지나오는 원유에 전체 수급량의 70%가량을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해의 입구인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통해 중동산 원유를 운반하는 길도 있기는 하나 해협을 빠져나오면 악명 높은 소말리아 해적들이 창궐하는 아덴만으로 들어서게 돼 안정적 운반로는 아니다. 사실상 호르무즈 해협만이 중동산 원유의 유일한 해상 수송로인 셈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장기화되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내다보는 전문가들이 있을 정도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는 한국 정유업계 전체의 재앙”이라며 “한국 정유사들은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만큼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현실화한다면 국제유가의 변동이 문제가 아니라 원유 수급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정유사들은 정제설비를 하루만 멈춰도 수십억 단위의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아무리 정제마진이 낮아도 가동률을 낮출지언정 설비를 멈추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유4사가 원유 수급에 큰 차질을 빚는다면 정제설비의 가동을 중단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에쓰오일은 원유의 90% 이상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에서 수급하기 때문에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치명적이다. 에쓰오일만큼은 아니지만 SK이노베이션도 2019년 3분기 기준으로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70.7%에 이르는 만큼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는 형편이 조금 나은 편이다.
GS칼텍스는 미국 셰브론 의존도가 비교적 높으며 현대오일뱅크는 한국 정유사들이 찾지 않았던 멕시코산 마야유까지 원유 수급처를 넓히는 등 원유 다변화에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두 정유사도 중동산 원유의 사용비중이 50~60%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추측한다.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진 셈이다.
물론 이란이 국제사회에서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황성현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이란은 지금의 위기를 이란에 유리한 명분으로 활용하려 할 수 있다”며 “해협 봉쇄라는 극단적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능성은 낮지만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빠르게 해소된다면 정유4사가 이득을 볼 수도 있다. 현재 급등하고 있는 국제유가가 다시 안정을 찾으면 정유4사는 단기적으로 올랐던 유가의 영향으로 1분기 재고 평가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후세인 알 카타니 에쓰오일 대표이사(왼쪽),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 사장.
특히 에쓰오일의 재고 평가이익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
나머지 세 정유사들이 분기 전체의 국제유가 평균치를 기준으로 재고 손익을 계산하는 ‘총평균법’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에쓰오일은 국제유가의 변화를 즉시 재고에 반영하는 ‘선입선출법’을 사용하고 있어 급등했던 국제유가가 그대로 재고 손익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지 않더라도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장기화된다면 정유4사의 실적에 악영향이 예상된다. 유가 불안은 정유 제품의 수요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동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중동 긴장관계 지속은 정유업계에 단기적으로 긍정적일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져 정유제품의 수요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무작정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파악했다.
이에 앞서 3일 이라크 바드다드에서 미군의 드론 공격으로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이 사망했다. 이에 이란은 4일 시아파 성지의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피의 복수’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게양했다.
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1979년 이란에 억류된 미국인 인질 52명과 같은 숫자의 표적 52곳을 타격하겠다고 경고하자 6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도 트위터에서 1988년 미군의 이란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으로 발생한 사망자 숫자 290을 언급하는 등 두 나라의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이란은 지난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원유 생산시설을 폭격한 예멘 반군의 배후로 지적되기도 했다. 당시 이란은 공격을 받는다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