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칫집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이래라 저래라 말도 많고 요구하는 것도 많다.
정의선 총괄 수석부회장의 ‘대관식’을 앞둔 현대자동차그룹 얘기다.
정 수석부회장은 3월22일 열릴 주총에서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의 사내이사 선임 안건을 주주들에게 승인받은 뒤 이사회에서 대표이사에 오른다. 그룹 핵심 계열사를 직할하는 체제를 구축해 ‘
정의선 시대’의 완성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엇매니지먼트라는 '불청객'이 등장했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가 지난해 벌어들인 영업이익을 훌쩍 넘는 수준으로 배당하라고 하면서 그들이 추천하는 사외이사도 선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 정의선, 새로운 현대차그룹 구축 선언
27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정 수석부회장의 현대차, 현대모비스 대표이사 선임과 동시에 두 회사의 이사회 구성원을 다양화하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은 새로운 경영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모시기로 한 것은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더욱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세우겠다는 것”이라며 “이사회 중심의 주주가치 경영 시스템이 한 차원 레벨업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26일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와 이사회를 연달아 열고 윤치원 UBS그룹 자산관리부문 부회장과 유진 오 전 캐피탈그룹 인터내셔널 파트너, 이상승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등 3명을 새 사외이사 후보로 확정했다.
윤 부회장과 유진 오 전 파트너, 이 교수는 각각 금융과 투자, 거버넌스(경영체제) 분야의 전문가로 평가된다.
현대차는 주로 법조인이나 관료 출신을 사외이사로 선호했다. 현대차의 대관업무에서 권력기관 출신 인물들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차 사외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최은수 이동규 이병국 이사도 각각 대전고등법원장 겸 특허법원장,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 서울지방국세청장 등을 역임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외이사 후보는 꽤 이례적이다.
관습에서 벗어나 전문가들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것은 일반주주뿐 아니라 현대차를 관심있게 바라보는 외국인투자자들과 해외 기관투자자들에게 ‘현대차가 이렇게 바뀐다’라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모비스도 창사 이래 최초로 외국인 사외이사를 선임하기로 했다.
정몽구 회장 시대의 경영을 뒤로 하고 과거와 다른 새 옷을 입겠다는 것으로 ‘
정의선 방식의 혁신’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이재일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현대차그룹이 본격적 책임경영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며 “현대차와 현대모비스가 선진 경영 시스템을 정착하겠다는 것은 그동안 주가 할인요인으로 지목됐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과 주주들의 의견을 다수 반영한 것”이라고 바라봤다.
정 수석부회장의 혁신은 보수적 조직문화의 틀 깨기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국내 대기업 최초로 정기 공채를 폐지하고 상시 채용으로 인재 선발 방식을 바꿨으며 자율복장 근무제를 도입해 보수적 조직문화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 정의선, 엘리엇매니지먼트 공세 어떻게 막아낼까
하지만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이런 혁신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1월 중순에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주주제안을 통해 회사의 영업이익과 순이익을 한참 웃도는 수준의 배당을 요구했다. 사외이사 진입으로 경영 개입도 노리고 잇다.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압박은 사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2018년 4월 처음으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한 뒤 그동안 모두 5차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기아차에 배당 확대와 지배구조 개선, 이사회 투명성 강화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번 압박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주총에서 현대차, 현대모비스와 한 판 붙어보겠다는 ‘주주제안’이라는 점에서 수위가 한층 세다.
현대차그룹은 “현 시점에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배당 요구는 회사의 투자 확대 필요성 등을 감안하지 않은 안건”이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주주제안은 주총 안건으로 올려야하는 사안이라 주총에서 표대결을 피할 수는 없게 됐다.
당장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요구에 흔들리는 주주들의 표심을 잡는 일이 급해 보인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미래를 차치하고 엘리엇매니지먼트 제안에 찬성표를 던지면 당장 주주들이 받을 수 있는 배당금은 각 회사의 이사회 결의보다 최소 5배 이상 많다. 단기 투자목적을 지닌 주주들이 귀를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현대모비스를 놓고 “단기 투자자들에게는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제안이 매력적”이라며 “하지만 장기 투자자에게는 현대모비스의 3년에 걸친 주주 환원정책이 유리할 것”이라며 주총에서 표가 갈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현대차그룹 내부적으로는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주장은 무리한 수준이라 일반투자자들의 표이탈 현상이 심하지 않을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식을 보유한 외국인 지분율이 모두 45% 안팎인 상황이라 안심하기만은 힘들다는 의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 수석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청사진을 얼마나 구체화하느냐에 따라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세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정의선 시대의 발목을 잡는 골칫덩이가 될지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는 27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CEO 인베스터 데이(기업설명회)’에서 대규모 주주 환원정책과 중장기 투자계획을 내놓았다.
현대차는 2023년까지 앞으로 5년 동안 모두 45조3천억 원을 연구개발과 미래 기술 분야 등에 투자하기로 했으며 2022년까지 자동차부문에서 영업이익률 7%를 내겠다고 밝혔다.
현대차가 구체적 수익성 목표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주주,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주주가치 경영을 한층 강화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현대모비스는 이미 26일 콘퍼런스콜을 통해 앞으로 3년 동안의 핵심부품 투자확대 전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정보통신기술(ICT)와 전동화 시장이 성장기에 진입함에 따라 앞으로 3년 동안 양산시장 형성에 대비해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했으며 3조~4조 원 규모에 이르는 인수합병 계획도 공개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그동안 꾸준히 현대차그룹의 중심이 될 계열사로 현대모비스를 꼽았는데 그에 걸맞은 투자계획과 구체적 현금 운용방안까지 밝혀 현대모비스 육성 의지를 다시 한 번 보였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