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31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뼈가 스러질 정도로 힘든 일(bone-crushing hard job)이었다.”
1월2일 물러나는 존 켈리 미국 백악관 비서실장은 퇴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몇 차례 갈등을 빚다가 사실상 경질에 가까운 모양새로 사임하게 됐다.
비단 미국 대통령의 비서실장만 힘든 일은 아닐 터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켈리 비서실장의 말처럼 분골쇄신으로 일하는 비서실장 업무의 고단함은 문민정부 이후 스무 명이 넘는 비서실장 중 재임기간이 2년을 넘긴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데서 드러난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7년 5월 문 대통령 당선 이튿날 곧바로 임명돼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임 실장의 교체 가능성이 떠오르는 이유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3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임 실장이 내년 설 전후로 교체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것과 관련해 “대통령 참모진 인사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말했다.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임 실장 교체가 가시권에 들어와 있다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임 실장으로서는 현 시점에서 물러나는 것은 썩 내키지 않을 수 있다. 성과는 적고 논란만 많은 때이기 때문이다.
임 실장이 가장 주도적으로 맡아온 남북관계 쪽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올해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한 차례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는 했으나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여전히 남아 있어 경제협력 등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판문점 선언의 국회 비준과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물론 막판까지 가능성을 열어뒀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임 실장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장, 남북 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 등으로 일하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중심에 섰다. 이를 바탕으로 존재감을 확대하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차기 대선주자로까지 여기는 시각이 확산됐다.
문 대통령의 해외 순방 때 임 실장이 DMZ를 방문하자 “자기정치를 하고 있다”는 논란이 나온 점은 역설적으로 달라진 임 실장의 위상을 보여줬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정체와 맞물려 청와대의 공직기강 논란이 떠올랐다. 업무추진비 유용 의혹과 청와대 직원 음주운전사고 등이 터지면서 청와대 조직이 크게 흔들렸다. 청와대를 책임지고 있는 임 실장의 책임론이 부각됐다.
여기에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이 주장한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까지 떠오르면서 임 실장은 31일 조국 민정수석과 함께 국회 운영위원회에까지 출석하게 됐다.
임 실장은 국회에서 “김태우 전 특별감찰반원이 일탈행위를 벌인 것”이라면서도 “비서실장으로서 비위 혐의자를 걸러내지 못하고 청와대 공직기강을 엄하게 세우지 못한 데 언제든 필요한 책임을 지겠다”고 몸을 낮췄다.
이날 민주평화당·대한애국당 대변인은 임 실장 사퇴 요구까지 제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물러난다면 자칫 경질로 비춰질 수 있어 임 실장 개인은 물론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도 부담을 안길 수 있다.
임 실장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 안팎에서 나오는 말처럼 설 전후로 교체된다면 두 달도 채 되지 않는다. 적어도 최근 청와대를 향해 중점적으로 제기된 의혹들은 원만히 해소를 해야 한다.
여기에 임 실장이 물러나기 전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진전이 이뤄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마무리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2019년 초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한데다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며 군불을 땠기 때문에 임 실장에게 최상의 시나리오가 펼쳐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 실장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 정치적 행보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임 실장은 2020년 4월 치러지는 21대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유력하게 점쳐진다.
2019년 설 전후에 물러나면 1년 이상 공백기가 생긴다. 총선 성적을 고려하면 가급적 좋은 분위기 속에 강한 인상을 남기며 물러날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세인 만큼 이대로 물러나기보다 남북관계에 의미 있는 진전을 일단 이룬다면 성공적으로 물러나는 모양새를 갖추는 일이 가능하다.
일각에서 남북관계를 책임져 온 임 실장이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하지만 총선까지 1년여 남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입각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