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수석부회장은 9월 인도에서 열린 ‘무브 글로벌 모빌리티 서밋’에 참석해 “스마트 모빌리티(이동성) 솔루션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강조했다. 올해 초에는 현대차그룹을 ‘정보통신기술(ICT)기업보다 더 ICT를 잘하는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차그룹을 ‘자동차 생산기업’에서 ‘정보통신기술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현대기아차의 순혈주의를 과감하게 타파했다.
외부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했을뿐 아니라 외부 기업과 협력하는 ‘오픈 이노베이션’에도 적극적 모습을 보였다.
정 수석부회장의 이런 전략을 놓고 구체적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도 나온다.
현대차그룹은 19일 미국 브라운대학교와 중장기적 공동 연구과제 진행 등 교류 협력을 지속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각 분야 최고 기술력을 지닌 글로벌 파트너들과의 협업 프로젝트인 ‘현대 비저너리 챌린지’의 첫 번째 사례로 진행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 비너저리 챌린지를 통해 뇌공학과 컴퓨터공학, 생물학, 신경과학, 심리학, 의학 등을 자동차산업과 융합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현대차가 이를 통해 어떤 그림을 그리려하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자동차산업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이는 분야라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있다.
15일에는 미국 드론기업인 ‘톱플라이트테크놀러지스’에 투자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톱플라이트테크놀러지스와 협업해 고성능 무인항공기를 활용한 새로운 사업 가능성을 모색한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미래를 널리 내다본 전략적 투자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등 미래차시장이 바싹 앞으로 다가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대차그룹의 미래 기술 투자 내용이 '한가해 보인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독일 폴크스바겐은 이미 올해 초 컴퓨터 그래픽처리장치(GPU) 선두기업인 엔비디아와 세계 차량공유 1위 기업 우버 등과 자율주행 분야에서 협업하기로 했다. 토요타도 엔비디아와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서 동맹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BMW와 피아트크라이슬러(FCA), 콘티넨탈 등은 인텔과 손을 잡았는데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기 위한 글로벌 완성차기업들의 합종연횡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차그룹은 아직 엔비디아와 인텔 어느 곳과 손을 잡을지 정하지 않았는데 자칫 자율주행차 경쟁에서 선두기업들에게 밀릴 위험이 있다.
송선재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현대차그룹은 완전 자율주행 차량 출시를 2030년으로 계획하고 있어 다른 완성차기업들과 비교해 시기가 늦다”며 “커넥티드카를 통한 현실적 수준에서만 대응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 기술 격차 따라잡기 위한 인수합병 전략 바꿀까
현대차그룹은 미래차 관련 기술을 내재화하기 위해 인수합병에도 소극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현대차그룹이 그동안 진행한 전략적 투자 형태를 살펴보면 기술 제휴와 지분 투자 등이 대부분이다. 전략이 서지 않아 과감한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중장기 전략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유망 기업을 적극적으로 사들이는 다른 완성차기업들과 대비된다.
제너럴모터스(GM)는 2016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크루즈를 10억 달러에 인수했다. GM은 현재 이를 GM크루즈라는 별도 법인으로 분리했는데 현재 자율주행부문의 핵심회사로 평가받는다.
GM은 2017년에 자율주행차의 ‘눈’으로 불리는 라이다 장비를 개발하는 스트로브를 인수해 자율주행차에 탑재되는 하드웨어 기술도 확보했다.
다임러는 2015년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BMW, 아우디와 손잡고 초정밀 지도 서비스기업 히어를 인수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택시 호출 서비스인 마이택시를 인수해 자회사로 삼고 있기도 하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다른 완성차기업보다 기술 확보에 늦게 뛰어든 상황이다.
상호 제휴나 인수합병을 통해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시간을 단축해야 하지만 그룹 차원의 ‘통 큰’ 베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업계는 바라본다.
장문수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현대차그룹이 신규 투자와 제휴, 사업 확장의 방향성을 더욱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며 “투자 규모의 확대와 투자 금액, 시점의 구체화가 경쟁기업들과 비교해 얼마나 의미를 지니는지가 향후 기업가치의 회복 속도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 수석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미래차 자동차시장과 관련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소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과 관련해 미국 ACM, 오로라, 중국 딥글린트 등에 투자하고 있으며 자율주행에 필요한 인공지능(AI)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기업인 글로벌스타트업과 중국 바이두 등과도 손을 잡고 있다.
◆ 친환경차와 고급차 브랜드 전략도 문제점 노출
현대차의 친환경차와 제네시스 브랜드 전략을 놓고 불안한 시선은 여전하다.
현대차는 친환경차로 전기차와 수소차를 동시에 육성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현대차가 해외 기관투자자 등을 상대로 진행한 기업설명회(NDR) 자료를 보면 현대차는 현재 전기차 13종, 수소차 1종 등 모두 14종의 친환경차를 보유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전기차 36종, 수소차 2종으로 친환경차 라인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볼륨으로만 보면 전기차 제품군 확대를 친환경차 전략 1순위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 수석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그룹 경영진들이 수소차 역량을 강화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어 전기차에 소홀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재일 연구원은 “현대차는 친환경차와 관련한 연구개발 역량을 분산하고 있는데 이는 전기차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약화할 수 있다”며 “이미 많은 기업들이 전기차시장을 제패하기 위해 전력질주하는 상황에서 현대차는 방향성을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바라봤다.
위기에 봉착한 제네시스 브랜드 전략도 다시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2016년부터 미국에 제네시스의 최고급 세단 G90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제네시스를 취급하는 딜러 수를 한정하고 브랜드 마케팅을 확대하는 전략으로 고급차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했지만 판매량은 오히려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이 연구원은 “글로벌 고급차시장은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개발도상국을 제외하면 성장이 정체된 시장”이라며 “현대차 제네시스가 고급차가 아닌 고성능 전기차 혹은 자율주행차 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을 시도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차그룹은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실행했던 관행과 전략들을 원점에서 재점검하고 회사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며 “과거 토요타뿐 아니라 GM과 폴크스바겐이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