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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기택 KDB금융지주 회장겸 KDB산업은행장 <사진=KDB산업은행> |
홍기택 KDB금융그룹 회장의 우려가 현실이 됐다. 산업은행이 13년 만에 적자를 낸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 참여로 ‘정책금융 맏형’ 체면은 세웠지만 잃은 게 너무 많다.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지난해 1조4473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산업은행은 오는 28일 자사 홈페이지에 해당 사실을 공시한다.
산업은행의 이번 적자는 2000년 1조3984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이후 13년 만의 일이다. 산업은행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2117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했지만 이듬해 곧바로 적자로 돌아섰다. 당시 산업은행이 맡은 대우그룹 구조조정이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산업은행은 2001년부터 다시 흑자를 회복했다. 2001년 109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했고 이후 2012년 9522억 원의 순이익을 내면서 12년 연속 흑자 기조를 지속해왔다.
홍기택 회장은 이미 산업은행의 적자를 예상하고 있었다. 홍 회장은 지난달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난해 적자규모가 1조 원대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최악의 경우 올해 1조 원의 적자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 13년 만의 적자, 2000년의 복제판?
산업은행이 13년 만에 적자를 기록한 까닭은 기업 구조조정에 너무 많은 돈을 썼기 때문이다. 현재 산업은행은 적자를 기록했던 2000년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당시에도 산업은행은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기업구조조정에 힘썼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홍 회장이 밝힌 이번 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지난해 급증한 대손충당금이다. 산업은행의 대손충당금은 지난해에만 1조 원 가까이 늘었다. 2012년 7천825억 원이었던 대손충당금은 지난해 1조7731억 원까지 치솟았다. 대출채권도 6조2447억 원이 증가한 98조1198억 원을 기록했다.
산업은행은 지난해 조선과 해운, 건설이 업황이 불황을 겪으면서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부실을 떠안게 됐다. 특히 STX그룹과 대우건설이 산업은행 적자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산업은행은 지난해 STX그룹에 대한 구조조정에 뛰어들었지만 아직까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산업은행은 STX그룹의 대손충당금을 쌓느라 지난해 상반기에만 3552억 원의 적자를 냈다. 이 시점부터 이미 적자가 불가피하다는 예상이 나왔다.
팬오션(구 STX팬오션)은 STX그룹에서 벗어나 올해 경영정상화와 매각을 노리고 있지만 쉽지 않다. 팬오션의 회복세가 더딘 탓이다. 이에 홍기택 회장은 지난 2월 간담회에서 “연내 매각을 위해 인수 희망자에게 자금 대출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더 이상 STX의 부실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산업은행에 STX조선해양은 ‘밑 빠진 독’과 같다. 산업은행은 원래 2조7000억 원의 자금을 지원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 1조8000억 원의 추가 자금 필요성이 제기돼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그동안 투자한 액수가 너무 많아 발을 빼기 어려웠던 것이다. 당시 채권단 관계자는 “회생 가능성이 불투명한데 추가 지원하는 것은 탐탁지 않다”라며 “도대체 언제까지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하냐는 불만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 인수한 대우건설은 지난해에만 9천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산업은행에 입혔다. 산업은행은 50%가 넘는 대우건설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대우건설의 주가와 장부가는 건설경기 침체로 모두 하락했다. 특히 대우건설의 장부가액이 2조5000억 원까지 떨어지면서 영업권 손상 부담도 안게 된 상태다.
산업은행은 비우량 기업의 회사채를 매입하는 ‘백기사’를 자처하기도 했다. 지난해 산업은행이 사들인 A등급 이하 회사채 규모는 1조4376억 원에 달했다. 산업은행은 지난해 7월 신용등급이 BBB+였던 두산건설의 회사채 1천억 원 중 500억 원어치를 단독으로 인수했다. SK해운이 지난해 7월 발행한 5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도 전액 인수했다. 10월 현대상선의 회사채 2240억 원을 매입하기도 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산업은행의 이러한 ‘통 큰 인수’가 재정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산업은행이 정책적 기능을 강화하면 해외 기관으로부터 자산 부실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며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이기 때문에 재정이 부실해지면 결국 국민 세금이 공적자금으로 투입될 것”이라고 말했다.
◆ ‘다이어트’ 필요한 산은, 졸속매각은 경계해야
홍 회장은 취임 당시부터 정책금융의 ‘맏형’을 맡겠다고 자신했다. 홍 회장은 지난해 취임식에서 “정책금융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되든 산은은 정책금융기관 맏형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결과 산업은행은 규모가 비대해져 재벌그룹에 버금가는 공룡기업이 됐다. 전문가들은 산업은행이 비대해짐에 따라 부실기업이 시장에서 퇴출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산업은행이 부실기업을 떠안게 되면 재무건전성이 악화돼 결국 국민 세금이 투입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26일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산업은행 60주년 기념 선제적 기업구조조정 세미나’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제기됐다. 발제를 맡은 김광두 서강대 경제학과 석좌교수는 “부실기업의 손실을 국민 세금으로 메워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선제적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면 결국 국민 세금으로 기업 부실을 막는 행태가 반복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홍 회장도 이날 세미나에서 선제적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홍 회장은 “기존의 사후적 구조조정에서 벗어나 상시적이고 선제적인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선제적 구조조정을 통해 좀비기업으로 자금 유입을 미리 차단한다면 자원배분의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홍 회장은 지난달 간담회에서도 “사전적 구조조정 등을 통해 올해 순수익 6000억 원을 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산업은행이 최대 채권은행으로 있는 동부와 현대, 한진그룹에 대한 구조조정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이들 그룹들은 현재 자구계획안을 내놓은 상태다. 홍 회장은 구조조정을 서둘러 마무리해야 동양그룹이나 STX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여전이 문제는 남아있다.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는 것은 필요하지만 자칫 졸속 매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가 동부그룹 매각이다. 산업은행은 원래 특수목적회사(SPC)를 설립해 동부그룹으로부터 매각할 회사를 넘겨받고 자금을 공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인수를 희망하는 후보자들이 등장하자 산업은행은 개별 매각으로 방향을 바꿨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매수하겠다는 후보자가 나타났는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SPC 매각 방법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경우 제값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기업평가는 지난달 28일 보고서를 통해 “주요 자산이 SPC편입 방식이 아닌 개별매각 방식으로 추진됨에 따라 자구계획이 늦어지고 축소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 작업은 서두를수록 불리한데 빨리 마무리 지으라고 압박만 하니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한 임원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는데 지지부진하다는 지적만 받으니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