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놓고 미국계 투자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다시 씨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제시한 지배구조 개편방안은 정 부회장이 지분 상당수를 보유한 현대글로비스를 활용하는 데 불리할 수 있어 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의 순조로운 지배구조 개편을 위해 엘리엇매니지먼트를 설득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요구 가운데 일부를 수용할 가능성도 높다.
9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엘리엇매니지먼트가 8월14일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모비스에 각각 보낸 서신을 놓고 현대차그룹은 “모든 주주들과 함께 주주 가치를 향상하는 방법 등을 공유하기 희망한다”며 원론적 태도를 지키고 있다.
국내 자본시장법으로 볼 때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요구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이 법을 위반할 소지가 있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서신에서 △향상된 기업구조 △자본 관리와 주주 환원정책의 최적화 △다양함과 전문성을 갖춘 이사회 구성 등 세 가지를 중점적으로 요구했다.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요구사항 가운데 ‘향상된 기업구조’와 관련해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생각하는 이상적 지배구조 개편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현대차그룹을 더욱 고심하게 만들고 있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우선 현대모비스를 AS사업과 모듈 및 핵심부품사업으로 분할한 뒤 AS사업은 현대차와, 모듈 및 핵심부품사업은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라고 요구했다.
현대차그룹이 3월에 처음 내놓은 지배구조 개편안과 비교할 때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할 현대모비스 분할법인이 ‘모듈 및 AS사업’에서 ‘모듈 및 핵심부품사업’으로 변화한 것이다.
사실상 현대모비스의 주력사업을 통째로 현대글로비스와 합칠 것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현대모비스 보유지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포석으로 현대모비스 주력사업과 현대글로비스의 합병 시나리오를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4월에 처음으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방안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냈을 때 현대모비스를 분할한 뒤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방안 자체에 반발했다.
하지만 현대모비스의 분할을 활용하지 않고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것이 사실상 힘들다는 지적이 증권가 안팎에서 나오자 현대모비스 분할에 찬성하되 실리를 취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가능성이 크다.
엘리엇매니지먼트는 현대모비스 지분 2.6%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대모비스 분할법인과 현대글로비스를 합병이 재추진된다면 현대모비스의 합병비율을 높게 산정할 수 있도록 판을 유도하는 것이 엘리엇매니지먼트에게 유리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할 현대모비스 분할법인 대상 사업부를 모듈과 핵심부품 등 주력사업으로 정한 것으로 투자금융업계는 바라본다.
정의선 부회장으로서는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미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 비율을 놓고 시장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마당에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노골적으로 현대모비스의 합병비율을 높여달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율은 23.29%로 오래 전부터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서 현대엔지니어링 등과 함께 정 부회장의 승계에 핵심 역할을 할 회사로 꼽혔다.
현대글로비스를 다른 계열사와 합병하면서 현대차그룹의 지배회사로 세우게 되면 정 부회장이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현대차그룹을 안정적으로 승계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모비스 분할법인과 현대글로비스의 합병에서 현대모비스 분할법인의 가치가 커지게 되면 정 부회장이 확보하게 될 합병법인의 지분율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현대모비스 분할법인의 가치가 커질수록 정 부회장은 지배회사(합병법인)의 지분을 추가로 취득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넣어야 할 필요성이 커진다.
문제는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제안을 현대차그룹이 완전히 외면하기도 힘들다는 점이다.
정 부회장이 3월에 처음으로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을 내놓았을 때 증권가에서는 ‘승계를 위한 정공법을 선택했다’는 비교적 우호적 반응을 내놓았지만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쉽지 않은 상황으로 몰렸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글래스루이스도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의견 표명 이후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 비율 산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주장을 외면한다면 이번에도 지배구조 개편에 잡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은 정 부회장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대차그룹으로서는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주장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시장 눈높이에 맞추는 데 주력한다는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표명하면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주장 가운데 일부를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을 낼 것이라는 의견이 재계 안팎에서 나온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