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세 경영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무엇보다 철저한 능력 검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영세습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가족 소유 기업이 4세대까지 살아남는 비율은 고작 4%
미국에서 가족 소유 기업이 3세대 이상 살아남는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미국의 프라이빗 뱅킹 업체 US Trust가 2008년 기업 가치가 미화 200만 달러를 초과하는 기업 242곳을 조사한 결과이다. 열 개의 기업 중 무려 여덟 개 이상이 사라지는 셈이다. 가족 소유 기업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는 리서치 업체 FFI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 소유 기업이 4세대까지 가면 살아남는 비율은 고작 4%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조사 대상이 된 가족 기업이란 한 일가족이 회사의 최대 주주인 기업을 말한다. 창업주의 3세가 경영주이거나 전문 경영인을 고용한 경우를 모두 포함한다. 국내의 경우, 사실상 거의 모든 기업에서 소유주는 곧 경영주이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을 아울렀을 때의 생존율이 15%라면 오너 기업의 3세대 이상 생존율은 얼마나 될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국내에서 창업주의 3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려는 움직임 역시 가속화되고 있다. 재계의 역사가 60년이 넘어가면서 기업의 경영진이 2세에서 3세로의 세대교체 시점에 들어선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등은 이미 전면에 등장했으며, 한화의 김동관 실장, 금호아시아나의 박세창 부장 등 젊은 30대들도 보폭을 넓히고 있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이 지난 10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공기업을 제외한 자산 상위 10대 기업의 GDP 대비 자산은 무려 84%에 이른다. 이처럼 대기업 편중 현상이 심한 실정에서 3세 경영 승계는 단순히 그 기업의 존망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 경제의 사활이 걸려있는 사인이다. 그렇기에 3세 경영 승계에 대해 좀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국내의 3세 경영인들은 과연 낮은 생존율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소유와 경영의 분리의 원칙은 알지만…
3대 이상 살아남은 가족 소유의 해외 기업 대다수는 오너와 경영을 분리하는 원칙을 따르고 있다. 회사를 소유하는 소유주와 경영하는 전문 경영인이 별개의 존재인 ‘소유와 경영의 분리’ 방식은 1932년 벌리와 민스가 제창한 이래 미국식 기업 경영의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전문 경영인 고용의 장점으로 다른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 인센티브 제도를 통한 이윤 극대화의 추구, 기업문화 및 조직의 혁신에 유리한 포지션, 투명한 지배 구조 등을 꼽는다.
미국의 비공개 기업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한 해 매출이 1340억 달러에 달한다는 카길, 우리에게는 M&M초콜릿으로 더 친숙한 마스, 포춘 500 선정 2007년 매출 기준 세계 최대 기업의 위용을 뽐내는 월마트 등은 모두 창업주 일가가 최대 주주이지만, CEO를 따로 고용해 경영을 일임하고 있다. 독일의 자동차 회사 포르쉐 역시 경영권을 둘러싼 치열한 가족 싸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가족 구성원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기로 합의, 1970년 이후부터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되어 왔다.
창업주의 3세가 경영에 직접 뛰어들어 성공한 사례들도 물론 존재한다. 미국의 언론 재벌 콕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은 창업주의 손자 제임스 C. 케네디이다. 1988년 그가 CEO로 취임한 이래 콕스 엔터프라이즈의 수익은 18억 달러에서 147억 달러로 껑충 뛰었다.
3세 오너의 성공사례…철저한 경영수업
독일의 자동차 회사 폴크스바겐에는 포르쉐와 폴크스바겐의 창시자 포르쉐 박사의 손자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있다. 현재 감독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1993년 파산 직전의 폴크스바겐을 극적으로 회생시킨 주역이며, 2012년에는 포르쉐와의 M&A 전쟁에서 승리하여 포르쉐를 폴크스바겐의 자회사로 편입하는 전적을 올렸다.
그러나 케네디와 피에히 등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오너였기 때문은 아니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케네디는 1972년 콕스 엔터프라이즈에 입사해 리포터, 광고 세일즈, 카피 에디터 등의 분야를 전전하며 실무 경험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피에히 역시 폴크스바겐의 회장이기 이전에 이름난 엔지니어였다. 그가 포르쉐, 아우디, 메르세데스 벤츠 등을 거치면서 아우디 콰트로, 부가티 베이론 등의 명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에서의 오랜 경험이 이들을 전문 경영인으로 만들었고, 실무를 통한 경영 수업이 이들이 거대 기업의 총수로서 기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는 설명이다.
국내 기업들에서 경영과 소유의 분리를 통한 승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이는 '과도기적 선택'에 불과하다. 이는 재산 뿐만 아니라 경영권으로 대표되는 권력도 함께 물려주고자 하는 한국적 가부장 문화와 깊이 관련이 있어 보인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과는 풍토가 다르기 때문에, 국내의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오너 경영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오너 경영의 장점으로 신속한 의사결정, 높은 책임감, 그리고 강력한 조직 문화가 형성 가능한 점 등을 제시한다.
또한,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5년간 공기업을 제외한 30대 민간 기업집단을 조사한 결과, 오너 그룹의 매출액 증가율은 55.8%, 전문경영인 그룹의 매출액 증가율은 34.5%를 나타냈다. 적절한 경영능력을 갖춘 리더를 만났을 경우 오너 그룹이 예상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하는 수치이다.
경영능력을 갖춘 오너가 효율적? 3세 경영능력 검증 거의 없어
그러나 이런 수치가 3세 경영의 성공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오너 경영의 장점 중 하나인 강력한 조직 문화가 3세 경영 승계 과정에서 오히려 뿌리째 흔들리는 현상도 나타난다. 다수의 3세 경영인들이 경영 수업의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자사에 입사해 경험을 쌓는다. 201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이 임원급으로 승진하는 데에는 평균적으로 3.8년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기업 공채로 입사한 일반 신입사원은 임원이 되기까지 평균 19.9년이 소요된다는 재벌닷컴의 조사 결과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뚜렷하다.
취업 및 인사 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직장인 496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73.4%가 이런 3, 4세 경영인의 이른 승진에 대해 ‘비정상적인 현상이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응답했다. ‘일반 사원들에게 박탈감이나 위화감을 줄 수 있어서(48.4%)’라는 이유에서였다. 3, 4세 경영인의 이른 승진은 오너 경영의 장점인 조직 문화를 해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오너 경영 그 자체에 대한 우려의 시각 역시 존재한다. 경영학자들은 오너 경영의 단점으로 독단적인 의사 결정 방식, 오너의 선호에 따라 기업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점, 기업 문화 및 조직 혁신이 쉽지 않은 점 등을 언급한다. 이런 단점은 3, 4세 경영인들이 임원을 거쳐 총수 자리에 오르기 이전의 기간이 매우 짧아 실무적 경영 수업이 부족하다는 부분과 맞물려 불안감을 자아낸다. 대기업의 총수가 독단적으로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경우의 손실은 돌이키기 어려울 수도 있다.
대기업을 일군 창업주의 경영 능력을 3세가 반드시 이어받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일본의 다이오 제지는 한때 일본 제지업계의 선두주자 자리를 목전에 두고 강세를 보였으나, 창업자의 손자 이카와 모토타카가 취임한지 5년만인 2012년 경쟁사 키타고에키슈 제지에 인수되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전자 부문 14위를 자랑하던 산요전기는 2대와 3대로 이어지는 경영 실적 부진과 회계 부정 의혹으로 인해 창업가 일족인 이우에 가문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고, 2009년 결국 파나소닉에 인수되었다. 업계를 호령하던 굴지의 거대 기업들이 경영권 승계 이후 몰락한 사례는 이 외에도 다양하다. 3세 경영인들에게 더욱더 확실한 능력 검증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세를 이루는 이유이다.
3세 경영 시대를 맞이한 대기업들이 15% 생존율의 벽을 뛰어넘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영능력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오너 경영 체제의 장점을 살리기조차 힘들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스스로 경영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 길만이 '세습경영'이라는 비판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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