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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정가제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시내 한 대형서점에서 책을 50% 할인 판매하고 있다. 왼쪽은 김종덕 문체부 장관. |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3천여 종의 서적 가격이 일제히 크게 떨어졌다. 146개 출판사가 2993종 도서를 평균 57% 정도 가격을 내렸다.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출간한지 18개월 이상 지난 도서에 대해 출판사가 가격을 재산정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가격을 할인해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정가를 재산정하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출판산업진흥원은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출판사로부터 재정가 신청을 받았다.
도서정가제에 따르면 출판사는 재정가 2개월 전 이를 출판진흥원에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에 맞춰 재정가를 신속하게 진행하기로 했다.
이번에 정가가 재산정된 도서는 도서정가제 시행일인 21일과 다음달 1일 두 번에 걸쳐 시장에 공급된다.
도서출판업계가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 대형서점에서 최대 90%까지 책값을 할인해 판매하고 있다. ‘마지막 땡처리’ ‘도서정가제 시행 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고 홍보한다.
급기야는 21일 이후 출간하는 책들에 대해 예약판매라는 이름으로 할인 제한 폭 이상으로 할인을 해주거나 마일리지를 제공하는 등 편법도 등장했다.
출판사들은 신간발매를 21일 전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21일 전까지 할인이나 사은품 증정 등 혜택을 기존처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도서출판시장이 출렁거릴 정도로 도서정가제 개정안의 파급력은 크다.
당장 책값이 오를 것으로 예상하는 소비자들의 우려가 가장 많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책값이 평균 220원 인상될 것으로 내다본다.
출판사나 서점 역시 도서정가제에 꼭 긍정적이지 않다. 중소출판사와 서점보호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소비자들의 반발만 사 가뜩이나 어려운 도서출판시장이 더 얼어붙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 왜 도서정가제를 개정하나
국무회의는 11일 도서정가제 시행안을 통과시켰다. 도서정가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 중고도서의 범위에서 기증도서를 제외해 달라는 출판업계의 요구를 수용한 것을 제외하면 원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로써 도서정가제 시행을 위해 모든 절차가 끝났고 21일 정가제 시행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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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덕 문화체육부 장관 |
21일부터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도서는 정가의 10%까지만 할인이 허용된다. 판매자는 여기에 마일리지 적립 등 5%까지만 추가혜택을 줄 수 있다. 합계 15%까지 직간접할인이 가능한 셈이다.
우리나라는 2003년부터 도서정가제를 시행해 왔으나 논란이 많았다.
할인허용폭도 19%로 큰 데다 18개월 내 신간만 도서정가제 적용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실용서적, 참고서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훼손된 책, 기증도서도 정가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자 일부에서 인문서적을 실용서로 바꾸어 판매하는 등 각종 편법할인 판매가 판을 쳤다.
이런 불완전한 도서정가제를 보완하기 위해 이번에 개정 도서정가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개정안은 할인폭을 축소했을 뿐 아니라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정가제 적용대상에 포함했다.
과거 공공기관과 도서관에서 구입하는 책은 정가제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사회복지시설에 판매하는 경우만 예외로 뒀다.
출간 18개월 이상 지난 구간도서도 정가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이전에 구간도서는 정가제의 적용을 받지 않아 서점이 할인폭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지만 이제 신구간 구별 없이 15% 할인폭의 제한을 받는다.
대신 구간도서의 경우 출판사가 정가를 다시 정할 수 있다. 하지만 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서점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출판사가 정한 가격대로 판매해야 한다는 점에서 신간과 구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정 도서정가제는 기존 도서정가제보다 관리가 한층 엄격해진 것이다. 정부는 시행 후 3년마다 재검토해 제도를 수정보완해 나가기로 했다.
◆ 도서정가제가 필요한 까닭
도서정가제는 가격 중심으로 왜곡되고 있는 도서출판시장을 가격보다 가치 중심으로 바로잡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창작과 출판의 다양성을 보장려고 한다. 특히 중소 출판사와 서점을 보호해 소비자가 양질의 도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도서출판시장이 어려워지면서 중소서점과 출판사는 점점 설 곳을 잃고 있다. 순수하게 책만 취급하는 전국의 서점은 2003년 2247개에서 2013년 1625개로 줄어들었다. 특히 66㎡(20평) 미만의 동네서점은 2017개에서 887개로 급감한 반면 330㎡(100평) 이상 대형서점은 오히려 커졌다.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우리나라 출판사 가운데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펴내지 않은 출판사는 94%에 이른다. 최근 10년 사이 가장 비중이 높았다. 이들 가운데 문을 닫는 출판사도 적지 않다.
업계는 매년 수백 개 출판사가 폐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출판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부는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경쟁이 제한돼 단기적으로 소비자 권익이 감소할 수 있다”면서도 “장기적으로 중소출판사의 다양한 출판물 발행으로 문화 다양성이 확보되고 대형·지역·온라인서점의 균형발전으로 독자의 접근권이 확대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또 “할인판매를 전제로 형성된 가격 거품이 사라져 소비자에게 문화경제적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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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출판문화협회를 비롯한 단체들이 10월16일 올바른 도서정가제 정착을 위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 공청회를 열고 있다. |
◆ 불완전한 개정 도서정가제, 효과 미지수
그러나 출판사와 서점 등 업계는 개정 도서정가제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출판사와 서점들은 시행안이 통과된 뒤인 12일 자율협약을 맺고 대국민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는데 이를 일주일 연기했다. 그만큼 고민이 많다는 반증이다.
특히 과태료 인상, 무료배송 금지 등 업계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으면서 도서정가제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고흥식 한국출판인회 사무국장은 “문체부는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업계와 협의하지 않고 요구안도 반영하지 않았다”며 “이 상황에서 업계가 자율협약을 만든다 해도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개정안에 쟁점사항이었던 배송비와 경품, 제휴할인 등이 규제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형 온라인서점들이 앞으로도 카드사나 통신사와 손잡고 할인을 제공하고 무료배송을 하는 등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중소서점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는 구조라는 것이다.
문체부 관계자는 업계가 요구하는 배송료와 제휴할인 규제에 대해 “정부 방침은 규제를 완화하는 쪽으로 가는데 규제를 강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지금 상태로 도서정가제는 중소서점을 살린다는 취지를 살리지 못할 것”이라며 “정부는 완전 도서정가제로 법을 다시 개정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 공급률 규제해야 근본적 문제 해결 가능
더 큰 문제는 개정 도서정가제가 도서출판시장를 위기로 몰고 있는 근본적 원인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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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
업계는 중소출판사와 서점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정가가 아닌 공급률이라고 주장한다.
공급률은 출판사가 서점에 책을 공급하는 가격을 의미한다. 정가 1만 원짜리 책을 출판사가 7천 원에 서점에 판매한다면 공급률은 70%가 된다.
그러나 출판사가 서점에 제공하는 공급률은 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중소서점의 공급률은 75%지만 대형서점은 60% 수준이고 온라인서점은 50%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대형서점이 할인할 때 출판사에 30%의 공급률을 요구하기도 한다.
공급률이 20~30% 씩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중소서점은 할인판매를 할 수 없고 중소출판사는 수익을 낼 수 없다.
개정 도서정가제에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에 유리한 부분이 남아있다면 시장의 수요는 지금처럼 대형·온라인 서점에 몰리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대형·온라인서점이 요구하는 낮은 공급률에 출판사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들어줄 수밖에 없다.
공급률은 그대로인데 소비자 판매가의 할인폭은 줄었으니 대형·온라인서점의 이익만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업계 안팎에서 도서정가제 개정안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중소출판사와 서점들은 완전 정가제를 정착시키고 표준공급률을 도입해 대형·온라인서점이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유통마진을 내리는 쪽으로 공론화해서 통일된 공급률 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