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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사기성 기업어음(CP) 및 회사채를 판매해 투자자에게 피해를 끼치고 부실 계열사를 부당지원한 혐의로 지난 1월 14일 구속됐다. <사진=뉴시스> |
현재현(64) 동양그룹 회장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동양제국’은 유동성 위기에 빠져 주요 계열사가 매각되는 등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다. 현 회장은 사기성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발행해 투자자에게 거액의 손실을 입힌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현 회장의 공판은 오는 25일부터 시작된다. 현 회장 측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현 회장의 변호인은 지난달 26일 첫 번째 준비기일에서 “현재로서는 공소 사실을 부인한다”며 “현 회장과 의견교환 후 구체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지난 1월13일 구속됐다. 현 회장과 함께 공모혐의를 받은 정진석 전 동양증권 사장과 김철 전 동양네트웍스 사장, 이상화 전 동양인터네셔널 사장 등 10명도 함께 재판을 받는다.
◆ ‘경기고 천재’에서 사기 혐의로 구속까지
현 회장은 학자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알려진 고 현상윤 고려대 총장이 조부이고 이화여대 의대 교수였던 현인섭 교수가 부친이다. 현 회장의 형제들도 모두 학계에 몸담고 있다. 맏형 현재천 교수는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고, 둘째형인 현재민 교수는 카이스트 해양시스템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현 회장은 일찍부터 ‘천재’로 불렸다. 그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7년 경기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3학년 재학중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7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했고 1973년엔 서울대 대학원에서 민사법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 회장은 1975년 부산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동양그룹의 창업주인 이양구 회장의 장녀 이혜경 동양그룹 부회장과 결혼하면서 검사를 그만뒀다. 현 회장은 동양시멘트 이사로 그룹경영에 참여했다. 두 딸 밖에 없던 이양구 회장은 현 회장을 승계자로 점찍고 혹독하게 경영수업을 시켰다.
현 회장은 1983년 동양시멘트 사장에 취임해 본격적으로 경영에 나섰다. 그는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시절의 경험을 살려 금융업에 집중했다. 1984년 현 동양종합금융증권의 전신인 일국증권을 인수했고 1986년 동양증권 회장에 취임했다. 현 회장은 동양증권을 인수한 뒤 5년 만에 국내 10대 증권사로 키워냈다.
1989년 이양구 회장이 사망하자 현 회장은 동양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당시 현 회장은 국내 최초의 ‘사위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현 회장은 취임 후 본격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1992년 가전회사인 동양매직을 설립했다. 2006년에는 한일합섬을 인수해 섬유업에도 진출했다.
현 회장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극복해냈다. 정부의 공적 자금 지원 없이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또 5000억 원대에 이르는 고객손실을 전액 보상해주며 신뢰있는 기업가란 평가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 회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넘지 못했다. 경기침체 상황에서 진행된 과도한 투자는 엄청난 부채가 되어 돌아왔다. 특히 동양그룹의 핵심사업인 시멘트와 레미콘이 건설경기 침체 속에서 적자를 이어나간 것이 치명타였다. 현 회장은 지속적 자금차입을 통해 적자를 메우려 했지만 유동성 위기가 터져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현 회장은 2010년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동양생명을 매각해 가까스로 9000억 원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양생명 매각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동양그룹의 재무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매각 당시 1200%에 달하던 부채비율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현 회장은 지난해 상반기까지 시멘트와 발전소 등을 추가로 매각한다는 자구책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매각협상은 난항을 겪었고 그 사이 부채는 계속 늘어갔다.
현 회장은 동양을 살리기 위해 결국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다. 회사채와 CP발행을 늘려 ‘돌려막기’를 시도한 것이다. 위험부담이 너무나 큰 선택이었지만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현 회장의 선택은 결국 최악의 상황을 맞게 했다. 그는 사기성 회사채와CP 판매의 주동자로 지목됐다. 현 회장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개인투자자만 4만여 명에 이르고 피해액은 모두 1조3000억 원이나 된다. 여기에 현 회장이 계열사에 부당지원했다고 추정되는 금액이 6652억 원이나 된다.
주가조작 혐의도 드러났다. 지난 2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현 회장이 호재성 정보를 흘려 주가를 조작해 거액의 시세차익을 챙긴 사실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현 회장은 2012년 초부터 동양시멘트가 금맥탐사에 나선다는 소식을 흘려 주가를 뛰게 했다. 현 회장은 주가가 오른 상황에서 지주사 동양이 보유하고 있는 동양시멘트의 지분 3.6%를 매각했는데, 그 뒤부터 주가는 다시 큰 폭으로 떨어졌다.
◆ 담철곤 회장의 지원 거부
현 회장의 추락과정에서 회생할 기회는 있었다. 바로 동서의 회사인 오리온의 지원이었다. 현 회장은 오리온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다면 동양그룹을 회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 회장은 지난해 추석 즈음 담철곤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현 회장은 담 회장 부부가 보유한 오리온 주식을 담보로 최대 1조 원 상당의 자사담보부증권(ABS)을 발행해 동양그룹의 회사채와 CP를 상환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 회장은 평소 담 회장과 좋은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동서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담 회장은 현 회장의 요청을 거절했다. 오리온그룹은 지난해 9월23일 공식적으로 동양그룹에 대한 자금지원은 없다고 밝혔다. 당시 담 회장의 부인인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은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최근 동양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요청 받고 고민했으나 오리온은 존속과 번영을 지속해야 한다”고 거절이유를 설명했다.
담 회장이 지원을 거부하게 되자 동양그룹은 날개없이 추락했다. 지난해 9월27일 동양그룹 계열사들이 무더기로 신용이 강등됐다. 그로부터 사흘 뒤 지주회사 동양과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은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다음날 10월1일 동양네트웍스와 동양시멘트도 회생절차를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