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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가나는 성공했는데 이두는 왜 실패했을까

백우진 smitten@naver.com 2017-09-29 10: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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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빌려 쓴 이두(吏讀)가 우리 문자생활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 근본요인은 무엇일까?

우리와 달리 일본은 한자를 차용해 만든 자기네 문자를 줄곧 쓰고 있다.
 
히라가나는 성공했는데 이두는 왜 실패했을까
▲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국 편집위원.

일본 문자는 일본어의 음을 나타내기 위해 한자 모양을 간략하게 변형해 만든 것이다.

일본 문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는 표현할 수 있는 음가(音價)가 부족하나마 일본어를 표기하는 데 쓰이고 있다.

이와 비교해 이두는 삼국시대 이래 문서를 작성하는 데 활용됐으나 한자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 음가의 차이와 표기의 차이

다음 세 단어는 이두 표기법을 활용한 사례다. 이두 표기법 가운데 우리말을 그 음에 해당하는 한자로 적은 방식이다. 
 

고목(告目), 근각(根脚), 뎨김(題音). 

고목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쓴 보고서나 편지’를 뜻하고 근각은 ‘죄를 범한 사람의 이름, 생년월일, 죄상, 인상, 조상(祖上)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표’를 가리킨다.

뎨김은 백성이 관부(官府)에 제출한 소장(訴狀), 청원서, 진정서에 대해 관부에서 써주는 처분(판결문, 처결문)을 일컫는데, ‘제김’이라고도 한다. 

한자는 글자가 수 만 개에 이른다. 그래서 얼핏 한자는 음가도 아주 많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상은 생각과 다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단어의 음 가운데 그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는 게 많다.

떠오르는 몇 가지만 살펴보자. 놀, 볼, 숨, 밥, 밭, 봅, 솜, 딱, 따.

우리 조상들은 한자에는 없고 쓸 일은 많은 음은 만들었다. ‘놀’은 ‘노(奴)’에 ‘을(乙)’을 받쳐서 썼다. ‘볼’은 ‘보(甫)’에 ‘을(乙)’을 받쳐서 乶라고 적었다. ‘솜’은 ‘소운(素雲)’이라고 적고 ‘솜’이라고 읽었다.

음이 일치하지 않지만 아쉬운 대로 그렇게 활용했다. 우리말과 한자의 불일치는 크다. 이를테면 아주 쉬운 단어인 ‘쉽다’의 ‘쉽’은 한자로 표기할 방법이 마땅치않다. 
 
한자 몇 만 글자가 있지만 음절로 구분하면 410개에 불과하다. 일본어의 음가는 몇 십 개로 이보다 훨씬 적어 한자를 빌려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의 음절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만 추려도 1500가지에 이른다. 우리말에는 한자로 표현되지 못하는 음가가 1000개가 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말은 음가가 풍부해 한자를 차용하는 방식으로는 일부밖에 표기할 수 없다.

이두의 근본적인 한계는 여기에 있었다. 만약 우리말 음절이 일본어보다 훨씬 많지만 중국어와 비슷한 정도라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두가 널리 쓰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두의 한계는 우리말의 음가가 풍부함을 드러냈다. 음이 풍부한 것은 언어로는 훌륭한 특질이어도 문자를 만들기엔 불리한 변수였다. 이로부터 우리말을 문자로 담으려면 서양 알파벳처럼 음소(音素)로 접근해야 한다고 세종은 착안했으리라고 나는 추정한다. 

세종은 음소접근에 더해 세계 문자사에서 전무후무한 제자원리를 생각해낸다.
히라가나는 성공했는데 이두는 왜 실패했을까
▲ 이두로 표기된 서적.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만드는 대신 기본 글자꼴에 획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세종은 자음제자에는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라는 중국 음운학의 연구결과를 활용했다. 

세종이 한글 모음에서 발휘한 독창성에는 우리 언중의 모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됐다. 우리말은 모음조화가 있는 몇 안 되는 언어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우리는 모음을 반대 음가를 가진 두 모음씩 묶어 인식한다. 우리는 ‘아’와 ‘어’를 반대 음가로 이해하고 ‘오’와 ‘우’도 한 조합으로 파악한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이다. 

‘아’와 ‘어’가 한 조합이고 ‘우’가 ‘오’의 반대 음가이며 ‘야’는 ‘아’에서, ‘여’는 ‘어’’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인식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에 한글 모음의 글꼴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 자유와 직관의 언어, 한글
그래서 훈민정음의 모음이 조합형이면서도 직관적이고 간결해진 것이다. 

영어 알파벳을 보라. 자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음에서도 이런 직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 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이는 한글 해설서 '훈민정음' 서문에서 예조판서 정인지가 한 말이다. 우리말은 온갖 소리를 표현해내는 언어다. 한글은 그 풍부한 우리말을 담아내는 문자다. 한글이 만들어지니 마침내 우리말로 표현된 바람소리, 학 울음 소리, 개 짖는 소리를 모두 담아낼 수 있었다. 

훈민정음은 소리가 풍부한 우리말과 모음에 대한 언중의 통찰력이라는 바탕에 세종이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류 지적 유산의 걸작이다. 이 ‘바탕’이 별로 거론되지 않은 듯하여 한글날을 앞두고 몇 글자 적었다.
 
백우진은 글쓰기 강사로 활동한다. 책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 '글은 논리다'를 썼다. 호기심이 많다. 사물과 현상을 관련지어 궁리하곤 한다. 책읽기를 좋아한다. 글을 많이 쓴다. 경제·금융 분야 책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 주식투자법', '안티이코노믹스', '한국경제실패학'을 썼다. 마라톤을 즐기고 책 '나는 달린다, 맨발로'를 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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