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맞춰 가격 인상을 억제하다가 경쟁사와 비슷한 시기에 가격을 연달아 올린 것을 놓고 담합으로 의심받는 것이 너무하다는 내부 하소연도 나온다.
| ▲ 식품업계에서는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조사가 여러 품목으로 확대되면서 기업의 정상적 경영 판단까지 위축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진은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
30일 비즈니스포스트 취재를 종합하면 식품업계에서는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담합 조사가 여러 품목으로 확대되면서 기업의 정상적 경영 판단까지 위축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식품기업들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맞춰 원가 절감과 가격 인상 최소화에 힘써 왔다는 입장이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식품은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브랜드와 대체 제품이 많아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하다"며 "원가를 줄여 가격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여러 분야에서 조사가 이어지니 기업으로서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기업이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책임을 지고 바로잡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조사 결과를 놓고 소송이 이어지고 최종 판단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어 대응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다"고 덧붙였다.
공정위 중점조사기획단은 28일 농심과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 등 라면 제조업체 4곳을 대상으로 가격 담합 의혹에 대한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14일 대상과 오뚜기, CJ제일제당 등을 대상으로 김치·두부·유지류·선물세트·즉석밥류·장류 등 6개 품목을 조사한 데 이어 2주 만에 라면업계까지 조사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공정위는 라면업체들이 가격 인상 시기나 폭을 사전에 협의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제조사가 유통업체의 판매가격을 부당하게 통제하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 여부도 조사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오뚜기 관계자는 "그동안 법적·도덕적 의무를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 온 만큼 특별히 문제가 될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조사가 시작된 만큼 사실관계에 따라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품기업들이 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원재료와 환율, 인건비, 물류비 등 비용뿐 아니라 정부의 물가 안정 정책도 영향을 미친다.
올해 3월 라면업계의 가격 인하 과정이 대표 사례다.
농심과 삼양식품은 3월 초까지만 해도 라면 가격 인하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밀가루 가격이 내려가더라도 다른 원재료와 인건비, 에너지 비용 등이 상승해 가격을 내릴 여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농림축산식품부가 3월5일 라면업체들과 간담회를 열어 물가 안정 협조 방안을 논의한 뒤 상황이 달라졌다.
농심과 오뚜기, 삼양식품, 팔도 등 라면 4사는 3월12일 일제히 일부 제품의 가격 인하 계획을 발표했다. 4월 출고분부터 적용된 가격 인하율은 업체별로 평균 4.6~14.6% 수준이었다.
업체별로 가격을 내린 제품과 인하 폭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맞춰 같은 날 가격 인하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식품기업으로서는 원가 상승 때는 가격 인상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받는데 원재료 가격이 내려가면 판매가격 인하에 동참해야 한다는 기대도 동시에 받는 셈이다.
농심은 올해 8월에도 용기면과 스낵 가격을 올리면서 전체 라면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봉지라면 전 품목의 가격은 동결했다. 원가 부담과 소비자 반응을 함께 고려해 가격을 선별적으로 조정한 것이다.
식품기업의 가격 결정에는 시장 상황과 소비자 부담, 정부 정책 등 여러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다. 특히 소수 업체가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는 품목에서는 시장 선두 기업의 가격 결정이 후발 업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먼저 가격을 올리면 경쟁사에 소비자를 빼앗길 수 있고 경쟁사의 가격 인상 이후에도 기존 가격을 유지하면 원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업체들이 사전에 협의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이유다.
| ▲ 공정거래위원회는 2012년 농심과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 등 라면 제조업체 4곳에 가격 담합을 이유로 모두 1354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약 4년이 지나 처분이 모두 취소됐다. 사진은 세종시 공정거래위원회 청사. <연합뉴스> |
라면업계에서는 이러한 가격 추종과 담합의 경계가 실제 법적 분쟁으로 이어진 전례도 있다.
공정위는 2012년 농심과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 등 라면 제조업체 4곳에 가격 담합을 이유로 모두 1354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5년 12월 농심에 대한 처분을 인정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시장 선두 업체의 가격 인상을 경쟁사들이 따라가는 것은 합의 없이도 나타날 수 있는 합리적 경영 판단이라는 점 등을 고려했다.
오뚜기와 한국야쿠르트도 이후 같은 취지의 대법원 판단을 받았으며 공정위는 2016년 관련 처분을 직권취소했다.
당시 라면업계는 공정위의 담합 제재 이후 소송을 거쳐 처분이 취소되기까지 약 4년이 걸렸다. 업계가 조사 결과에 대한 다툼이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배경이다.
다만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는 시선도 나온다.
2021년 12월 시행된 개정 공정거래법은 가격과 생산량 등 경쟁에 민감한 정보를 주고받아 시장 경쟁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행위를 별도로 규제하도록 했다. 일정한 요건에서 정보교환과 가격의 외형상 일치가 확인되면 합의를 추정할 수 있도록 한 규정도 마련됐다.
공정위는 올해 1월 4대 시중은행이 부동산 담보인정비율(LTV) 관련 정보를 교환한 행위를 부당한 공동행위로 판단하고 모두 272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기업들이 경쟁사의 공개된 가격을 참고하는 것과 경쟁을 제한하는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것은 법적으로 다른 문제인 셈이다.
물론 식품업계가 반복된 담합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은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올해 설탕과 밀가루, 전분·전분당 시장에서는 업체들이 가격 인상과 인하 시기 등을 협의한 담합이 잇따라 적발됐다. 실제로 업체 사이 합의가 확인된 행위에는 엄정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다만 식품기업들이 제기하는 어려움은 이러한 담합 제재 자체보다 정상적 가격 결정까지 의심받을 수 있다는 부담과 조사 이후 장기간 이어질 수 있는 법적 분쟁에 있다.
이번 라면 담합 조사에서도 가격 변동의 시기와 폭뿐 아니라 업체들이 실제로 가격을 합의하거나 경쟁을 제한하는 정보를 교환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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