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적립금이 554조 원에 육박한 가운데 기금형 도입이 기존 자금의 이동과 금융회사 사이 경쟁구도 재편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금융권도 세부 제도 설계 방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 ▲ 퇴직연금 적립금이 554조 원에 육박한 가운데 금융권은 자금 이동과 경쟁구도 재편 가능성을 주시하며 세부 제도안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당초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 주관으로 이날 열릴 예정이었던 퇴직연금사업자 최고경영자(CEO) 간담회는 추석 이후로 미뤄졌다.
간담회는 애초 2일 열릴 예정이었다가 15일로 한 차례 연기된 데 이어 다시 일정이 변경됐다.
정부는 간담회에서 은행과 증권, 보험사 등 주요 퇴직연금사업자에 기금형 퇴직연금의 구체적 제도 설계 방향을 설명하고 금융권의 의견을 수렴한 뒤 이를 바탕으로 제도안을 구체화할 계획이었다.
금융권과 본격 논의를 시작하는 일정이 거듭 미뤄지면서 당초 정부가 제시했던 제도 개편 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정부는 3월 퇴직연금 제도 개편 후속조치를 내놓으면서 7월까지 세부 제도 설계를 마무리하고 2026년 안에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회사와 근로자가 은행·증권·보험사 등 퇴직연금사업자와 직접 계약을 맺는 현재의 계약형과 달리 별도 수탁법인이 적립금을 모아 운용하는 방식이다.
계약형에서는 개별 금융회사가 퇴직연금 상품 제공과 적립금 관리에서 중심 역할을 하지만 기금형에서는 수탁법인이 운용방침을 정하고 금융회사 등에 자산운용을 맡기는 구조로 금융회사의 역할이 달라진다.
정부는 기존 계약형을 유지하면서 기금형을 추가해 가입자의 선택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정부가 공개한 제도 개편 방향에서는 확정기여(DC)형에 기금형을 도입하는 방안이 중심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기금형 도입이 현실화하면 금융권의 퇴직연금 경쟁구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올해 2분기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약 553조9천억 원에 이른다. 확정급여(DB)형이 약 224조2천억 원, DC가 약 163조3천억 원, 개인형퇴직연금(IRP)이 약 166조4천억 원이다.
전체 554조 원가량이 기금형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 제도 논의대로라면 직접적으로 경쟁구도 변화가 예상되는 곳은 우선 163조 원 규모의 DC형 시장이다.
기금형을 선택하는 기업과 가입자가 늘어날수록 기존 계약형에 쌓인 적립금 일부가 기금으로 이동하면서 금융회사별 점유율과 운용 업무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
금융회사로서는 기존 퇴직연금 고객과 적립금을 지키는 동시에 새롭게 형성될 기금형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필요성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금형에서는 기존에 확보한 적립금 규모뿐 아니라 외부위탁운용관리(OCIO)와 자산운용, 자산 보관·관리 등의 역량도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의 기업 고객 기반에 증권사의 OCIO 경험과 자산운용사의 장기 자산배분 능력까지 더해지면서 금융그룹 전체의 경쟁력이 퇴직연금 사업의 새로운 경쟁요소로 떠오를 수 있는 셈이다.
금융회사별 셈법도 엇갈릴 수 있다.
기존 퇴직연금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한 사업자는 고객과 적립금을 지키면서 기금형에서도 주도권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반대로 후발 사업자에게는 기금형 도입이 기존 사업자 중심의 시장 구도를 흔들고 점유율을 확대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에 금융사 사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금융지주들은 은행과 증권, 자산운용 계열사의 역량을 결합해 기금형 시장에 대비하고 있다.
NH농협금융지주가 대표적이다.
농협금융은 지주 차원의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고 은행·증권·자산운용 계열사를 아우르는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7월에는 프랑스 자산운용사 아문디와 글로벌 연금운용 모델 구축과 수탁역량 제고 방안도 논의했다.
다만 제도의 세부 규칙이 확정되지 않은 만큼 금융사들이 구체적 사업전략을 짜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 ▲ 정부가 추진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작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
특히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과 국민연금의 참여 범위는 민간 금융회사가 확보할 수 있는 운용시장의 규모와 경쟁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로 꼽힌다.
수탁법인이 같은 금융그룹의 자산운용사에 운용을 맡기거나 계열사 금융상품을 활용할 수 있는 범위도 쟁점이다. 허용 범위에 따라 금융지주가 계열사 간 시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달라지는 데다 이해상충을 막기 위한 규제 수준도 함께 정해져야 한다.
세부 제도 설계와 금융권 의견수렴이 계획보다 늦어지면서 연내 법 개정을 위한 시간도 빠듯해지고 있다.
10월 국정감사 등을 고려하면 정부가 목표로 한 2026년 안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까지 남은 일정도 촉박한 상황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정부의 구체적 제도안이 나와야 금융지주도 이에 맞춘 대응 전략을 마련할 수 있다”며 “아직 제도 논의 초기 단계인 만큼 현재는 관련 내용을 모니터링하면서 대응 방향과 역할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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