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 이날 코스피 하락폭을 나타내는 화살표가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한때 한국 증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듯했다.
정부는 ‘코스피 1만 시대’를 이야기했고, 밸류업 프로그램을 내세우며 자본시장 선진화를 약속했다. 수많은 개인투자자는 한국 증시가 이제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시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증시는 외부 충격에 급격히 흔들렸고, 많은 투자자는 또다시 큰 손실을 떠안았다.
온라인에는 분노와 허탈감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공매도를 탓하고, 외국인을 탓하고, 미국 금리를 탓한다.
금융당국도 매번 비슷한 처방을 내놓는다. 세제를 손보고, 공매도를 조율하고, 유동성을 공급하며, 또 다른 단기 부양책을 발표한다.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왜 한국 증시는 외부 충격이 올 때마다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는가?
나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한국 자본시장이 단기 '가격'은 관리하려 했지만, 장기 '신뢰'는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은 단순한 돈의 거래소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정보가 거래되는 정밀한 시장이다.
투자자는 기업의 지나간 과거 실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창출할 미래의 현금흐름과 자본배분 능력을 산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투자자는 기업이 투명하게 공개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위험과 가치를 평가한다.
따라서 자본시장의 가장 핵심적인 인프라는 도로나 건물이 아니라 ‘정보’다.
정보가 충분하면 시장은 기업의 진짜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한다. 정보가 부족하면 시장은 가장 보수적인 잣대를 대고 가장 가혹한 가격을 붙인다.
신뢰는 정보에서 나오고 정당한 가격은 그 신뢰에서 나온다.
그런데 한국 금융당국은 지난 수년 동안 이 가장 중요한 원칙을 거꾸로 이해한 것 같다.
투자자가 기업의 미래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 인프라 구축은 끊임없이 뒤로 미뤘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등 글로벌 표준에 부합하는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는 이미 문재인 정부 시절 제시되었지만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얼마 전에야 공시 로드맵이 발표되었고 기업이 기후위기 및 산업 전환 속에서 어떻게 체질을 바꾸고 자본을 배치할지 보여주는 '전환계획(Transition Plan) 공시'는 제대로 정립하지도 못하고 있다.
단순히 탄소배출량 수치를 내놓는 것을 넘어, 중장기 배당 정책 및 자사주 소각 로드맵, 자본효율성(ROE·ROIC) 목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R&D 및 설비투자(CapEx) 계획, 이사회의 독립적인 자본배분 결정 과정과 같은 핵심 정보는 여전히 불투명하거나 아예 공개되지 않아 투자자가 객관적으로 비교·검증하기 어렵다.
세계 자본시장이 기업의 미래 위험과 기회를 정량적이고 체계적으로 공개하도록 제도화하는 동안 한국 금융당국은 기업 부담을 핑계로 필수적인 자본시장 인프라를 만드는 데는 극히 소홀했다.
| ▲ 29일 이억원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긴급 시장점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반면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이벤트성 정책은 끊임없이 쏟아냈다.
세제 개편, 공매도 제도 손질, 각종 증시 안정 기금 투입이 반복됐다. 심지어 기초체력 강화나 투명성 확보는 외면한 채, 투기성 자금을 끌어들여 시장 덩치만 키우려는 '고위험 레버리지 ETF' 허용 및 상품 다양화에만 열을 올렸다.
기업의 미래 위험을 정밀하게 평가할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으면서, 투자자들에게 2배, 3배의 위험을 짊어지고 시장에 뛰어들라고 부추긴 꼴이다.
심지어 밸류업 프로그램조차 기업의 중장기 배당·투자 플랜이나 기후 전환계획 같은 핵심적인 미래 자본배분 정보가 빠진 채 추진되면서 알맹이 없는 단기 주가 부양책에 머문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정책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즉, 정교한 시장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눈앞의 주가만 띄우려 한 것이다.
도로를 놓지 않은 채 자동차 판매부터 늘리려는 정책이 성공할 수 없듯, 정보 인프라 없이 증시를 부양하겠다는 정책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시장은 정책 구호가 아니라 정보의 질과 투명성으로 움직인다.
금융당국이 가장 큰 착오는 ESG 및 지속가능성 공시를 단순한 '기업 규제'로 본 점이다.
그런데 사실 지속가능성 공시는 규제가 아니다. 글로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자본시장의 공공 인프라다.
재무제표를 작성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을 기업 규제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지속가능성 및 자본배분 공시 역시 투자자가 기업의 미래 위험을 평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다.
오늘날 국민연금을 비롯한 글로벌 연기금과 거대 자산운용사(Universal Owner)들은 올해 영업이익만 보지 않는다.
명확하고 예측 가능한 배당 및 자사주 매입·소각 계획, 탄소가격 상승이 재무에 미칠 영향, 공급망 규제 대응력, AI 전환 투자 및 핵심 인재 확보 전략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이러한 정보가 없으면 투자자는 기업의 미래를 평가할 수 없고, 평가할 수 없는 기업과 시장에 돈을 계속 쏟아붓는 투자자는 없다. 오히려 투자한 자금을 회수한다.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George A. Akerlof)는 정보비대칭이 심한 시장에서는 우량 상품조차 제값을 받지 못하는 '레몬 시장'으로 전락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자본시장도 다르지 않다. 좋은 기업과 나쁜 기업을 구분할 정밀한 정보가 부족하면 투자자는 모든 한국 기업에 거대한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결국 우량기업까지 도매급으로 저평가받는다.
이것이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본질이다.
소극적인 공시 정책으로 일관하는 것은 기업을 보호하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 자본의 유입을 스스로 막고 한국 기업을 국제 자본시장에서 고립시키는 '자해 행위'일 뿐이다.
정부가 정보 대신 구호만 내놓는 사이, 시장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이제라도 정책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1. 최근 발표된 '지속가능성 공시 로드맵'을 글로벌 기준과 글로벌 자본시장의 눈높이에 맞게 전면 재검토·강화해야 한다.
금융당국이 내놓은 로드맵처럼 2028년에야 대형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하거나 핵심 지표(Scope 3 등) 공시를 대폭 유예하는 방식으로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불확실성을 해소할 수 없다. 자본시장법상 법정 공시 체계를 즉시 입법화하고, 의무 적용 대상과 범위를 글로벌 표준 수준으로 최대한 빨리 대폭 확대하여야 한다.
2. 명확한 자본배분 및 주주환원 플랜 공시를 의무화해야 한다.
기업이 벌어들인 현금을 쌓아두기만 하는지, 기후전환과 신사업 투자(CapEx)에 얼마나 배분하고, 배당 및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주환원에 어떤 기준과 로드맵을 갖고 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3. 단순 배출량 공개를 넘어 '실질적 전환계획(Transition Plan)'을 요구해야 한다.
고탄소 제조업 중심의 한국 기업들이 저탄소 경제로 이행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과 자본을 투입할 것인지 시장에 증명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전환금융(Transition Finance)이 비로소 활성화될 수 있다.
4. 이사회의 책임성과 거버넌스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사회가 대주주가 아닌 전체 주주의 이익과 장기적 기업가치를 위해 자본배분 결정을 내리고 있는지,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을 다하고 있는지 검증할 수 있는 공시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5. 독립적인 검증체계와 금융기관 공시를 강화해야 한다.
공시의 신뢰성을 담보할 외부 검증체계를 구축하고, 금융기관 역시 포트폴리오의 전환위험과 장기 자본배분 전략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주가는 정부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투자자가 기업의 미래를 믿고 자금을 맡길 수 있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자본시장 선진화는 주가지수를 높이는 이벤트가 아니라, 정보비대칭을 줄이는 인프라 구축에서 시작된다.
한국 증시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려면 금융당국은 더 이상 눈속임용 부양책 경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소극적인 시범 운영표나 껍데기뿐인 밸류업 프로그램이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자본시장 정보 인프라다.
증시는 돈으로 일시적으로 떠받칠 수는 있어도, 신뢰 없이는 결코 지속 성장할 수 없다. 한국 자본시장이 다시 일어서려면 금융당국은 '주가를 올리는 정부'에서 '신뢰를 만드는 정부'로 먼저 바뀌어야 한다.
금융당국의 각성을 촉구한다. 양춘승/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