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희헌 기자 gypsies87@businesspost.co.kr2025-12-18 14: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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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범석 쿠팡Inc(쿠팡 모회사) 이사회 의장 겸 CEO가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보이는 태도가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범석 쿠팡Inc(쿠팡 모회사) 이사회 의장 겸 최고경영자(CEO)의 ‘미국식 대응’이 쿠팡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적 책임 소재와 같은 논리적 대응에 집중하느라 정작 한국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너 경영인의 진정성’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18일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보면 잠잠해지듯 했던 ‘쿠팡 탈퇴(탈팡)’나 ‘쿠팡 이외의 다른 플랫폼으로 갈아타기(갈팡)’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기폭제는 1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이하 과방위)에서 열린 ‘쿠팡 침해사고 관련 청문회’. 과방위는 애초부터 쿠팡 창업자인 김범석 의장을 증인으로 불렀다. 하지만 ‘글로벌 CEO 일정이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출석하면서 미국인인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대표가 대신 참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했다.
로저스 대표가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하는 데다 내놓은 답변도 대부분 원론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점에서 쿠팡이 한국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 아니냐는 부정적 여론이 청문회 이후 부쩍 늘었다.
들끓는 여론은 맘카페만 봐도 확인된다.
누리꾼들은 맘카페에서 “쿠팡 청문회 최악이다. 책임회피가 대박이다. 말 돌리기 전략을 짜오다니. 돈은 한국에서 벌고 뻔뻔하기 그지없다”, “쿠팡이 한국을 진짜 무시한다. 청문회에서 답도 제대로 안하고 대표가 어디 있는지 말도 안 하니 해지가 답인 것 같다” 등의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 사고 초기만 하더라도 맘카페 여론은 “괘씸하지만 쿠팡 이외의 대안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였는데 이런 분위기가 180도 바뀐 양상이다.
SNS에서도 쿠팡의 대응을 강도 높게 질타하는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다.
한 누리꾼은 “쿠팡은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업한다면 당연히 알아야 할 지점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한다고 느껴지는 태도’가 느껴지면 한국 사람들은 분노를 폭발시킨다”고 꼬집었다.
다른 누리꾼들도 “최종 책임자가 등장해 고개를 숙이고 잘못했다고 하면 끝날 일을 쿠팡이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한국시장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자존심 건드리는 것이다. SK텔레콤처럼 대응 흐지부지해도 납작 엎드리면 지나가는 곳이 한국시장이다. 노재팬 사태에서 보듯 괜히 자존심 잘못 건드리면 타격이 만만찮을 듯하다”고 지적했다.
쿠팡에 매출 상당부분을 의존했던 자영업자들도 하나둘씩 쿠팡에서 발을 빼고 있다.
한 판매자가 “한국말 못한다고 답변 회피하는 외국인 대표 보니 화가 뻗친다. 이 시간부터 판매를 중지하려 한다. 온라인 판매 100%인 회사라 타격이 크겠지만 못 봐주겠다”며 올린 글에 여러 판매자들이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보낼 정도다.
사실 김 의장이 청문회에 직접 나서지 않고 한국 법인 대표들을 출석하도록 하는 행동과 말에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당성만 따지면 김 의장의 발언에 더 힘이 실린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쿠팡은 모회사인 미국 법인 쿠팡Inc와 한국 법인으로 나뉘어 운영되고 있다. 한국 법인에서 발생한 사고인 만큼 한국 법인 수장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책임자가 있는데 총수가 등장해 일을 해결하려는 행동은 오히려 주식회사에 ‘월권’ 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실제로 쿠팡 이외의 다른 글로벌 기업이 한국에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해당 기업의 한국 법인 대표가 국회에 나와 경위를 설명하거나 향후 수습 대책을 밝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타트업 업계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네이버나 카카오처럼 창업자가 나서서 머리를 조아려달라고 얘기하는 것이 100% 이해되진 않는다”며 “창업자보고 나오라고 하는 것보다 얼굴 안 내밀어도 좋으니 제대로 보상하라고 압박하는 게 더 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 역시 “미국에 상장한 회사는 발언 하나하나가 법적 분쟁에 휘말릴 소지까지 감안해 매우 조심스럽게 입장을 밝힌다”며 “쿠팡으로서도 이런 시장의 분위기에 맞춰 주주들에게 가장 이득이 될 발언을 하고 있는 셈인데 과하게 비난받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생각이 달라 보인다는 점이 문제다.
소비자들은 전체 매출의 90% 이상이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쿠팡 창업자가 ‘나는 글로벌 담당’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 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소비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이 요구하는 대로 쿠팡이 따라야 하는가를 놓고만 보자면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없다”며 “다만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한국 정서를 따라야 하는 것이 합당한데 이와 관련해 쿠팡이 (한국 정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사고를 냈을 때 창업자나 총수가 직접 사과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로 자리를 잡았다는 점도 이런 의견에 힘을 싣는다.
SK텔레콤 유심 해킹사태 때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등장해 머리를 숙이고 공식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역시 2020년 발생했던 LG화학 공장 화재 사고 당시 현장을 긴급 방문해 직접 사과했다.
쿠팡과 같은 유통업계만 봐도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3년여 전인 2022년 9월 발생한 대전 현대아울렛 화재사고 당시 직원들의 보고를 받기 전에 이미 대전으로 내려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며 국민 앞에 사과했다.
반면 논리적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나누는 방식으로 대응하다가 화를 키운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 사례는 2014년 12월 발생한 이른바 ‘땅콩 회항 사태’로 전 국민적 화를 돋웠던 대한항공의 조현아 전 부사장이다.
대한항공은 당시 “항공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승무원을 하기시킨 점은 지나친 행동이었다”는 입장자료를 냈다. 하지만 대중들은 항공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권한이 없는 사림이 항공기를 회항시킨 것이 본질인데 교묘한 말장난을 한다며 대한항공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결국 이는 대한항공을 향한 불매운동으로 번졌고 조현아 전 부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야 가까스로 수습됐다.
▲ 쿠팡 이전에도 사과보다는 논리적 대응으로 맞섰던 기업들은 결국 역풍을 맞았다.
3년 반 전에 있었던 스타벅스의 서머 캐리백 발암물질 검출 사태도 대응이 미흡했다는 점이 똑같다.
당시 스타벅스를 이끌던 수장은 캐나다 국적이었던 송호섭 전 대표였는데 그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나 보상 방안으로 무료 음료 쿠폰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스타벅스가 책임을 회피하는 발언을 꺼낸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번지면서 결국 스타벅스의 충성고객이 강하게 반발하는 지경까지 번졌다.
결국 스타벅스는 이후 소비자 공지를 통해 “‘고객분들이 단 한순간이라도 스타벅스와 관련된 불편과 불안감을 느꼈다면 그 어떤 경우라도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지금 저희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확신한다”며 “스타벅스를 사랑해 주신 수많은 고객분들에게 큰 우려와 실망을 끼쳐 드린 점,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자세를 낮췄다.
당시에도 스타벅스가 사태 초기부터 사과했으면 끝났을 일을 ‘법적 책임이 없다’며 발뺌하는 탓에 소비자 반발을 자초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신세계그룹은 이후 인사를 통해 당시 사고 대처에 미흡함을 보였던 송호섭 대표를 경질하며 사태를 수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