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 달리오는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Bridgewater Associates)의 창업자이자 전설적인 투자자다. 1975년 설립된 브리지워터는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브리지워터는 홈페이지에서 “우리는 최고 수준의 글로벌 기관 투자자들에게 독특한 통찰력과 파트너십을 제공하는 데 주력하는 최고의 자산관리 회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현재 니르 바 데아(Nir Bar Dea)가 브리지워터의 CEO를 맡고 있다. <브리지워터> |
[비즈니스포스트] “저는 ‘정말 오만한 녀석(What an arrogant jerk)’이었습니다. 너무 오만했습니다.”
레이 달리오(Ray Dalio·76).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Bridgewater Associates, 이하 브리지워터)의 창업자인 그는 TED 무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한때 그는 세상의 흐름을 모두 꿰뚫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1980년대 초 미국 경제 위기를 예언했지만, 그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직원들은 모두 내보내야 했다. 생활비조차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어야 했다. 남은 건, 오만의 상처뿐이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틀릴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은 레이 달리오의 경영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 역시 언제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질문 앞에서 성장한다. 달리오가 그랬듯.
달리오의 그런 질문은 ‘아이디어 성과주의(Idea Meritocracy)’라는 독창적인 경영 철학이자,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브리지워터에서는 직급과 경력 대신 ‘아이디어의 질’이 모든 판단 기준이 된다. CEO의 독단이 아닌, ‘전 직원이 동의한 원칙’이 조직을 움직인다. 달리오는 회사 문화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조직에서는 누구든 CEO에게 ‘당신 생각은 10점 만점에 3점입니다’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오의 TED 무대도 특별했다. 성공 사례만 늘어놓는 다른 연사들과 달리, 그는 숨기고 싶었던 실패 경험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TED의 슬로건이 ‘퍼뜨릴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Ideas Worth Spreading)’라면, 달리오는 실패의 가치를 세상에 퍼뜨린 셈이다.
필자는 영감이 필요할 때면 TED 강연을 자주 찾아본다. 단순 지식 전달을 넘어 폭넓은 지혜와 깊은 성찰을 느낄 수 있어서다. 이쯤에서 되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원칙을 갖고 있습니까?”
리더라면 원칙이 더욱 분명해야 한다. 조직문화의 방향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레이 달리오는 원칙에 있어 꼭짓점에 선 리더다.
비즈니스를 항해에 비유하면, 달리오에게는 독특한 나침반이 하나 있었다. 바람이 바뀌고 파도가 높아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 그 나침반의 이름은 ‘원칙(Principles)’이었다.
▲ 레이 달리오는 여덟 살 때 신문 배달을, 열두 살 때는 캐디로 일하던 골프장에서 사람들이 주식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주식시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재무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월스트리트 증권업계에서 상품거래로 경력을 쌓았다. 그런 달리오의 인생은 고통(Pain)+성찰(Reflection)=성장(Progress)이라는 공식으로 축약된다. < TED > |
1975년, 뉴욕의 작은 단칸방에서 브리지워터가 시작됐다. 40여 년 만에 이 회사는 세계 최대 헤지펀드로 성장했다. 냉철한 투자자로 정평이 난 달리오는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단순한 투자자를 넘어 월스트리트의 권위와 고정관념을 깨고 ‘원칙’이라는 체계로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한 사상가였다. 동명의 저서 ‘원칙(Principles)’은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롱아일랜드 출신의 평범한 아이였던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원칙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체계적 의사결정 시스템이다.”(‘원칙’, 한빛비즈, 고영태 옮김)
성공은 특별한 재능 때문이 아니라는 자평이다. 그는 원래 대중의 주목을 꺼렸지만, 2008~2009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하면서 그의 시스템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최근 다시 한번 달리오의 발언에 주목했다. 지난 4월 NBC 방송에서 그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트럼프가 마구 휘두르는 관세는 마치 글로벌 경제라는 기계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과 같다.”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을 외쳤지만, 투자계의 거물은 ‘위험한 미국’을 경고했다.
글로벌 공급망은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상호 신뢰와 안정성이라는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구조다. 그 흐름 속에 돌멩이가 들어가면 시스템은 쉽게 병목(bottleneck)에 빠진다.
이는 ‘제약이론(Theory of Constraints, TOC)’과도 맞닿아 있다. 이스라엘 출신의 물리학자이자 경영사상가인 엘리 골드랫(Eliyahu Goldratt)은 “시스템의 성과는 가장 약한 고리, 즉 단 하나의 제약(병목)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필자의 눈에 트럼프의 관세는 그 병목처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경제의 예측 가능성마저 무너진다는 점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전략 수립과 투자가 마비되는 것이다.
▲ 신간 ‘빅 사이클’을 들고 있는 레이 달리오. 달리오의 대표 저서 ‘원칙(Principles)’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달리오는 현재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멘토로 활동하며, 세계 경제에 조언과 경고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브리지워터> |
달리오가 제약이론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리더십 철학은 명확하다. “리더는 시스템 설계자다.” 그래서 그의 리더십은 ‘시스템 리더십’으로 평가받는다.
달리오는 모든 직원들이 진실과 마주하고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 핵심 원칙이 ‘극단적 진실(Radical Truth)’과 ‘극단적 투명성(Radical Transparency)’이다.
이를 실현하는 도구가 ‘닷 컬렉터(Dot Collector, 점을 모은다는 의미)’이다. 이는 실시간 피드백으로 의사결정의 객관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다.
브리지워터 직원들은 아이패드에 닷 컬렉터 앱을 켜고 회의에 참석한다. 서로에게 1~10점 사이 점수를 실시간 매긴다.
“A씨는 용기 있게 진실을 말했다(8점).”
“B씨는 체계적 사고가 부족했다(4점).”
그들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한 신입 직원이 CEO 달리오에게 3점을 준 일도 있다. “지금 감정에 치우친 것 같다”는 이유였다.
모인 점수들은 개인의 강점, 약점, 성향을 시각화한다. 하나의 점(dot)은 미미하지만, 여러 점이 모이면 그 사람의 진면목과 조직 내 입지가 드러난다. 신뢰도 가중치도 붙는다.
이렇게 직관이 아닌, 데이터로 모은 집단지성이 브리지워터의 의사결정을 이끌었다. 인간의 편견이 아닌, 알고리즘이 기준이 된 것이다. 덕분에 시장 충격에도 흔들림 없는 대응과 지속적인 수익을 냈다. 모두 실패에서 건져 올린 결과다.
물론 달리오의 방식이 모두에게 이상적이지는 않다. 한 전직 직원은 “조직이 리더의 철학 교과서 속에 갇혀 있었다”며 “모든 걸 한 사람이 정한 규칙으로만 해석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꼬집었다. (비즈니스인사이더 인용)
외부 비판도 있다. ‘극단적 진실’과 ‘실시간 점수화’는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지만 직원들의 심리적 부담과 불신을 키울 수 있고, 조직 내 긴장과 분열을 초래할 위험도 있다는 우려다.
달리오 역시 “모든 기업이 우리 시스템을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인정했다. 그만큼 적용하기 쉽지 않은 까다로운 조직문화라는 얘기다. 필자는 그런 달리오의 문제 해결 방식 두 가지만 소개한다.
“가까이서 보면 모든 것이 더 커 보인다.”(Everything looks bigger up close.)
감정에 몰입하면 작은 문제도 크게 느껴진다. 이럴 때 달리오는 “한발 물러서라(Step back)”고 조언한다. 멀리서 보면 문제 크기와 본질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의식 지도(Map of Consciousness)’로 유명한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이론과 닮았다.
사람은 자신이 쓴 ‘의식의 안경’에 따라 현실을 다르게 본다. 즉, 의식 상태에 따라 같은 문제가 크게 또는 작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달리오가 말한 ‘한 걸음 물러남’은 곧 ‘안경을 벗는 일’이다. 그래야 전체가 보인다.
“드릴 다운 기법을 사용하라.”(Use the drill-down technique.)
드릴 다운(drill-down)은 크고 복잡한 문제를 가장 간단하고 관리하기 쉬운 요소로 세분화하는 걸 말한다. 쉽게 말하면 문제를 쪼개고 또 쪼개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문제를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하게 바꿀 수 있고, 근본 원인을 찾는 데도 효과적이다.
레이 달리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필자는 그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진실이라는 돛을 달고, 원칙이라는 나침반으로, 혼돈의 바다를 건넌 항해자.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