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교 박물관이 5월24일부터 10월12일까지 기획전시 '시멘트:모멘트'를 진행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비즈니스포스트] 팝업과 문화의 성지로 떠오른 지금에 와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성수동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줄지어 늘어선 레미콘 트럭이던 시절이 있었다.
1977년부터 2022년까지 약 45년 동안 운영된 삼표레미콘공장의 이야기다.
멀지도 않은 겨우 2년 전에도 레미콘을 나르는 트럭들이 드나들었다.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성수동 삼표레미콘공장은 하루 최대 7천㎥의 레미콘을 생산해 1년에는 최대 175만㎥을 공급하는 능력을 갖췄다.
건설업계에서는 보통 아파트 1채를 짓는데 소모되는 레미콘의 양을 60~200㎥로 산정하는데 이를 고려하면 하루에 아파트를 최대 120채 가까이 지을 수 있는 레미콘을 생산한 것이다.
서울 도심의 중요한 공사와 공장 반경 5km 이내 아파트 공사에 시멘트를 공급하며 명성이 자자했던 삼표레미콘공장은 유해 시설로 낙인찍혀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만 삼표레미콘공장이 사라진 성수동 연무장길에서는 오히려 시멘트가 문화의 상징으로 떠올라 과거 시멘트산업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18일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시멘트의 물성과 역사를 주제로 ‘시멘트 커넥트 투어’가 진행됐다.
▲ 겨울 산맥을 형상화해 시멘트와 레진으로 만들어진 예술작품의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이번 투어는 한양대 박물관에서 5월24일부터 10월12일까지 진행하는 기획 전시 ‘시멘트:모멘트’와 연계해 마련됐다.
본격적인 투어에 앞서 황나영 한양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 과장의 안내로 전시장을 둘러보며 대략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시멘트에 물과 자갈을 섞어 콘크리트를 만든 뒤 틀에 넣는 것만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지만 그만큼 빨리 굳는다는 시멘트의 물성과 현대인을 가장 많이 둘러싸고 있다는 시멘트의 상징성에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결합한 신진작가들의 예술 작품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 공간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시멘트의 역사를 알리는 교육적 내용들이 예술 작품들과 어우러지며 존재감으로 전시장을 꽉 채웠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이 전시장 한쪽에 자리 잡은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과 콘크리트 조각의 사진이었다.
▲ 황나영 한양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 과장이 문화재의 콘크리트 보수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일제가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하는 데 사용했던 콘크리트와 대한민국이 광복 이후 광화문을 복원하는 데 썼던 콘크리트 조각을 찍은 사진을 전시해 둔 것이다.
황 과장은 “당시 콘크리트는 최첨단 자재로 여겨졌으며 광화문 복원을 다룬 당시 뉴스에서는 현판 빼고 전부를 콘크리트로 제작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을 정도”라며 “지금은 문화재 복원에 시멘트를 쓰고 있지 않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과거 시멘트는 첨단자재이자 발전의 상징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사례가 새마을 운동이다.
박정희 정부는 마을 공동사업을 추진한다는 조건으로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시멘트를 무상으로 나눠줬다.
이를 받은 농민들은 틀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벽돌을 생산하고 도로를 시멘트로 포장하는 등 농촌 주거 환경 개선에 나섰다.
▲ 황나영 한양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 과장(오른쪽 첫 번째)이 18일 한양대학교 박물관에서 새마을운동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
이러한 시멘트의 역사성을 고려하면 서울 도심 개발, 강남 개발 등 대한민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도심 및 강남 접근성이 좋은 성수동에 삼표레미콘공장이 들어선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다.
문제는 2005년 뚝섬경마장이 있던 곳이 서울숲으로 개장하고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성수동 개발이 진행되며 시작됐다.
고급 주거지역이 들어서고 성수동의 상징이던 붉은 벽돌의 아파트형 공장들은 카페, 맛집 등 핫플레이스로 바뀌면서 개발의 상징이었던 삼표레미콘공장이 유해 시설로 전락한 것이다.
성수동 주민들은 2015년 ‘삼표레미콘공장 이전 추진 특별위원회’를 결성해 레미콘 공장 철거에 들어갔고 결국 공장은 2022년 철거됐다.
▲ 삼표레미콘공장 철거를 설명한 전시 내용의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삼표레미콘공장 부지에는 국제 설계 공모를 거쳐 최종 선정된 3개동, 56층 규모의 글로벌 업무 지구 ‘서울숲의 심장’이 들어선다. 사업비 4조 원이 투입돼 성수동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착공은 2025년이며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성수문화예술마당’으로서 공연과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운영된다.
전시 설명을 마친 뒤 이어진 투어에서는 수도박물관과 성수동 연무장길을 둘러보는 과정이 진행됐다.
버스로 수도박물관으로 이동하다가 지금은 성수문화예술마당으로 조성된 삼표레미콘공장 부지를 잠시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공장이 있었다는 흔적이 전혀 없는 그곳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녹지에 거꾸로 지은 집을 지은 모티브로 꾸며진 팝업스토어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투어의 첫 번째 단계로 방문한 수도박물관은 이제는 운영을 멈춘 서울 최초의 상수도 정수시설 뚝도정수장을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다.
뚝도정수장은 수질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고종 황제가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위크(H.R. Bostwick)에게 상수도 부설 경영 특허를 허가하면서 지은 정수장으로 1906년에 공사를 시작해 1908년에 준공됐다.
당시 이름은 경성수도양수공장이다. 처음 가동을 시작했을 때는 서울 전체 하루 급수량의 32%인 1만2500㎡의 물을 정수했다.
▲ 수도박물관 완속 여과지의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본관을 나오면 왼편에 완속 여과지 시설이 위치했다. 뚝도정수장의 완속 여과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그 자체가 하나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유적지다.
완속 여과는 자갈과 모래층에 물을 천천히 통과시켜 정수하는 방식을 뜻한다. 모래층을 통해 물을 탁하게 만드는 물질이나 세균 등이 걸러지고 모래층 표면 미생물 때문에 불순물이 분해돼 약품처리가 필요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수도박물관 투어에서는 성수동의 과거인 뚝섬 나루터의 생활상을 잠시나마 직접 체험하는 기회도 마련됐다.
잠시 한강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는 동안 뚝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음식인 국말이떡을 하나 받은 것이다. 흰 팥을 찹쌀떡 양쪽에 두껍게 붙여 만든 특이한 모양을 한 국말이떡은 뚝섬이 나루터로서 기능하던 시절의 흔적이다.
나루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해장국 등 국류에 밥 대신 국말이떡을 4~5개 정도 말아 먹었다. 국말이떡은 찹쌀로 만들어 밥보다 배가 부르고 탈이 나는 일도 적었다고 한다. 뚝섬에서는 국을 공짜로 제공하는 대신 국말이떡에만 돈을 받았다는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수도박물관 방문을 마친 뒤로는 성수동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연무장길로 이동했다.
▲ 콘크리트 뼈대만 남아있는 탬버린즈 성수 플래그십스토어의 모습. <비즈니스포스트> |
붉은 벽돌과 팝업스토어의 조화가 인상적인 연무장 길을 걷다 보면 인스타 성지로 유명한 콘셉트 스토어 ‘디올 성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맞은 편에서 휘황찬란한 디올 성수와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주는 건물 하나가 있어 이목을 끌었다.
얼핏 보면 짓다 만 건물에서 허가받지 않은 영업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그 건물은 바로 젠틀몬스터, 누데이크 등으로 유명한 아이아이컴바인드에서 선보인 화장품·향수 브랜드 탬버린즈(TAMBURINS)의 성수 플래그십스토어다.
금속과 유리로 구성돼 화려함을 자랑하는 디올 성수와 멀쩡한 건물을 부수다 말고 콘크리트 뼈대만 남긴듯한 탬버린즈의 플래그십스토어가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뒤 성수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멘트 커넥트 투어는 마무리됐다. 성수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이번 투어는 5월24일부터 7월26일까지 8회 진행된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