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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마침내 호랑이를 잡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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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 국가주석 |
중국 공산당이 공안 및 사법총책이었던 저우유캉 전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부정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상무위원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중국 공산당의 원칙도 깼다. 시진핑 주석은 덩샤오핑 이후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장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관영매체인 신화통신과 CCTV 등 주요 언론은 29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저우융캉을 엄중한 기율위반 문제로 관련 사건을 정식접수해 심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저우융캉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와 사법처리 얘기는 끊임없이 나왔지만 중국매체가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를 공식적으로 보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산당의 뇌물척결 감시기관인 기율검사중앙위원회는 이날 웹사이트를 통해 당 기율을 심각하게 위반한 혐의로 저우융캉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이상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저우융캉은 후진타오 전 주석 시절인 2007년 10월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뒤 중국의 공안 사법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당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를 맡아 권력을 휘둘렀다. 저우융캉은 한 때 중국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
저우융캉에 대한 조사는 지난해 부정부패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와 결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저우융캉은 보시라이에 대한 사법처리를 반대했다.
저우융캉은 일단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저우유캉은 중국 공산당 권력에 진입하기 전에 석유부문에서 활동해 ‘석유황제’라고 불렸다. 저우유캉 일가의 재산은 최대 140억달러에 이른다는 외신보도도 나왔다.
저우융캉은 시진핑 주석이 권력을 잡는 데 강하게 반대했던 인물로 꼽혔다. 2012년 9월과 11월 시진핑 주석이 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에 오르는 데 가장 분명하게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시진핑, 황제에 버금가다
시진핑 주석은 “부패에 관한 한 호랑이와 파리까지 모두 잡겠다”고 선언했는데 부정부패 척결을 앞세워 저우융캉 제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해 전 충칭시 서기인 보시라이에 이어 저우융캉을 조사함으로써 부정부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거듭 보여줬다. 시진핑 주석은 “부패를 척결하지 못하면 공산당의 집권도 위협받는다”고 강조해왔다.
저우유캉에 대한 조사는 1949년 중국 공산당 집권 이래 최초의 상무위원에 대한 조사다. 공산당 내부에서 저우융캉을 처벌하면 ‘상무위원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깨진다며 반발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은 이런 반발로 넘어섰다. 스티브 창 영국 노팅엄대 교수는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시 주석이 덩샤오핑 이후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중국 외교가에서 시진핑 주석을 ‘황제’라고 부른다. 시진핑 주석은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 아니라 독보적인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분석이다.
◆ 사법의 차르, 석유황제라 불리던 저우융캉
저우융캉 전 중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 정법위원회 서기는 '사법 공안의 차르'라고 불렸다.
저우융캉은 2012년 11월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등과 함께 현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시 중국 최고 권력집단인 9인의 상무위원 가운데 서열상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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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
하지만 그는 정법위 서기로 권력기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법위는 공안, 검찰, 법원, 무장 경찰, 국가안전부 등을 총괄하는 무소불위의 자리다.
저우융캉은 1942년 12월 장쑤성 우시에서 태어났다. 1966년 베이징석유학원을 졸업한 뒤 석유분야에서 활동했다. 석유공업부 부부장, 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 사장, 국토자원부 부장 등을 역임하는 등 석유 관련 분야에서만 37년을 일해 ‘석유황제’라도 불렸다.
저우융캉은 장쩌민 전 주석의 후원을 받아 쓰촨성 당서기와 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공안부장 등을 잇달아 맡았다. 이 때문에 저우융캉은 장쩌민 전 주석의 범 상하이방으로 분류된다.
저우융캉은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 겸 정법위 서기를 맡는 과정에서 중국 태자당의 대부인 쩡칭훙 전 부주석의 추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저우융캉과 쩡칭흥은 2000년대 중국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한 '석유방'(석유인맥)으로 연결돼 있다.
석유방 출신들은 석유부문을 장악한 데다 국유기업 경영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권력 상층부에 진입했다.
저우융캉의 몰락은 2012년 2월 보시라이 전 충칭 당서기 사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저우융캉은 보시라이의 '후원자'로 손꼽혔다. 보시라이 사건 처리를 놓고 쿠데타 시도 소문까지 나도는 등 시진핑 국가주석과 맞선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