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 온타리오주 크로포드(Crawford) 호수의 모습. <위키미디어커먼즈> |
[비즈니스포스트] 인류 활동에 따른 흔적으로 지구의 지질시대까지 새로 정의되고 있다.
핵실험의 산물인 플루토늄 동위원소, 산업화로 내뿜어진 구상 탄소입자(SCP) 등 인류 활동의 증거를 고스란히 간직한 캐나다의 크로포드 호수 바닥은 이제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를 대표하게 된다.
11일(현지시각) 인류세실무단(AWG)은 독일 베를린 하르나크하우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류세의 국제표준층서구역(GSSP)로 캐나다 크로포드 호수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인류세실무단은 UN 산하 학술단체로 지질연대를 공인하는 국제지질과학연맹(IUGS)의 국제층서학위원회(ICS) 산하 조직이다.
인류세는 인류(Anthropos)와 지질시대를 구분하는 단위 가운데 하나인 ‘세(世, -cene)’를 합한 말이다. 1995년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2000년에 처음 제안했고 이후 학자들 사이에서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후속 작업이 진행됐다.
지질시대는 누대(累代), 대(代), 기(紀), 세(世), 절(節)로 구분된다. 현재는 ‘신생대 제4기 홀로세 메갈라야절’이이라고 불린다.
인류세 논의 초기에는 새로운 ‘세’로 볼지 홀로세를 유지한 채 새로운 ‘절’로 볼지 논의가 있었으나 2016년 학자들의 투표를 통해 ‘세’로 결정됐다.
홀로세가 마지막 빙하기 이후인 1만1700년 동안 이어져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의 지질 변화의 정도가 그만큼 크다는 점에 세계의 학자들이 동의한 셈이다. 홀로세 이전 플라이스토세 등 다른 ‘세’들은 시기가 수백만 년 혹은 수천만 년에 이를 정도로 길다.
박범순 카이스트(KAIST) 인류세연구센터 소장은 “과거 지질시대와 달리 최근 인간의 활동으로 행성이 너무 크게 바뀌어 새로운 지질시대가 제안된 것”이라며 “인간의 활동으로 바뀐 지구의 모습은 농경시대부터 찾을 수도 있겠으나 최근 들어 그 정도가 전례 없기 때문에 인류세로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지질시대를 정의하려면 그만큼의 지질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marker)와 시기를 비롯해 표지 및 시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국제표준층서구역이 결정돼야 한다.
인류세실무단은 인류세의 시기를 놓고는 인류의 핵무기 실험이 본격화된 1950년대로 보기로 했으며 중요한 표지로는 플루토늄 동위원소, 구상 탄소입자(SCP) 등을 꼽았다.
플루토늄 동위원소는 핵무기 실험으로, 구상 탄소입자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발전시설에서 생성되는 물질이다.
▲ 호주 플리너스 산맥에 설치된 '에디아카라기' 국제표준층서구역 표식. 국제표준층서구역 표식은 통상적으로 황금 못(Golden Spike)이라 불린다. < Wikimedia Commons > |
인류세의 국제표준층서구역에는 플루토늄 동위원소, 구상 탄소입자 등을 비롯해 지질시대 변화에 따른 흔적 등 지질기록이 잘 보존돼 있어야 한다.
국제표준층서구역에는 ‘황금 못(Golden Spike)’으로 불리는 표식이 설치되며 지역의 이름은 인류세 시작에 따른 새로운 ‘절’의 이름으로 쓰인다.
상징적 의미가 큰 만큼 새로운 국제표준층서구역의 선정에는 크로포드 호수를 비롯해 호주 플린더스 산호해, 발트해 고틀란드 분지, 일본 벳푸만, 중궁 쓰하이룽환 호수, 남극 팔머 빙핵 등 12곳이 경쟁했다.
크로포드 호수의 국제표준층서구역 선정에는 호수의 면적이 2.4ha(헥타르)에 불과하지만 깊이가 24m(미터)에 이르는 지형적 특징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 호수는 지형적 특징에 따른 영향으로 인간은 물론 퇴적물을 흩어지게 하는 벌레와 같은 동식물의 활동, 바람에 따른 물살 등 자연적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1천 년 동안 깔끔하게 바닥에 퇴적층이 형성돼 왔다.
호수 바닥의 퇴적층에는 원주민인 이로쿼이족의 옥수수 농사 흔적,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유럽인들의 벌목과 제재소 운영에 따른 흔적, 1930년대 북미지역 대규모 모래폭풍의 흔적 등은 물론 1950년대에 인류의 핵실험에 따른 플루토늄 동위원소 급증의 흔적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박 교수는 “이번 크로포드 호수의 국제표준층서구역 선정은 플루토늄 동위원소를 가장 중요한 표지로 보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구상 탄소입자는 산업활동에 따른 결과라 세계 각 지역마다 급증한 시기 등이 다르게 나오지만 플루토늄 동위원소 급증의 흔적은 지역 관계없이 1950~1960년대 사이로 조사된다”고 설명했다.
지층 내 플루토늄 동위원소의 급증은 세계 각국의 핵실험이 1950년대 급증했다가 1960년대 핵확산 금지조약(NPT) 체결의 영향으로 급격히 감소한 데 따른 영향이다.
박 교수는 “구상 탄소입자는 산업활동의 결과이니까 인류세와 잘 연결되는 표지지만 플루토늄 동위원소는 군사 활동의 결과라 통상적으로 인류세의 원인을 논의할 때 잘 다루지 않아 왔다”며 “지질학계에서도 인류세와 플루토늄 동위원소가 어울리지 않다는 점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고 이와 관련된 결과는 다음 단계 투표 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본세’라고 불러야 한다는 등 명칭에 따른 논란도 있다. 지질 환경의 변화가 인류 전체의 공통된 활동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수 자본가 등의 기업활동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날 발표된 크로포드 호수의 국제표준층서구역 선정은 국제층서위원회 등 투표를 거쳐 내년 8월 부산에서 열리는 제27차 세계지질과학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인류세와 크로포드 호수의 선정 등 새 지질시대 정의와 관련된 모든 절차가 진행돼 확정되면 인류는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포드절’을 살게 된다.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