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각각 60조 원이 훌쩍 넘는 예산을 쏟아부으며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섰다.
▲ 27일 오후 경기도 용인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용인 첨단 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 성공을 위한 제3차 범정부 추진지원단 회의 및 협약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한준 LH 사장, 이상일 용인시장,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 겸 대표이사 사장. <연합뉴스>
소재와 장비 분야 강자인 일본도 천문학적 투자를 벌이며 반도체 제조 강국으로 재도약을 꾀하고 있다.
강력한 미국의 견제에 시달리는 중국 역시 분주하다. 우리 돈 기준으로 약 187조 원을 쏟아붓겠다는 정책을 추진하며 '반도체 굴기(진흥)'의 꿈을 놓지 않고 있다.
이처럼 반도체 분야는 개별 기업 사이의 경쟁 차원을 넘어 국가별 역량이 총동원되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됐다.
우리 정부 역시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선 올해 반도체 투자에 대해 세액공제를 늘려 세금을 깎아주는 정책부터 마련했다. 또 경기 용인 남사읍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해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추진한다.
삼성전자가 이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에 2042년까지 300조 원을 투자해 세계적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 생산라인을 만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기 남부 화성, 평택, 용인, 이천에 걸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거대한 반도체 산업지대를 조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정부는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속도전을 벌이기로 했다.
국토교통부는 범정부 추진지원단을 꾸리고 산단 조성에 필요한 행정절차를 줄여서 착공 시점을 2026년으로 기존 계획보다 2년 앞당긴다는 방침을 최근 내놨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든 속도 이상으로 디테일이 중요하다.
반도체 산업은 물과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쓴다. 공업용수와 전력 확보 같은 인프라 계획이 단단하게 마련돼야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제대로 조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은 절대 만만치가 않다.
용인 원삼면에 120조 원을 들여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2019년 2월 내놓은 SK하이닉스의 사례만 봐도 그렇다. 공업용수 확보 문제에서 인근 여주시와 협의 과정에 홍역을 치르다가 올해 상반기에 겨우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이보다 더 큰 규모의 투자가 이뤄지는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라면 용수 확보 문제를 푸는 일이 훨씬 더 복잡해질 공산이 크다.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는 2042년 모든 반도체 시설이 들어서면 하루 65만 톤의 공업용수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를 연간 단위로 환산하면 팔당댐 저수량에 육박한다.
이에 정부는 팔당댐 외에도 강원도 화천댐을 신규로 이용하겠다는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용인과 평택의 하수를 이용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당연히 더 넓은 지역의 지자체 주민들과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정부의 조정 능력이 더 크게 발휘돼야 하는 대목이다.
전력은 더 어려운 문제다.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가 완성되면 하루 최대 7GW라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현재 수도권 전력 사정으로 볼 때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원전 5곳은 지어야 필요한 전력을 충당할 수 있다.
이에 정부는 용인 국가산업단지 인근에 발전소를 새로 짓기 위해 올해 안으로 전력 공급 로드맵을 내놓기로 했는데 실행까지는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SK하이닉스의 사례를 다시 살펴보자. SK하이닉스는 2019년 3월 반도체 공장 증설 뒤 전력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청주에 585MW 규모의 자체 LNG 발전소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주민 반발에 부딪혀 SK하이닉스는 이듬해 6월에야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고 2024년 5월 완공을 앞두고 현재까지도 지역사회와 여전히 갈등을 빚고 있다.
이보다 10배 이상 더 큰 규모의 새 발전소가 필요한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라면 문제가 얼마나 더 복잡해질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저런 난관을 뚫고 필요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엔 풍력이나 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가 필요하다.
삼성전자는 2050년까지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반도체 회사들이 내세운 2030년보다 목표 시점이 늦다.
더구나 삼성전자의 주요 고객사인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빅테크기업들이 요구하는 RE100 달성 목표 시점은 이보다 더 빠르다.
▲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제대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호남에 많은 해상풍력이나 태양광 발전을 통해 생산된 전기를 해저케이블을 통해 수도권으로 옮겨올 필요성이 제기된다. 해상풍력발전 시설의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난해 전체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삼성전자 한 곳에서 사용하는 전력량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다. 삼성전자 전력소비량 대비 재생에너지 비율이 20%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올해 초 10차 전력기본계획에서 2030년 신재생에너지 비중 목표치를 기존의 30.2%에서 21.6%로 낮춘 바 있다.
대신 전력수급 안정을 위해 원전의 비중을 빠르게 높이고 있다. 그러나 원전 에너지는 RE100에 포함되지 않는다.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제대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호남에 상대적으로 풍부한 풍력발전과 태양광발전 전력을 해저케이블 등을 통해 수도권으로 옮겨오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또 국가 전력기본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은 단순히 삼성전자 한 기업을 지원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산업 반도체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을 넘어 우리나라 경제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하지만 완공과 가동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다. 원모심려(遠謀深慮), 먼 앞날을 깊게 생각하는 범 국가적 지혜가 절실하다. 박창욱 산업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