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이 대세인 요즘 사양산업으로 여겨지는 석유기업에 투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투자의 대가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다.
이런 버핏 회장의 투자법은 전기차, 2차전지, 신재생에너지 등 친환경 산업의 성장하는 기업을 선호하는 우리네 일반 투자심리와는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럼 결과는 어떨까?
2022년 한 해 동안 미국 증시의 주요 지수들은 하락했다. 연초에서 연말까지 다우존스 지수는 10% 정도, 나스닥은 50% 정도 빠졌다. 같은 기간 버핏 회장이 투자했던 석유회사 쉐브론과 옥시덴탈페트롤리움은 지수가 하락하는 와중에 꽤나 높은 상승세를 보였다.
쉐브론은 50%, 옥시덴탈페트롤리움은 100% 정도 올랐다. 이른바 ‘서학개미’들이 주로 투자했던 인기 있는 기업들의 주가가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아주 선방한 셈이다.
버핏 회장은 “물이 빠지면 누가 발가벗고 수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이 넘쳐날 때 즉 시중에 유동성이 풍부하고 경기가 좋을 때는 기업의 내재가치보다는 기대감이 주가를 더 올리기도 하지만 유동성이 빠지고 불경기가 되면 기업의 본질적 가치에 따라 옥석이 가려진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요즘 같은 때가 물이 빠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주식시장이 얼어붙는 시기가 되자 버핏 회장이 옳았다는 게 입증되고 있다.
버핏 회장이 석유기업 주식을 사들인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2019년 옥시덴탈페트롤리움이 경쟁사를 인수할 때 우리 돈 12조 원 정도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2020년 코로나19가 터지고 석유 수요가 급감하며 석유기업 주가도 폭락했고 옥시덴탈페트롤리움의 경쟁사 인수는 어리석은 결정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덩달아 버핏 회장의 명성에도 금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됐다. 유가는 금새 회복된 뒤 오히려 고공행진을 하게 됐고 석유기업 영업 실적도 그에 따라 좋아졌다. 이번에도 버핏 회장이 옳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버핏 회장의 투자법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가치투자’라 할 수 있다. 유행에 민감한 성장주에 투자하기보다는 내재가치보다 저평가된 가치주에 투자해 장기적으로 큰 수익을 내곤 한다.
또 싼 주식을 산다는 투자원칙도 잘 알려져 있다. 단순히 가격이 싼 게 다가 아니라 내재가치보다 많이 싼 주식을 사는 것이다. 물론 현금 창출 능력이 있는 우량한 기업이라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래서 좋은 회사가 돌발 악재를 만나 주가가 떨어지는 상황은 버핏 회장에게는 오히려 매수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남들과는 다소 다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버핏 회장의 투자 원칙 가운데 ‘잃지 않는다’라는 것도 있다.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이익 훼손 위험이 적고 경쟁 강도는 낮은 독과점 성격의 산업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다.
물론 일각에서는 버핏 회장이 2016년 애플 주식을 대거 매수하면서 오래 고수했던 투자 원칙을 깼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이 역시 버핏 회장의 원칙이 바뀐 게 아니라 애플의 기업 성격이 바뀐 것이란 의견이 많다.
애플을 IT 성장주가 아닌 소비재 가치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럼 석유회사는 어떤 점에서 버핏 회장의 투자 원칙에 부합했던 걸까?
일단 싸다는 장점이 있다. 석유회사들은 투자자들에게 결코 인기 있는 종목은 아니다. 에너지 전환의 큰 흐름에서 퇴출돼야 마땅한 기업 1순위이기 때문이다.
인기가 없는 만큼 다른 산업의 주식들보다 싸게 거래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지점이 오히려 버핏 회장에게는 매력적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시장에서 매기는 가치평가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석유기업들의 현금흐름을 철저히 분석하며 싸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 수요는 상당 기간 꾸준하게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글로벌 에너지 믹스에서 화석연료는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른바 ‘넷제로’ 시대가 된다고 해서 석유나 화석연료가 아예 없어지진 않을 것이란 전망도 많다. 일부는 계속해서 화석연료에 의존해야하고 그 탄소 배출 부분은 탄소를 포집하는 등의 방법으로 상쇄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너지뿐 아니라 여러 산업의 기초 소재로 석유 수요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지금도 석유산업은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독과점적 성격을 지닌다. 그런데 에너지 전환을 추진한다고 하니 여기에 새로 진입할 유인도 없다. 기존 사업자의 지배력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거기에 석유기업들은 친환경 사업 투자를 가장 활발히 하고 있기도 하다. 막대한 현금창출능력을 기반으로 신사업에 적극 투자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어 보인다.
버핏 회장이 투자한 옥시덴탈페트롤리움을 보더라도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직접공기포집 기술을 사업모델로 만들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이를 통해 획득한 탄소배출권을 미국 항공제조사들에게 파는 장기 계약도 했다.
확실한 이익기반에 차세대 성장동력까지 키운다는 점. 버핏 회장이 이 부분도 눈 여겨 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런 버핏의 투자 원칙이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정유주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국내 정유기업은 미국 석유기업과는 달리 석유나 가스를 뽑아내는 업스트림 쪽은 다루지 않거나 있더라도 비중이 적다. 주로 석유를 정제해 제품으로 만드는 다운스트림 쪽이다.
그래서 유가 상승보다는 정제마진이 더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유가가 오르면 정제마진은 늘어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고유가 수혜주라는 점은 비슷하다.
에너지 전환 흐름에서 저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 정유산업 매우 자본집약적이고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라는 점은 미국 석유산업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은 신성장동력 마련에도 적극적이란 점이 눈에 띈다.
SK이노베이션은 전기차 핵심부품인 2차전지 쪽으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현금창출능력과 미래 성장동력의 결합, 매력적으로 보이는 부분입니다. 이 정도면 버핏 회장이 탐낼 가치주로 봐도 될까?
다만 일각에서는 버핏 회장이 투자한 미국 석유기업과 SK이노베이션과 같은 한국 정유기업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존재다.
일단 미국 석유기업들은 대체로 고배당주다. 번 돈을 주주에게 환원하는 데도 적극적이라는 것이다. 그와 비교하면 SK이노베이션은 주주환원에 다소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다른 정유주인 S-Oil은 고배당주로 꼽히는데 이 회사 대주주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회사 사우디아람코라는 점에서 전형적 한국의 재벌기업과는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소액주주들이 더 크게 우려하는 부분은 성장사업이라 할 수 있는 배터리 부문의 가치를 온전히 누리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SK온이란 사업 자회사로 물적분할 상태이고 향후 주식시장에 상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알짜 자회사의 상장에 따라 모회사의 주가가 떨어진 사례는 숱하게 목격되고 있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은 3월30일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배터리 자회사 SK온의 기업공개(IPO)를 추진할 때 주주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기업공개가 가시화하는 시점에 SK이노베이션 주주들을 대상으로 공개매수에 나서며 이 때 현금 대신 SK온 주식을 지급하기로 했다.
자사주 매입 규모는 SK이노베이션 시가총액의 10% 수준이며 취득 뒤 소각할 계획도 세웠다.
SK온 기업공개 이후에는 특별배당을 실시해 구주매출 자금의 일부를 주주들에게 환원할 방침도 세웠다.
SK온의 성장 과실을 주주들과 공유하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고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기존 주주에게 SK온 주식 취득의 길을 열어주고 향후 기업공개 과정에서 예상되는 불확실성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며 “기업가치 재평가를 위해 남은 관건은 실제 배터리 부문의 수익성 회복 속도에 달려있다”고 바라봤다.류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