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뛰는 사람' 저자 베른트 하인리히. 미국 버몬트주립대학 생물학 교수를 은퇴한 뒤 미국 시골 통나무집에서 생태계를 직접 관찰하며 살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어느 80대 남성이 쓴 책을 읽었다. 독일인 베른트 하인리히가 쓴 '뛰는 사람'이다. 이미 노인이지만, 일부러 남성이라고 쓴 까닭이 있다. 이 분이 79세에 내건 두 가지 거창한 목표 좀 보시라.
“하나는 80세가 되는 해에 100킬로미터 달리기에 도전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를 실험용 기니피그로 삼아, 내 연령대에서 세계기록을 세운 다음 그걸로 책을 쓰는 것.”
하! 80세에 100킬로미터를 달리겠다고? 이쯤 되면 전직 마라토너가 분명하지 않을까. 마라토너 맞다. 베른트는 마흔 살에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는데 기록이 자그마치 2시간 25분 25초란다.
두 번째로 하!! 왜냐하면 이미 마흔 살이 된 중년의 남성이 이런 기록을 낼 수 있다니 놀랍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그게 대단한 기록인가?’라고 무심히 넘길 수 있지만 마라톤 좀 뛰어본 나로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마라톤 풀코스를 10회쯤 뛰어 봤다.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용을 쓰며 달린 최고 기록이라고 해봤자 4시간20분이다.
그렇다면 지난 2021년에 열린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기록제조기’ 킵초게의 기록은 어떨까? 2시간8분38초.
그러니 감이 좀 오는가? 세계 최고 기록 보유자와 견줘 봐도 15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100미터를 18초 정도로 뛰듯 계속 전력질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밥만 먹고 죽도록 운동만 하는 직업 선수라면야 뭐. 이쯤에서 세 번째로 하!!! 실은 전문 마라토너라고 해도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를 판이다.
그런데 이 남성의 본업은 따로 있다. 놀랍게도 과학자이자 교수이다. ‘우리 시대의 소로’ 혹은 ‘현대의 시튼’이라 불릴 만큼 뼛속까지 생물학자다. 그 연구 결과를 여러 권의 책으로 써낸 작가이기도 하다. 그것도 대충 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을 대는 연구마다 놀라운 결과를 얻어내는 탁월한 학자로 평가 받는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온종일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골치 아픈 논문을 쓰고 잘 보이지도 않는 곤충이나 생물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는 사람이 과학자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으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은 몸을 쓰지 않거나, 쓰지 못하거나,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 물론 그가 지니고 태어났을 육체의 유전자 덕도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숲속을 헤매며 성장한 어린 시절도 크게 한몫 했을 거다.
훌륭한 과학자답게 생물에서 발견한 법칙, 예를 들어 생체시계나 노화에 관한 연구를 자기 몸으로 실험해 보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 책 '뛰는 사람' 표지.
그렇다 해도 과학자로서 정체성이 러너가 되는 데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반대의 도움은 지대하지 않았을까?
달리기로 쌓은 체력을 에너지 삼아 연구에 필요한 뇌를 더욱 잘 가동시켰으리라 확신한다. 달리기로 생긴 지구력은 책상에 앉아 있는 오랜 시간을 힘들지 않게 도와줬을 것이다. 달리기로 얻은 활력은 오래 들여다보고 기다려야 하는 연구의 지루함을 상쇄시켰을 것이다.
이쯤 되면 ‘달리기 만세!’가 아닌가.
사실 나는 이 책의 뒤표지에 들어갈 추천사를 썼다. 이 세상에 대단한 달리기 선수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최고 기록이 4시간20분인) 내게 추천사를 부탁했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과학자와 하는 일은 전혀 다르지만 나 역시 비슷하게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해온 편집자이기 때문이다. 힘겨운 출퇴근을 반복하면서 27년간 책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런데 저질체력이었던 전반부의 나와 몸을 쓰면서 마녀체력으로 일한 후반부의 내가 일하는 양상은 영 달랐다. 툭하면 늦잠을 자서 지각하고 시시때때로 짜증과 우울을 토하던 젊은 편집자는 사라졌다.
수영이나 달리기를 한 뒤 출근하는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났다. 나이 들어가는데도 오히려 형형한 눈빛으로 활기차게 책을 만들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이 80대 남성의 삶에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인간이란 존재는 단순하지 않다. 머리 혹은 몸, 한쪽만 잘 쓰도록 프로그래밍 된 것이 아니다. 학자도 몸을 잘 쓸 수 있고 운동선수도 머리를 잘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내 몸을 기니피그 삼아 실험해 본 바에 따르면? 지력은 체력이 좋아지는 데 별 영향을 못 미친다. (그러니 마흔 살이 되도록 저질 체력으로만 살았지.) 반대로 체력은 지력이 향상되는 데 상당히 큰 기여를 한다고 장담할 수 있다.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은가? 또는 몹시 중요한 일인가? 그래서 오랫동안 잘하고 싶은가? 그러니 운동할 틈이 어디 있겠냐고?
그럴수록 일에만 미치도록 집중하고 시간을 투여하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단기적인 발상이다. 머리 쓰는 데 비례할 만큼, 몸을 쓰는 데도 시간과 관심을 할애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일을 더 오래, 더 잘할 수 있다.
늦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책상에서 일어나, 몸을 좀 써보자. 마녀체력 작가
작가 이영미는 이제 ‘마녀체력’이란 필명으로 더 유명하다. 27년간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살았다. 한국 출판계에서 처음으로 대편집자란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냈지만, 갈수록 몸은 저질체력이 되어 갔다.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15년간 트라이애슬론으로 꾸준히 체력을 키워 나갔다. 그 경험담을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라는 주제로 묶어 내면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출판 에디터에서 작가로 변신했으며 <마녀체력> <마녀엄마> <걷기의 말들>을 썼다. 유튜브 지식강연 '세바시'를 비롯해 온오프라인에서 대중 강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