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론사에 입사한 한 후배가 저녁모임에서 불쑥 물었다. 옛날 TV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유튜브에서 봤단다. 나 같은 50대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 김수헌 코리아모니터 편집장.
15~16년 전 한 방송국이 코미디프로에서 ‘골목대장 마빡이’라는 코너를 선보였다. 대박을 쳤다.
이마가 벗겨진 가발을 쓴 코미디언 4명이 등장한다. 두 손으로 번갈아 자기 이마를 쉴새없이 때리며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자학개그’였다. 말이든, 몸짓이든 자학을 담은 코미디는 제법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정치 지도자들도 가끔 자학을 유용하게 써먹는다.
지난 4월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기자단 2000명과 연례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저보다 낮은 지지율을 가진 미국인그룹(기자들을 지칭)과 함께 해서 흥미진진하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자학개그로 지지도가 올라가진 않는다. 하지만 인기하락에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를 보인 대통령의 모습에 호평이 쏟아졌다.
요즘 가만보니 자학개그가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이 있다. 방송계가 아닌 산업계다.
그러나 이 곳의 자학개그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보단 씁쓸한 뒷맛만 남기고 있어 안타깝다.
예를 들어보자.
국제원유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주유소 판매 기름값은 3월부터 리터당 2000원(휘발유 기준)을 넘었다. 6월 말 기준 전국평균 2100원대, 서울평균은 2200원대다. 정부의 유류세 인하 조치는 기름값을 잠깐 2000원 아래로 끌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원유가격 상승세에 파묻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정유사에 대한 정치권압박이 시작됐다. 이른바 ‘횡재세’ 부과 이야기가 있다. 기금출연으로 이익 일부를 거둬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여야 고위 관계자 입에서 나오고 있다.
정유사 입장도 보도되고 있는데 가히 ‘자학’에 가깝다. 여기에는 정유업계 이익증가분은 재고평가이익으로 회계상의 이익일 뿐이라는 내용이 있다.
회계상 이익이라는 것은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기업이 10년 전 100만 원에 매입한 토지가 있다. 장부가격을 계속 100만 원으로 기록했으나 이번에 재평가를 하기로 했다. 시세 평가액은 1000만 원이다. 기업은 토지자산재평가이익으로 900만원을 얻었다. 현금이 들어올 이익은 아니므로 일종의 ‘회계상 이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럴당 4달러~5달러가 정유사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져있다. 6월 마지막주 싱가폴복합정제마진은 30달러 수준에 육박했다. 역대급이다.
이 같은 정제마진 덕분에 정유사 이익은 급증하고 있다. 국제 반도체 값이 오르면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증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삼성전자 이익도 회계상 이익에 불과한 것일까?
국제원유가격 상승기에 일반적으로 정유사 수익성은 좋아진다. 가장 큰 이유는 ‘래깅(lagging)효과’ 때문이다.
산유국에서 원유를 도입하여 정제판매까지 약 2달의 시간이 걸린다. 이 기간 유가상승으로 제품가격도 상승한다면 정유사 입장에서는 싸게 도입한 원유로 비싼 제품을 파는 셈이 된다.
원유도입시점과 판매시점간 시차로 정제마진이 커지는 것을 래깅효과라고 한다. 유가가 하락조정을 받아도 제품가격이 유지된다면 정제마진은 오히려 더 커질 수 있다.
▲ 국제원유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주유소 판매 기름값은 3월부터 리터당 2000원(휘발유 기준)을 넘었다. 6월 말 기준 전국평균 2100원대, 서울평균은 2200원대다. 정부의 유류세 인하 조치는 기름값을 잠깐 2000원 아래로 끌어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원유가격 상승세에 파묻혔다. 사진은 한 주유소의 유가정보 게시판. <연합뉴스>
재고자산평가이익일 뿐이므로 원유시세 변화에 따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할까?
정유사가 원유를 1배럴 50달러에 도입하여 저장해 놓았다고 하자. 그 이후 국제원유가격이 70달러가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정유사가 20달러 재고평가이익을 봤다고 기록하지는 않는다. 재고자산평가는 저가법에 따르는 것이 회계기준이다. 현재 장부가격 50달러와 국제시세 70달러 가운데 낮은 값인 50달러를 장부가격으로 그대로 두는 것이다.
만약 국제원유가격이 30달러로 떨어졌다면 20달러 재고평가손실을 반영해야 한다. 장부가(50달러)와 시세(30달러) 가운데 저가인 30달러로 장부가격을 고친다. 차액(20달러)은 매출원가에 더해준다. (물론 정유사의 실제 재고자산평가손실 측정방법은 이와는 좀 다르다)
올해 1분기 결산에서 정유사가 보유재고에다 오른 유가를 적용해서 평가이익을 반영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분식회계를 자백한 것이다. 그랬을리는 없다.
정치권의 고강도 압박에 대한 정유업계 대응이 사실과 동떨어진 '자학'으로 흘러가는 것은 옳지않다. 필자가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해봤다.
정유업계 이야기는 이렇다.
재고평가이익을 반영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재고효과(래깅효과)가 유가흐름에 따라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인데 언론에 과장보도되고 있다는 거다. 영업이익은 커지고 있지만 실제 영업현금흐름은 그만큼 좋지않다는 정유업계의 볼멘 소리도 있다.
필자의 판단은 이렇다.
정유사의 수익성이 좋아지는 유가 상승기에 영업현금흐름은 반대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런 경향이 나타난다. 운전자본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원유가격이 상승하고 있으면 정유사 입장에서는 수입자금이 계속 증가한다. 원유가격이 더 오를 가능성이 있으면 지금 원유를 최대한 많이 도입할 필요도 있다. 재고자산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제품판매에서 발생하는 매출채권 회수가 그만큼 빠르지 않다면 현금흐름에 미스매치가 발생한다. 영업현금흐름이 악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제마진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며 영업이익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익과 현금간 미시매치는 별 문제될 것이 없다. 영업이익은 시간이 지나면 현금으로 회수된다. 따라서 2분기 이후 현금흐름은 좋아질 것으로 본다.
민간기업 이익에 대한 정치권의 회수 압박이 타당한지에 대해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 가시적 조치가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정치권의 행위야 어찌되었건 정유업계의 대응이 자칫 재미없는 '자학개그'로 흐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김수헌 코리아모니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