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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맹호 민음사 회장 |
민음사는 우리나라 출판계의 산 역사다. 박맹호 민음사 회장은 1966년 종로의 한 옥탑방에 민음사를 열었다. 그 뒤 민음사는 ‘출판계의 맏형’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국내에서 손꼽히는 단행본 출판사로 성장했다.
그런 민음사가 흔들리고 있다.
민음사는 전체 직원 수가 120명, 연간 매출액이 300억 원을 넘는 대형출판사다. 민음사는 지난해 적자를 냈다. 감사보고서를 공시한 2003년 이후 처음이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에 대비해 11.3%가 올랐지만 가격할인 경쟁에 따른 수익률 저하, 과한 광고선전비와 저작권료 부담 등이 영향을 끼쳤다.
출판계가 어려운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한국출판저작연구소의 '2013 출판시장 통계'를 보면 전체 출판사 10곳 중 2곳(19.8%)만이 성장성과 수익성이 좋아졌다. 10곳 중 8곳(80.2%)은 성장성 또는 수익성이 나빠졌고 전체의 절반 가량(45.7%)은 성장성과 수익성이 모두 악화됐다.
그러나 민음사는 이런 불황을 그동안 훌륭히 견뎌냈다. 그렇게 굳건했던 민음사에게도 위기가 닥친 것이다.
민음사의 위기는 불황 탓도 있지만 스스로를 벼랑 끝에 내몬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도대체 민음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 민음사도 피해가지 못한 구조조정
“3월4일 오후 5시 사장실에서 구두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출판시장에서도 크다는 소리 듣는 회사가 이러할진대 작은 출판사들의 디자이너, 편집자들은 오죽할까.”
지난 3월 민음사에서 해고된 신입 디자이너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민음사는 3월 초 직원 6명에게 경영난 때문이라며 해고를 통보했다.
해고의 후폭풍은 거셌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논란이 되자 민음사는 사흘 만에 해고를 철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음사가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상태로 직원을 고용한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2013년 민음사의 정규직 채용공고를 통해 채용된 직원들은 입사 당시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관행이 출판계에서 익숙한 일이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출판계에서 빈번한 해고, 근로계약서조차도 쓰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그만큼 우리 출판계가 후진적이고, 손꼽이는 대형출판사인 민음사조차도 예외가 아니라는 얘기다.
민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간 이유는 물론 출판산업의 불황 때문이다. 책 읽지 않는 사회가 출판계의 불황을 불렀고 출판사들이 이를 타개할 묘책을 찾아내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이런 점만을 원인으로 꼽기 어렵다. 좀 더 복잡한 문제들이 내재돼 있다.
◆ 당첨되지 않은 ‘하루키’ 복권
민음사는 지난 3월 있었던 구조조정의 배경을 경영난이라 설명했다. 실제 민음사 내부에서 2월 말부터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민음사가 적자를 낸 이유에 대해 출판 전문가들은 ‘선인세’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선인세는 인세 가운데 계약금 성격으로 미리 지급하는 금액을 뜻한다. 출판사는 전작의 판매량, 작가의 인지도 등을 고려해 판매부수를 예측하고 그에 따라 선인세 규모를 판단해 지급한다.
민음사는 지난해 일본의 유명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16억 원이라는 선인세를 지급했다. 국내작가의 선인세가 많아야 5천만 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 금액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신작을 잡기 위한 대형출판사들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민음사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막대한 선인세를 지급한 것이다.
고액의 선인세는 출판사 입장에서 모험이다. 복권과 비슷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책이 팔리지 않으면 부담은 고스란히 출판사의 몫이 된다. 16억 원의 선인세를 지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업계에서 하루키의 신작이 최소 100만 부가 팔려야 본전을 뽑을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출간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하루키 신작의 판매량은 50만 부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음사의 첫 적자는 여기에서 비롯됐다.
민음사는 책의 판매세가 주춤해지자 대규모 광고와 함께 물량공세를 시작했다. 책을 구매한 고객에게 8천 원짜리 영화표를 증정했다. 베스트셀러 순위가 높을수록 책이 더 잘 팔리는 우리나라 시장의 특성을 이용한 마케팅이었다. 1위 자리를 되찾기 위해 배보다 배꼽이 큰 이벤트를 진행했다.
이 이벤트 이후 4위까지 내려앉았던 책의 판매순위는 단숨에 1위를 탈환했다. 영화표 증정은 민음사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출판유통심의위원회로부터 과열 마케팅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받으며 일단락됐다.
자금력을 갖춘 대형출판사들이 된다 싶은 외국작가에게 고액 선인세를 지급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루키의 선인세는 1990년대 중반만 해도 1천만 원대였지만 2000년대 들어 3억 원대, 2009년 발간된 ‘1Q84’는 10억 원대로 뛰었다. 우리나라 출판계는 브라질과 독일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손으로 꼽힌다.
출판계가 불황에 빠지면서 출판사들이 돈이 되는 책을 내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불붙은 인세 경쟁으로 선인세는 점차 고공행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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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7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국내에 첫 출간되자 독자들이 책을 구입하기 위해 긴 줄을 서있다.<뉴시스> |
◆ ‘쩐의 전쟁’이 출판계에 남긴 것
이런 경쟁이 출판계 전반에 미친 악영향은 크다. 이미 불황에 빠져든 출판시장을 더욱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
출판계가 돈 놓고 돈 먹는 경쟁에 몰입하면서 막대한 인세를 댈 수 없는 중소형출판사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출판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장이 철저하게 자본과 힘 아래 놓였다”며 “콘텐츠의 힘보다 마케팅의 힘이 상업적 성공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작은 출판사, 틈새시장을 겨냥한 출판사, 전문 학술 출판사가 살아날 구멍이 더욱 막혀버렸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계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다. 발간되는 책들이 이른바 되는 작가, 되는 장르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출판물 중 번역서의 출판비율은 신간의 30%를 넘어 해외 번역서 의존도가 매우 높다.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 번역서 비중이 7~8%, 미국이 5% 미만에 그치는 것과 비교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출판시장은 다품종 소량생산에 따른 다양성이 무기”라며 “킬러 콘텐츠만 있으면 돈이 된다는 생각에 비싼 선인세라도 지급하려다 보니 시장의 다양성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국내작가와 형평성 논란도 불거졌다. 한 쪽으로 인세가 치우치면서 상대적으로 국내의 신인작가들에 돌아가는 돈은 줄었다. 신인작가를 발굴하려는 출판사들의 노력도 사라졌다. 결국 국내 문학계 자체가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우리 문학계의 대표적 작가인 김훈과 신경숙도 선인세는 1억 원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책값도 올랐다. 인세가 지급되는 만큼 소비자에게 부담이 고스란히 전가됐다. CF모델의 광고비가 제품의 가격에 포함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출판문화협회가 조사한 문학도서의 가격 인상률은 2011년 5.2%, 2012년 3.8%, 2013년 1.7%로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인 4%, 2.2%, 1.3%를 매년 웃돌았다.
비슷한 내용의 자기계발서 일색에 마땅한 근거없이 값이 오르기만 하는 책이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결국 불황이 경쟁을 낳고 경쟁이 불황을 심화시키는 구조인 것이다. 이 경쟁의 중심에 민음사를 비롯한 대형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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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는 매년 패밀리세일을 통해 최대 70%까지 할인된 가격으로 책을 판매하고 있다. |
◆ 50% 할인행사, 민음사의 물량공세
민음사는 지난 12일 GS홈쇼핑을 통해 세계문학전집 300권을 50% 할인해 판매했다. 정가 300여만 원에 달하는 전집을 150만 원도 되지 않는 가격에 팔았다. 그뿐 아니라 전자책 단말기와 책장, 텐트 등을 사은품으로 지급했다.
민음사가 홈쇼핑을 통해 대규모 사은품을 지급하면서 반값 세일을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민음사는 2005년 출판사 최초로 홈쇼핑에 진출해 최근까지 여러 차례 할인행사를 진행했다. 대부분 빠른 속도로 매진됐으며 이를 통해 민음사가 얻은 매출은 수십억 원을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민음사의 이러한 폭탄세일은 민음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출판계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홈쇼핑에서 물건을 판매하려면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이 수수료를 감당할 수 있고 대규모 할인까지 진행할 여력이 있는 출판사만 홈쇼핑을 통해 책을 판매할 수 있다.
대형출판사는 대량출간이 가능해 판매부수만 받쳐준다면 낮은 가격에 충분히 공급할 수 있지만 중소형출판사는 가격을 낮추면서까지 도서를 공급하기 어렵다. 중소형출판사가 홈쇼핑을 통해 책을 판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한 출판사 간부는 “우리도 홈쇼핑과 방송판매를 논의했지만 50% 할인, 사은품에 방송수수료까지 감안하니 순수한 책 제작비마저 나오기 힘들어서 접었다”고 말했다.
◆ 신뢰 떨어뜨리는 가격경쟁
잦은 할인은 가격거품을 불러왔다.
대형출판사들은 할인을 전제로 책값을 높게 책정했고 이후 높은 할인율로 책값을 깎아 팔았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책값이 거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민음사가 진행하는 패밀리세일이나 국제도서전도 이러한 인식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민음사는 1년에 한 번 파주 출판단지에서 최대 70%까지 할인하는 패밀리세일을 진행한다.
국내외 여러 출판사들이 참여하는 국제도서전도 몇몇 대형출판사들이 재고털이를 하는 장사판으로 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거대한 부스를 만들어 경쟁적으로 할인행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형출판사들이 여러 판매경로로 책을 할인해 팔고, 여러 명목으로 할인행사를 진행하면서 책을 제값 주고 사면 바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출판사들 스스로 책값을 무너뜨려 소비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린 셈이다.
할인경쟁에 뛰어들 자금력이 없는 중소형출판사는 가격경쟁력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 할인을 한다 해도 책을 팔면 팔수록 밑지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애써 만든 책을 헐값에 출간해야 하는 데다가 쿠폰, 검색창 광고, 이벤트, 메일링서비스 등의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할인경쟁이 출판문화의 전반적 질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중소형출판사는 가격경쟁에 뛰어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원가절감에 힘쓰게 된다는 것이다.
중소형출판사를 운영하는 한 관계자는 “무분별한 가격 경쟁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원가절감의 압박은 글을 쓰고 그것을 좀 더 읽기 쉽게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을 황폐화한다”며 “책 한 권을 팔아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이 반토막 나면 같은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한 권을 쓰고 만들 시간에 두 권을 쓰고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대형출판사들의 지나친 할인경쟁이 스스로뿐 아니라 중소형출판사, 나아가 출판계 전체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셈이다. 출판계의 불황을 ‘책 읽지 않는 한국사회’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