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를 ‘고급차의 본고장’ 유럽에 내놓는 데 신중을 거듭하고 있다.
과거 실패 경험을 딛고 유럽시장에 안착하려면 다른 고급 브랜드와 차별화한 이미지를 만들고 친환경차 라인업을 보강해야 하는 등 살펴야 할 대목이 많다.
3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가 2020년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의 유럽 진출을 올해는 구체화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가 제네시스를 유럽에 내놓을 시기를 못박은 적은 없지만 관련 내용은 2017년부터 꾸준히 거론됐다. 2019년 6월 독일 뮌헨에 제네시스모터유럽 유한회사(GME)라는 판매법인을 세우면서 2020년 유럽 출시가 유력하게 점쳐지기도 했다.
현대차는 2019년 9월 영국 런던에, 2020년 3월 스위스 취리히에도 제네시스 관련 완성차 및 부품 판매법인을 세웠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자동차 수요가 위축되면서 제네시스의 유럽 출시일정도 미뤄졌다.
여러 시장분석기관에서 올해 자동차 수요가 2020년보다 회복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 만큼 현대차가 제네시스의 유럽 출시를 더 미루지는 않을 것으로 업계는 바라본다.
2020년 12월10일 열린 현대차의 기업설명회 ‘CEO인베스터 데이’에서 당시 이원희 대표이사 사장은 “제네시스를 향후 중국과 유럽 시장까지 진출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일 것”이라며 유럽 출시 의지를 재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차가 시간에 쫓겨 제네시스의 유럽 출시일정을 앞당기기보다 다소 늦어지더라도 고심을 거듭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대중 브랜드는 물론 다른 고급 브랜드와 차별화할 수 있는 명확한 전략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럽 고급차시장을 보면 벤츠와 BMW, 아우디 등 오래된 전통을 지닌 고급차 브랜드가 주도권을 꽉 쥐고 있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에 따르면 벤츠와 BMW, 아우디 등 독일 3개 브랜드는 1~11월에 유럽에서 자동차를 각각 66만8055대, 75만8858대, 54만6194대 판매했다.
재규어와 랜드로버의 판매량이 같은 기간 14만2117대, 피아트크라이슬러그룹(FCA) 산하 고급 브랜드인 지프의 판매량이 11만414대인 점을 감안할 때 독일 3개 브랜드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토요타의 고급 브랜드 렉서스는 같은 기간 4만2229대를 파는데 그쳤다.
독일 3개 브랜드의 점유율이 높다 보니 일본 닛산은 고급 브랜드 인피니티를 2020년 상반기에 유럽에서 철수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소유한 고급 브랜드 캐딜락도 유럽에서 판매하는 차종은 XT4 한 종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에 진출하려는 제네시스가 소비자에게 내밀 수 있는 카드는 사실 많지 않다.
유럽 소비자는 자동차 품질과 이미지뿐 아니라 브랜드의 전통도 고급 브랜드에서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데 제네시스는 현대차의 독립 브랜드로 출범한지 이제 만 5년이 갓 지났을 뿐이다.
제네시스가 전통을 억지로 늘릴 수 없는 만큼 ‘현대차 가운데 비싼 차’라는 이미지를 넘어서려면 고급 브랜드로서 독일 3개 브랜드와 차별화할 수 있는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각인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현대차는 브랜드 이미지 전략을 강화할 인사를 보강하는 방식으로 제네시스 유럽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0년 상반기에 제네시스 유럽 법인의 최고판매책임자(CSO)로 애스터마틴과 마세라티 유럽판매총괄을 역임한 엔리케 로렌자나를 영입했다.
2020년 10월에는 아우디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독일 이외 국가에서 아우디의 현지화 전략을 주도한 아우디코리아의 전 대표 도미니크 보쉬를 제네시스모터유럽 유한회사의 전무급 임원으로 선임했다. 같은해 11월에는 제네시스 디자인을 총괄했던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을 다시 디자인 기반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할 최고창조책임자(CCO)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명확한 브랜드 전략을 세우는 것과 별개로 라인업 문제도 유럽 진출시기를 고심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현대차는 2020년에 GV80, GV70 등 2종의 SUV(스포츠유틸리티 차량)을 선보이며 기존 세단 3종과 더불어 모두 5종의 제네시스 라인업을 갖췄다.
하지만 유럽연합이 친환경차 규제를 강화하면서 여러 고급 브랜드가 전기차 출시를 앞다투고 있는 만큼 제네시스도 이에 걸맞은 라인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자동차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각 고급 브랜드의 대표적 전기차로는 아우디의 e-트론, 재규어의 I-페이스 등이 있으며 벤츠와 BMW도 지속적으로 전기차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다.
알버트 비어만 현대차 연구개발본부장 사장이 기업설명회에서 직접 “고급라인의 전동화 모델을 투입하여 럭셔리 친환경차 이미지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한 점도 제네시스의 라인업 보강이 먼저 이뤄질 수 있다는 예상에 힘을 싣는다.
현대차는 올해 순수전기차 JW(개발명)을 포함해 G80의 전기차 버전을 시장에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는 2008년 프리미엄 세단으로 제네시스를 처음 출시한 뒤 2010년부터 유럽 판매를 추진했다. 2011년 7대, 2012년 21대, 2013년 10대, 2014년 163대 판매하며 조금씩 판매량을 늘리다가 2015년에 G90을 야심차게 내놓으며 승부수를 던졌지만 시장 안착에 실패했다.
현대차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서유럽에서 판매한 제네시스 차량은 G80 8대에 불과하며 2020년에는 단 한 대의 제네시스도 서유럽에서 판매하지 못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