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굴기’에 힘쓰던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기업들이 미국의 제재에 발목이 잡혔다.
미국정부가 반도체 미세공정에 꼭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았기 때문이다. 중국기업들의 도전을 받던 삼성전자는 앞으로 파운드리 1인자인 대만 TSMC와 경쟁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7일 로이터 등 외국언론에 따르면 최근 미국정부는 네덜란드정부에 압력을 넣어 중국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SMIC(중국인터내셔널반도체)의 극자외선 노광장비 수입을 봉쇄했다.
로이터는 “네덜란드정부는 백악관을 방문한 직후 ASML의 수출 허가를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1억5천만 달러짜리 기계는 (SMIC로) 운송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앞서 네덜란드정부는 2018년 네덜란드 기업이자 세계 유일의 극자외선 노광장비 생산회사인 ASML이 중국기업과 거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후 미국정부는 지속해서 네덜란드정부에 허가취소를 요청했고 이 과정에서 찰스 쿠퍼만 미국 국가안보부보좌관도 백악관에서 네덜란드 총리를 만나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빛을 이용해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노광공정에 사용된다.
노광공정에서는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는데 극자외선은 기존 불화아르곤 레이저와 비교해 파장이 10분의 1 수준으로 짧다. 5나노급 이하 미세공정에는 사실상 극자외선 노광장비 없이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SMIC는 7나노급 공정개발을 목표로 극자외선 노광장비 도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장비를 확보하는 데 실패해 앞으로 파운드리사업을 확대하는 데 한계에 봉착하게 됐다.
수준 높은 미세공정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 파운드리는 자연히 고부가가치 반도체 위탁생산을 수주할 기회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미세공정으로 반도체 크기를 줄여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SMIC는 삼성전자와 TSMC 등 파운드리 선두주자와 비교해 아직 기술적으로 많이 부족하다. 삼성전자와 TSMC가 5나노급 파운드리 양산을 준비하는 가운데 SMIC는 최근에야 12나노급 공정 위험생산(손실을 부담하는 시험생산 과정)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기술력 차이는 시장점유율 격차로도 연결된다. 시장 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19년 4분기 기준 SMIC의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추산치는 4.3% 수준으로 글로벌 5위에 그친다.
하지만 SMIC는 중국기업으로서 정부 차원의 대규모 지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앞으로 삼성전자 등 거대 파운드리를 위협할 만한 적수로 성장할 수 있다는 평을 들어왔다.
중국정부는 반도체 등 주요 부품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하는 국가정책 ‘중국제조2025’를 수립하고 관련 기업에 막대한 투자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기회 및 위협요인’ 보고서에서 “SMIC 등 중국 파운드리업체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아직 기술적 격차는 존재하지만 중국정부의 적극적 지원 아래 성장 중인 중국 반도체산업은 위협적이다”라고 봤다.
▲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NXE3400C'. < ASML > |
그러나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산업 성장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앞으로 SMIC는 삼성전자와 TSMC를 따라가기 쉽지 않게 됐다.
현재 미국과 중국 관계가 좋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SMIC뿐 아니라 화홍과 HSMC 등 다른 중국 반도체기업들도 앞으로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확보하지 못할 공산이 크다.
만약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 SMIC 등 중국 파운드리기업들이 극자외선 장비 도입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 때에는 삼성전자와 TSMC 등 파운드리 선두기업과 기술격차가 더욱 벌어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앞으로도 파운드리업계의 기술경쟁은 삼성전자와 TSMC 양강구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파운드리 3위를 차지하는 글로벌파운드리는 일찌감치 7나노급 공정 포기를 선언했고 4위인 대만 UMC는 아직 7나노급 이하 공정에 관해 명확한 로드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