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事, 師, 士)’자로 끝나는 직업이 각광받던 시기가 있었다. 의사, 약사, 변호사, 회계사, 노무사, 변리사 등 고소득과 안정성이 보장되는 직업군을 통칭해 ‘사’자 직업이라 불렀다.
이러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전문가로 대접받으며,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사’자가 되었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됐다.
▲ 박형준 커리어케어 헤드헌팅사업본부 이사.
우선 기대 만큼 높은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다.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내부 경쟁이 치열해졌다.
대형 로펌이나 회계법인에서 파트너가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희망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물론 이것도 대형 로펌이나 회계법인 등에 취직했을 때 얘기다. 작은 법인에 취직한 많은 젊은이들이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기꺼이 박봉을 감수한다. 최근 심각해진 부의 양극화는 ‘사’자 직업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안정성도 보장되지 않는다. 어디서든 폐업이 속출하고 인수합병을 통한 대형화가 유행이다. 평생 직장커녕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언제까지 존속할지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고객은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를 빌미로 쉽게 설득 당하지 않는다. 기왕에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면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한 큰 업체를 찾는다. 누군가 수 년 동안 고객의 일을 맡아 열심히 처리해줘도 고객은 결국 개인이 아닌 조직을 선택한다.
이처럼 고소득과 안정성이 불확실해지자 사람들은 제각각 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도 한 몫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기업에 ‘사’자 직업을 가진 전문가들이 꽤 늘어났다.
어차피 외부 법인에 있어도 승진의 길은 멀고 영업의 압박은 거세다면 기업도 좋은 선택일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업과 전문가 양측의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측면도 있다.
한국 최대 헤드헌팅회사인 커리어케어에서 Consumer & Convergence 부문 파트장을 맡고 있는 박형준 이사의 얘기를 통해 현상과 전망을 살펴본다.
- 실제 이러한 직업을 가진 전문가들이 기업에 많이 유입됐는가?
“개인적으로 주로 상대하는 고객사가 소비재 기업이나 유통회사라서 해당 산업 분야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요즘에는 대기업 외에 중견기업, 중소기업에서도 회계사를 뽑겠다고 연락이 온다. 십여 년 전만 해도 회사 내부에서 변호사나 회계사를 찾기 어려웠다.
심지어 어떤 고객사는 올해 이미 회계사를 두 명이나 채용했는데 추가로 더 뽑겠다고 한다. 변호사도 내부에서 다루는 계약서가 많아지고 여러 법률 리스크를 줄일 목적으로 많이 채용되고 있다. 노무사도 현 정부 들어 노무 관련 이슈가 늘어나 기업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 이렇게 채용이 늘어난 상세한 이유를 듣고 싶다.
“최근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이하 외감법)’이 개정되었다. 기업 입장에서 자주 바뀌는 국제회계기준도 따라야 하고 외감법도 준수하자면 회계사가 내부에 있는 게 유리하다. 올해 회계사 최소 선발인원이 850명에서 1천 명으로 늘어난 것도 이러한 시장의 수급상황을 고려한 조치라고 알고 있다.
또한 생존경쟁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검토해야 할 계약서의 종류나 수가 훨씬 많아졌다. 컴플라이언스 이슈나 점점 대담해지는 블랙컨슈머 문제도 적절히 대응해야 해서 사내 변호사를 두는 게 여러모로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 매번 로펌에 일을 맡기면 비용도 많이 들고 때를 놓칠 수 있다.
미투 등 사내 인권도 가볍게 다룰 수 없는 문제다. 노무사는 문재인 정부 들어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정부정책이 쏟아지면서 채용 시장이 확대됐다. 그리고 회계사, 변호사, 노무사 등 전문가들의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보다 우호적으로 변했다.”
- 혹시 전문가들이 기업에서 받는 처우나 위상이 예전과 달라졌는가?
“수요와 공급 법칙을 무시할 수 없다. 회계사는 시장 수요가 늘면서 기업과 회계 법인 간에 서로 영입 경쟁을 벌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몸값이 높아졌다. 반면 변호사는 로스쿨을 마친 변호사들이 시장에 많이 나오면서 처우는 예전만 못한 편이다. 물론 사법고시 출신의 파트너급 변호사는 여전히 높은 대우를 받는다. 그들의 무시할 수 없는 경험과 인맥, 대관업무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 기업에서는 채용할 때 주로 이들의 어떤 경험이나 역량을 살피는가?
“신입으로 뽑는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직접적 업무경험이 있는지 살핀다. 변호사라면 소송 경험이 있는지, 공정거래사건이나 하도급사건을 다뤄봤는지 묻는다. 회계사도 마찬가지다. 회계, 세무, 재무, 내부 통제와 같은 일반적 회계업무 외에 각 기업마다 중요한 이슈가 있기 마련인데, 실제 해당 업무 경험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 밖에는 기업의 인재상이나 핵심 역량과 같이 일반적인 채용기준에 따른다.”
- 앞으로도 이러한 분위기가 지속될 것 같은가? 만약 그렇다면 기업과 후보자에게 각각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
“앞으로도 이런 흐름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국내외 정부기관과 각종 단체에서 요구하는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내부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점이 이른바 ‘사’자 직업 전문가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기업 내부에서 영향력이 더 강화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임원으로의 승진 가능성은 물론이고 역할도 지금보다 더 확장될 것이다. 커리어로 봤을 때도 외부 법인과 기업에서 모두 경험을 쌓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유리하다.” [정민호 커리어케어 경영기획실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