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리스크가 높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0일 서울 중구 본관에서 열린 임기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진행한 간담회에서 중동사태 불확실성이 한국 경제에 미칠 타격에 관한 우려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0일 통화정책방향 기자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은행 유튜브 생중계 갈무리> |
이 총재는 이날 환율과 경제전망, 통화정책 경로 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른 모든 요인을 뛰어넘는 가장 큰 변수는 중동사태”라고 강조했다.
당장 미국과 이란의 2주 휴전기간이 끝난 뒤 전쟁 전개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에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바라봤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 침체(Stagnation)와 물가 상승(Inflation)의 합성어다. 보통 경기가 나쁘면 소비가 줄어 물가가 하락하는데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가 바닥인데 물가가 치솟는 상황을 말한다.
주로 공급 측면의 충격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번과 같이 전쟁에 따른 유가 급등이 대표적 원인으로 꼽힌다.
이 총재는 이란전쟁은 중동산 원유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아시아지역 국가들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점도 짚었다. 앞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이 많은 유럽지역이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 때와 또 다른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총재는 “현재 환율 수준이 크게 높아져 있고 경제주체들이 물가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며 “기대인플레이션이 불안정할 가능성이 높아 이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예측이 어려운 대외 환경과 1500원 안팎을 오가는 환율, 산업부문별 격차가 큰 경기상태까지 내부 요인에 관한 높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는 시장에 금리인상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다.
이 총재는 “통화정책 운영의 기본원칙은 명확하다”며 “충격이 일시적일 때는 금리조정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충격이 장기화돼 물가상승 압력이 확산하면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사례처럼 통화정책으로 적극 대응할 가능성과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모두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앞서 올해 2월 금통위 뒤 간담회에서 “3개월 안에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논의는 없었다”고 선을 그은 것과 비교하면 상황에 따라 통화긴축으로 전환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열어둔 것이다.
당시 한국은행이 처음으로 공개한 6개월 금리전망 점도표에서도 연 2.50% 유지 의견에 무게가 실리면서 금리동결이 장기화될 것이란 관측들이 나왔다. 하지만 이란전쟁으로 통화정책 경로의 불확실성이 한층 커진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행 금통위는 이날 통화정책방향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2.50%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2025년 7월부터 7번 연속 동결이다.
이란전쟁으로 물가안정과 금융시장 안정 사이 상충이 커진 어려운 상황에서 통화정책 배턴은 신현송 한국은행 차기 총재 후보자에게 넘어간다.
이 총재는 이날 퇴임을 앞두고 아쉬웠던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환율이 안정된 상태에서 후임자에게 넘기면 저 양반이 일을 잘 마무리했다고 할 텐데 트럼프 대통령이 도와주지 않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 ▲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3월31일 서울 중구 한화금융플라자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
4년의 임기 동안 금통위가 내린 금리결정과 경제와 정책 현안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던 점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초기 금리인하에 실기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지나고 나니 금리를 너무 안 올려 환율이 급등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며 “양쪽의 균형이 맞으니 잘했다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을 떠나는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발걸음이 안 무겁다”며 “오랫동안 교수, 공직에 있었는데 밖에 나가면 또 새로 어떤 일을 할지, 발걸음이 가볍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1960년생으로 서울 인창고등학교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로체스터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했고 이명박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아시아개발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냈다.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 등을 거쳐 2022년 4월21일 4년 임기로 한국은행 총재에 올랐다. 후임인 신현송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는 15일 열린다. 박혜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