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된 경북 경주시 교동 69번지 최부자댁. <경주시> |
[비즈니스포스트] 만석군 거부가 된 경주 최부자댁에는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온 가훈이 있었습니다. 그 가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2. 재산을 만석에서 더 이상 늘리지 말고 그 이상 되는 것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4.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5.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며느리들은 처음 시집온 뒤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훌륭한 가훈을 갖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최부자댁 자손들은 이 가훈을 충실하게 따르고 실천했습니다.
대대로 진사를 배출했지만, 가훈에 따라 더 이상의 권력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재산을 더 크게 늘리려 애쓰지 않았습니다. 부귀 권세는 마약과 같아서 자꾸 더 많이 가지려는 유혹에 빠지게 만듭니다. 최부자댁 사람들은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선조의 유훈을 잘 지켰습니다.
최부자댁은 늘어가는 부의 혜택을 많은 사람들과 지혜롭게 나누고자 애썼습니다. 먼저 소작인들에게 받는 소작료를 파격적으로 줄였습니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 대지주들은 마름이라는 중간 관리인들을 두고 소작인들을 관리했는데, 마름들에게 들어가는 경비 부담은 소작인들이 져야했습니다. 게다가 마름에게 잘 보여야 농사지을 땅을 얻을 수 있으니 마름들의 횡포가 매우 심했습니다.
최부자댁에선 소작인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마름을 두지 않고 모든 농지를 직접 관리했습니다. 그 덕에 소작료를 많이 낮춰줄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평균 소작료는 대략 5할 정도였습니다. 소작 농민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곡식의 반 정도를 바쳐야 했습니다. 최부자댁은 소작료를 2.5할로 낮췄습니다.
이렇게 혜택을 받으니 농민들은 사기가 올라 더욱 정성스럽게 농사에 임하고, 생산량도 많이 늘었습니다. 최부자댁의 수익도 많아져 재산이 자꾸 더 불어났습니다. 평균 소작료의 반밖에 안되니 다른 집 소작인들은 모두 최부자댁 소작인들을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최부자댁은 또 소작료 수익 중 3분의 1은 가문의 살림살이와 토지 구입 등에 쓰고, 3분의 1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썼으며, 나머지 3분의 1은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데 썼습니다. 나그네들 또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으니,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는 아낌이 없었지만, 최부자댁 가솔들은 아주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가문의 며느리들은 오래 입어 여기저기 해진 무명옷들도 버리지 않고 겹겹이 기워 입었다고 합니다. 당대 조선 최고의 부잣집 아녀자들이 자신들은 누더기 같은 옷을 입을 정도로 근검 절약하며 어려운 이들을 아낌없이 도왔던 것입니다.
최부자댁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200여 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렇게 긴 세월 큰 변고 없이 막대한 재산을 지키고 더욱 키워온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7대 최언경 선생 때에 이르러 가까운 주변에 최부자댁의 번영을 시기 질투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이에 최언경 선생은 이조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새로 둥지를 틀 좋은 터를 구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뛰어난 길지로 알려진 여러 후보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경주시 교동의 요석궁터를 가장 높이 평가하여 여기로 이거하게 되었습니다.
요석궁은 신라시대 태종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가 살았던 곳입니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이 잉태된 곳이기도 합니다. 설총은 신라 10현인 중 한 사람이며, 신라 3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고, 이두를 집대성한 대학자였습니다. 또 설총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누님 둘이 있었는데, 둘째 누님은 신문왕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최언경 선생은 이렇게 유서 깊은 요석궁터 일대의 땅을 구입하여 이거했습니다. 교동 최부자댁은 신라의 왕궁이 자리했던 반월성 서쪽에 있습니다. 반월성과는 40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데, 반월성과 최부자댁 사이엔 경주향교가 자리했습니다.
교동 최부자댁 일대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동쪽 멀리로는 토함산에서 명활산으로 뻗어간 산맥이 보입니다. 서쪽 멀리로는 선도산과 영천 쪽에서 양산 쪽으로 유장하게 뻗어간 낙동정맥 연봉들이 보입니다.
또, 남쪽으로는 남산이, 북쪽으로는 소금강산 연봉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조리 충의당 일대보다 시야가 몇 배 더 넓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산들이 부드럽고 온화하게 생겨 평화로운 기운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시기 질투를 받던 최언경 선생이 이곳을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동쪽의 명활산은 한자의 한 일자처럼 생긴 목성의 산입니다. 선도산은 둥그런 금성의 산이며, 남쪽의 남산은 봉우리들이 불꽃처럼 뾰족 뾰족하게 생긴 화성의 산입니다. 북쪽의 소금강산은 물결처럼 생긴 수성의 산입니다.
이 네 산의 중앙에 자리한 반월성은 사각형에 가까운 토성의 산입니다. 오행으로 동방은 나무(목)이고, 서방은 금, 남방은 화, 북방은 수, 중앙은 토입니다. 반월성과 최부자댁 일대를 기준으로 보면, 각 방위마다 그 방위의 오행과 같은 오행의 산이 있습니다.
5성의 산들이 이렇게 자리 잡은 곳은 매우 드물며, 풍수학에선 이런 명당을 오기조원이라 하며 아주 귀한 길지로 여깁니다. 이처럼 특별한 기운이 서린 명당이라서 신라가 삼국시대의 마지막 승자가 되었으며, 반월성에 천 년 동안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라는 왕궁과 수도를 한 번도 옮기지 않았습니다.
교동 최부자댁 가까이에는 동쪽에 반월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산의 지봉 두 개가 앞뒤로 솟아있습니다. 그런데 서쪽과 북쪽에는 가까이에 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최부자댁은 남향집인데 가까이 뒤에서 보호해주는 산이 없습니다.
멀리 소금강산이 있으나 너무 멀고, 또 소금강산 왼쪽으로 형산강이 흘러가는데, 유역이 넓고 높은 산이 없어 공허합니다. 서쪽으로는 형산강 건너편에 선도산과 낙동정맥이 있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터의 뒷쪽에 솟아올라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터의 정기를 보호해 주는 산을 현무라 합니다. 앞에서 보호해주는 산은 주작, 혹은 조안(조산과 안산)이라 부르며, 왼쪽에서 보호해주는 산은 청룡, 오른쪽에서 보호해주는 산은 백호라 부릅니다. 또, 이들 넷을 사신사라 부릅니다.
사신사는 가까이서 터의 기운을 보호해주는 게 좋으나, 평야지대 득수국의 명당들 중에는 사신사 전부 혹은 일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많습니다. 그런 곳은 나무를 심거나 건물을 지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보완하는 것을 비보라 부릅니다.
최부자댁이 교동으로 이거할 때, 향교의 위상에 흠이 생길까 염려한 유림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최언경 선생은 향교를 존중하여, 지붕의 높이를 향교보다 다섯 자 낮 춰 짓고, 집의 규모도 많이 줄이며, 또 향교에 쌀 천 석을 희사하기로 하여 유림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터를 닦을 때, 향교터보다 낮게 만들기 위해 많은 흙을 파냈는데 이 흙을 집터 뒤에 쌓아 둔덕을 만들고, 거기에 또 많은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습니다. 이 둔덕과 숲이 부실한 현무를 보완해 주었으니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또 서쪽에도 숲을 조성하여 부실한 백호를 보완했습니다.
그런데 최부자댁에서 조성한 숲 뒤에는 거대한 고분이 하나 있습니다. 길이가 80여 미터에 이르며, 폭은 넓은 데는 50미터가 넘고 좁은 데는 40미터가 넘습니다. 작은 동산처럼 큽니다.
최부자댁 집 뒤 숲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 고분이 숲과 함께 현무 역할을 해줍니다. 고분의 형태 또한 창고처럼 생긴 토성이라 큰 재복을 가져다 줍니다.
고분까지 이렇게 도움을 주니 덕을 쌓은 집안에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말이 더욱 실감납니다. 교동 최부자댁의 풍수입지와 후반기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