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알파고, 그리고 성과연봉제.’
얼핏 뜬금 없어 보일 수 있겠다. 이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가수 조영남씨는 최근 무명화가가 대신 그려준 그림을 전시하고 고가에 팔았다는 이유로 사기죄로 내몰리는 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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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조영남씨. |
송모씨는 10만 원 정도의 수고비를 받고 무려 200여 점이나 그림을 대신 그려줬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조씨의 반박은 다소 오락가락 한다. 하지만 대체로 송씨가 조수로서 자신의 창작활동을 도운 것이며 이는 또한 미술계의 관행일 뿐이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양측의 주장이 맞서고 있고 검찰이 조사 중인 사안에 왈가왈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조씨 편을 들 마음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노동이든 예술이든 인간의 모든 생산활동과 관련해 이번 사건을 보면 참 흥미로우면서도 판단하기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인공지능(AI)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 세기의 바둑대결을 벌였다. 이 9단은 알파고를 상대로 가까스로 한판을 이기는 데 그쳤다.
그런데도 이 9단은 마치 인공지능에 맞서는 전인류의 대표선수나 된 듯 단숨에 영웅대접을 받았다. 결과적 효율성만 놓고 보면 '4대1'. 이 9단의 완패였는데도 말이다.
다시 조영남씨 그림 얘기로 돌아와 보자. 예술작품의 기술적 완성도만 놓고 보면 조영남씨와 무명화가 송씨 가운데 누가 더 잘 그렸을까?
예술작품 평가를 승패가 분명한 바둑 대국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일은 물론 무의미한 일이다. 기술적으로 미국 유학파 전공자인 송씨의 실력이 비전공자인 조씨보다 더 낫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인공지능이 조만간 인간의 노동활동은 물론 창작활동까지 대체할 날이 머지않은 요즘이다. 인공지능이 인간활동의 최고도 활동이라 일컬어지는 소설 쓰기나 그림 그리기 같은 예술활동을 대체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런 상상도 가능할 법하다. 만약 조씨의 그림을 대신 그려준 이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었다면? 조씨 혹은 누군가가 컨셉트를 정한 뒤 프로그램을 통해 인공지능에 창작의도대로 표현하도록 지시해 작품을 생산해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이다.
그런 경우 저작권은 누구에게 속하게 될까? 상상해 보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 생겨날 듯하다.
예술활동뿐 아니라 인간 행위의 기본인 노동활동은 큰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단순한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측면도 비일비재하다.
과거처럼 육체노동에 뿌리를 둔 노동환경에서 개인의 성과는 ‘양’의 차이만으로도 얼마든지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환경이 더욱 복잡해지고 고도화할수록 개인에 대한 평가에도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한 현대산업사회에서 개인의 노동 생산성뿐 아니라 집단의 생산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천재 한명도 중요하지만 '집단지성'이 활용도가 훨씬 높을 때가 많다. 개인의 경쟁보다 협력이 더욱 중시돼야 한다는 얘기다.
최근 정부 당국이 공기업과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성과연봉제가 우려스러운 이유다.
연공서열에 따른 호봉제 대신 말 그대로 개인의 성과를 평가해 연봉을 주겠다는 취지 자체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드시 공정한 평가기준이 전제돼야 한다. 게임의 룰이 명확하지 않은 게임은 불공정한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그런데 공기업과 금융기관에서 과연 공정한 평가의 룰이 세워질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너무도 회의적이다.
두 분야 다 주인 없는 회사가 많다보니 ‘낙하산’ 인사관행이 끊이지 않는 곳들이다. 보수적 조직문화가 만연해 사기업보다 파벌의식도 강하다. 또 ‘상명하복’의 수직적 조직문화도 뿌리 뽑히지 않고 있는 곳이다. 소신은커녕 보신주의와 복지부동이 판을 친다는 지적도 하루이틀 나온 게 아니다.
정부당국은 성과연봉제 평가방안에 상급자뿐 아니라 팀원들간의 수평적 평가도 담겠다고 한다. 또 정량적 평가뿐 아니라 정성적 평가도 하겠다고 했다. 과연 공정하고 객관적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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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룡 금융위원장. |
오히려 위로는 잘 보이려 하고 옆자리에 앉은 동료보다 평가를 조금이라도 더 잘 받기 위해 서로 헐뜯기에 열을 올리지는 않을까? 상급자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히는 날엔 '저성과자'로 낙인 찍혀 연봉이 깎이고 종국에 쫓겨나는 일도 일어날 것이다.
성과연봉제는 기본적으로 생산적 효율성에 맞춰 개인들간의 무한경쟁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에 뿌리를 둔 제도다. 인간의 활동을 통해 생산해 내는 다양한 가치는 무시되거나 소홀한 것으로 취급된다. 또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의 노동환경에서 노동 공동체의 가치도 제대로 평가되기 어렵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24일 “성과주의 확산은 금융개혁 완수를 위해 금융공공기관의 무사안일과 보신주의를 타파하는 것인 만큼 일관된 원칙과 방향을 기초로 추진할 것”이라며 금융권 노조의 반대에도 금융권 성과연봉제 도입을 밀어붙일 뜻을 거듭 밝혔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성과연봉제에 강공 드라이브를 걸자 대상기관에서 무리수도 터져나온다.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는 산업은행은 직원들에게 동의서에 서명하도록 강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어찌 산업은행 뿐이겠는가.
맥킨지는 최근 성과연봉제에 해당하는 성과평가제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쓰며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협업이란 점을 강조했다.
“직원 성과평가라는 연례행사가 엉터리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성과관리 상대평가제가 평가에 시간만 잡아먹고,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동기를 부여하기보다 동기를 잃게 하고, 궁극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에 평가하는 관리자나 평가받는 직원 모두 공감하고 있다.”
성과연봉제 대신 다양한 노동활동과 환경에 맞춰 보상체계의 대안을 찾는 것이 옳다. 적어도 일방적 밀어붙이기가 아닌 광범위한 의견수렴 과정이라도 거쳐야 한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면 신중하게 복용해야 하는 법이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