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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돌 9단이 10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이세돌 9단 대 구글 딥마인드 '알파고'와 두번째 대국에서 패한 뒤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
이세돌 9단을 2005년 7월경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다. 한국기원 출입기자로 일할 때다.
이 9단은 당시 일본에서 열린 제18회 후지쓰배세계바둑대회에서 후배 최철한 9단을 꺾고 세번째 우승컵을 안았다.
이 9단은 후지쓰배 우승 직후 한국기원 인근의 한 음식점으로 출입기자들을 초청했다.
이 9단은 약관 22세의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 9단은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기자들에게 술을 따랐는데 그의 눈에서 승부사 특유의 날카로움과 패기를 봤다.
이 9단은 그 뒤 세계 바둑대회 우승컵을 18회나 들어올리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바둑스타로 성장했다.
올해 1월25일 한국기원 근처의 한 식당에서 이 9단을 다시 만났다.
연초에 이 9단은 몽백합배 준우승을 차지하고 국내에서는 1인자 박정환 9단을 상대로 명인전 우승컵을 따내는 등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이 9단은 ‘함께 밥을 먹은지 너무 오래됐다'며 전현직 출입기자는 물론이고 한국기원 직원, 바둑TV 관계자들까지 불렀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 9단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10여년 전과 비교해 부인과 자식이 생기고 나이도 먹었지만 몸에서 풍겨나오는 자신감은 예전과 그대로였다.
이 9단의 트레이드마크는 누가 뭐라 해도 승부사 특유의 날카로움과 패기, 그리고 자신감이다.
이런 모습이 때로는 지나쳐 ‘제멋대로다’ ‘독불장군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이 9단의 이런 모습까지도 받아들이는 팬들이 많다.
10일 ‘세기의 대결’로 불린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대결 2국이 끝난 후 미디어 인터뷰장에 나타난 이 9단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마치 큰 죄를 짓고 법정에 출두한 사람마냥 목소리는 떨렸고 힘이 없었다. 기자회견 중간중간 아랫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오랜 세월 이 9단을 지켜봤지만 이런 ‘어색한’ 모습을 기자는 처음 봤다.
세계바둑계를 호령해 온 이 9단이 두번이나 패하면서 떠안게 됐을 충격과 당혹감이 어느 정도일지 기자는 감히 짐작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더욱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다.
이 9단은 1국의 충격적인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듯 2국에서 초반부터 시간을 물쓰듯하며 신중하게 대국에 임했다.
1국에서 간간히 보여주었던 웃음기도 이날은 한차례도 나타나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TV화면으로만 봐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 9단은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는 와중에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뒤바뀌지 않았다.
감정의 흔들림도 없고, 실수에 자책하지도 않으며 체력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무서운’ 알파고와 이 9단과 대결은 애초 출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초당 수천번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한 중앙처리장치(CPU) 1200여개로 이뤄진 슈퍼컴퓨터 알파고를 너무 얕잡아 본 것일수도 있다.
이 9단이 이렇게까지 선전한 것이 오히려 기적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알파고를 만든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대결이 기계(컴퓨터)와 인류의 대결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한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이번 대결의 승자는 인류”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얘기로 이해한다.
모두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래서 이 9단에게 당부하고 싶다.
‘인류대표’로서 홀로 짊어졌던 그 무거운 부담감과 중압감일랑 모두 훨훨 날려버리고 정말 ‘즐기는’ 바둑을 두어 보라고 말이다.
이제 이 9단이 남은 대국을 모두 져서 5대0이 되든, 아니면 기적처럼 세판을 모두 이겨 3대 2가 되든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이 9단이 인터뷰에서 밝혔듯 이 9단이 설령 지더라도 바둑 자체가 안고 있는 아름다움이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지난 10년 넘게 바둑 하나로 우리를 즐겁게도, 때로는 눈물 흘리게도 만들어준 이 9단이 지금 이렇게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이번 대국 결과로 이 9단이 좌절하거나 상심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기에 이 9단은 아직 너무나 젊고, 우리 바둑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지 않는가. 알파고와 승부 그 자체가 이 9단의 도전이지 않는가. [비즈니스포스트 김재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