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기업 인텔이 기술혁신을 최우선 목표로 삼던 기존의 전략에서 벗어나 사업다각화에 속도를 내며 대대적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PC시대의 종말로 인텔이 그동안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던 반도체기술력을 더 이상 앞세우기 어려워지면서 신사업의 성과가 생존 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 인텔 기술우위 무너져
23일 인텔에 따르면 매년 여름 미국 본사에서 개최하던 ‘인텔 개발자포럼’ 행사가 올해부터는 열리지 않는다. 처음 행사를 연 지 20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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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신사업에 총력, 미래 생존 가능성 결정하는 시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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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인텔 CEO. |
인텔은 행사일정을 공지했다가 갑자기 취소한 배경을 놓고 “인텔의 사업구조가 진화하며 시대가 바뀐 데 따른 것”이라며 “그동안 참가했던 모두에게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인텔 개발자포럼은 매년 전 세계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엔지니어 등을 대상으로 인텔의 기술발전을 소개하는 행사다. 그동안 인텔은 대부분의 신제품을 개발자포럼에서 공개했다.
전자전문매체 엔가젯은 “개발자포럼의 폐지는 인텔이 PC 이후의 시대로 벗어나고 있다는 가장 뚜렷한 신호”라며 “글로벌 IT기업들의 흐름에 발맞춰 적극적인 변화를 추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텔은 PC용 프로세서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며 전자업계에서 막강한 주도권을 자랑했다. 글로벌 전자기업들은 매년 여름 공개되는 인텔의 새 반도체에 맞춰 연말에 신제품을 출시해왔다.
하지만 반도체 관련 최대 사업분야가 PC에서 스마트폰으로, 이제는 사물인터넷과 자동차 등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뚜렷해지며 인텔의 행사는 점점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인텔의 아성을 위협하는 시스템반도체기업이 늘며 시장 주도권이 변화한 것도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스마트폰에서 퀄컴이, 자율주행차에서 엔비디아가 앞서나가며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인텔은 매년 특정한 시기에 신제품을 공개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점점 늘어나는 경쟁기업들을 상대하기 어려운 환경을 맞았다. 기술발전의 주기도 점점 빨라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텔은 반도체 성능이 2년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을 앞세우며 기술혁신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PC 외 사업분야로 점점 중심을 옮기며 이를 따라잡기 어려워졌다.
인텔이 최근 수년동안 PC사업의 실적부진이 이어지자 사물인터넷과 자율주행기술로 영역을 확대한 것도 이런 변화에 기여했다. 신사업분야에서 반도체 구동성능보다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훨씬 중요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인텔은 PC의 구동성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반도체 설계능력에 압도적 우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여러 정보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인공지능기술에서는 인텔보다 엔비디아와 AMD 등 그래픽반도체기업이 확보한 병렬식 설계기술이 훨씬 활용성이 높다.
서버용 반도체와 자율주행반도체 등 주요 시스템반도체 신사업분야에는 모두 인공지능 형태의 기술이 적용된다. 결국 인텔의 기술우위가 PC시대의 종말과 함께 무너질 수도 있는 셈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인텔이 개발자회의를 폐지한 진짜 이유는 더 이상 경쟁기업에 비해 기술력을 앞세우기 어렵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신산업 발달로 반도체 기술력의 기준 자체가 달라지며 나타난 불가피한 변화”라고 분석했다.
◆ 신사업 성과 중요해져
인텔은 아직 대부분의 매출을 PC용 반도체에서 올리고 있다. 글로벌시장에서 PC 수요가 꾸준히 둔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장규모 자체가 다른 사업분야보다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인텔의 PC사업부는 전체매출의 56%, 서버사업부는 29%의 비중을 기록하며 대부분을 차지했다. 신사업분야를 담당하는 사물인터넷사업부의 비중은 4% 정도로 미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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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텔의 반도체 위탁생산라인. |
인텔은 신사업의 현재 성장속도로는 수년 안에 PC사업의 실적부진을 만회하기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해 기존의 기술경쟁력을 활용한 사업영역 다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해 하반기부터 계획돼있는 반도체 위탁생산사업 진출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위탁생산업체인 대만 TSMC의 시가총액은 최근 사상 처음으로 인텔을 뛰어넘었다. 블룸버그는 이를 놓고 “PC반도체의 몰락과 모바일반도체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인텔은 모바일반도체 진출에 실패한 뒤 스마트폰시장의 성장에 전혀 수혜를 입지 못했다. 하지만 뒤늦게 위탁생산 진출로 방향을 선회하며 사업다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텔은 삼성전자와 TSMC 등 주요 경쟁사보다 앞선 공정기술을 무기로 꺼내들었다. 후발주자로 사업에 뛰어들지만 기존의 공정기술력을 활용하면 충분히 격차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탁생산사업은 특성상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대규모 생산시설 확보를 통한 물량공세가 필수적이다. 규모의 경제효과를 통한 원가절감이 고객사 확보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텔은 이에 대응해 올해 7조 원 규모의 공장 증설계획을 내놓고 트럼프 정부와 신규공장 설립에 지원계획을 논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양산을 앞두고 있는 인텔의 3D낸드 사업도 마찬가지다. 인텔은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현지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설립하고 메모리반도체사업에 강력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인텔이 이런 신사업에서 그동안 거의 경험이 없다는 점이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하지만 이를 통해 실적을 반등하지 못하면 PC시장 위축에 따른 동반부진이 불가피해 성과가 절실하다.
인텔은 그동안 PC용 반도체를 독점한 효과로 높은 수익을 내며 사업다각화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업체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입장에 놓여 전략변화가 시급하다.
블룸버그는 “최고의 기업으로 남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빠르게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적응력이 결정한다”며 “인텔이 반도체분야 최고기업으로 남으려면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