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철 기자 dckim@businesspost.co.kr2025-07-25 15:46:51
확대축소
공유하기
[비즈니스포스트] 한미 관세협상이 미국의 '갑질'로 사실상 교착 상태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시한 종료를 앞두고 '더 많은 선물'을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인 탓이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 외교'가 초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도 발휘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에서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건물을 둘러보던 와중에 취재진과 만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보수공사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취재진을 만나 “우리는 일본의 상호관세율을 15%까지 낮춰줬다”며 “원래는 약 28%(25% 통보)였는데 그들이 돈을 내고 낮췄다(they bought it down)”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른 나라들도 돈을 내면 관세를 낮출 수 있냐'는 기자 질문에 “그렇다. 난 다른 나라도 돈을 내고 관세를 낮추는 것(buy it down)을 허용하겠다”고 대답했다. 미국과 관세협상을 벌이고 있는 다른 나라들을 향해 돈을 주고 ‘관세 인하’라는 결과물을 구매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볼 때 미국 정부가 그동안 우리 정부의 제안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게다가 미국은 협상 시한이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나라 '길들이기'에 나선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인 24일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의 ‘긴급한 일정’으로 만남이 취소됐다. 구 부총리는 출국 85분 전에 미국 재무부로부터 만날 수 없다는 이메일 통보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한미 재무·통상 수장의 '2+2 통상 협의' 일정도 다시 잡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협상을 벌이고 있어 일정 잡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베선트 장관은 오는 28일과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중국과 무역 회담을 벌일 것으로 예정돼 있다.
앞서 미국을 방문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갑작스러운 일정 취소로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지 못하고 전화 통화만 한 채 돌아왔다.
이재명 정부는 협상 시한 막판에 발생한 미일 관세협상 타결과 미국의 기류 변화 등을 예의주시하며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통령실은 이날 강훈식 비서실장 주재로 김용범 정책실장,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윤창렬 국무조정실장 등이 참석한 통상대책회의를 열어 현지에서 진행된 관세협상 내용을 공유하고 향후 대책과 전략을 논의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에 따르면 김정관 산자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미국 워싱턴DC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만나 1시간20분 정도 협상을 진행했다. 김 장관은 한미 제조업 협력을 강조하면서 관세 인하를 강하게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일본과의 관세협상에서 5500억 달러 투자라는 결과를 얻어낸 점을 토대로 우리나라에도 대규모 대미 투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이날 김 장관과 여 본부장을 만나기 전 CNBC 인터뷰에서 “한국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매우 매우 협상을 타결하고 싶어 하고 한국이 일본 합의를 읽을 때 한국의 입에서 욕설(expletives)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러트닉 장관은 “한국이 일본의 협상 타결을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할 수 있다”며 “한국과 일본은 서로 경계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우리 정부가 오는 8월1일까지 협상을 타결하려는 조급함을 활용해 일본과 비슷한 결과를 얻어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대통령도 14일부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잇달아 만나 대미 투자 계획 등을 논의했다. 각 기업들이 대미 투자를 얼마나 할 수 있는지 타진함으로써 대미 협상 카드를 가다듬은 것으로 풀이된다.
▲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가운데)이 2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DC 상무부 회의실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리기엔 여러 한계가 있다. 우선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은 미국에 이미 수 십조 원 단위의 투자를 약속하거나 집행한 상태라 새로운 대규모 투자에 나설 여력이 많지 않다.
여기에 경제 상황 불안정으로 실적이 떨어지면서 '실탄' 마련도 어려워지고 있다.
LG전자는 이날 올해 2분기 영업이익이 6394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6.6% 감소했다고 밝혔다. 앞서 삼성전자도 8일 발표한 2분기 영업이익이 4조6천억 원으로 1년 전과 비교해 55.94%나 줄었다. 현대차도 미국 관세 부과 여파로 2분기 영업이익(3조6016억원)이 전년 동기 대비 15%나 줄었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 정부가 자동차 관세 인하를 위해 대규모 대미 투자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블룸버그는 24일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국 정부가 일본의 전례를 따라 대규모 투자 기금 조성을 논의 중이라며 규모로 '4천억 달러'를 언급했다. 미국이 우리나라에 요구한 대미 투자 규모가 4천억 달러라는 것이다.
허준영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24일 YTN 뉴스ON에서 “일본의 작년 GDP(국내총생산)을 보면 4조2천억 달러 정도고 우리는 1조7천억 달러 정도로 경제규모는 2.5배 정도 차이”라며 “일본이 5500억 달러, 우리가 4천억 달러라고 해도 GDP로 보정하면 우리가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과 협상을 벌인 과정을 살펴보면 정부의 고민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의 24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일 상호관세를 1%포인트씩 내릴 때마다 일본 측에 '보상'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미국에 제안한 초기 투자 규모는 4천억 달러였는데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로 5500억 달러까지 늘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이 보잉 항공기와 미국산 농산물 구매 확대를 약속하며 5500억 달러로 협상을 마무리한 것처럼 한국도 더 많은 미국산 상품 구매 등을 요구받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의 대미 투자 규모 확대나 미국의 상품 구매 요구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고려할 때 결국 미국이 우리나라에 요구하고 있는 비관세 장벽 분야에서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시장 개방에 동의하는 나라에만 관세를 내리고 그러지 않으면 훨씬 더 높은 관세가 부과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김양희 대구대학교 경제금융통상학과 교수는 2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우리는 일본과 달리 이미 (미국에) 많이 투자를 한 것도 있고 미국이 한국의 비관세 장벽에 대해서만 유독 요구하는 게 많다”며 “우리로서는 투자가 쉽지 않다고 한다면 국내 비관세 장벽 문제에 대해 일본 사례를 잘 참고해 트럼프가 과시하기 좋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