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14일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몽헌 부회장을 그룹회장으로 승진시켜 정몽구 회장과 공동 그룹회장 체제를 구축했다. 재계 사상 전례가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
![현대그룹 분가의 서막]() |
|
▲ 왼쪽 정몽구 회장, 오른쪽 정몽헌 회장 |
현대그룹 측은 IMF시대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수출과 국외건설 국외투자 분야의 효율적 사업 추진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런 체제를 갖추게 됐다고 밝혔다.
정주영 명예회장 생존했던 당시의 현대그룹은 유교적이고 서열을 중시했다. 계동 현대그룹 본사의 경우 집무실만 봐도 정주영 명예회장은 15층, 정몽구 회장은 14층, 정몽헌 부회장은 1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식사 자리 배치에서도 서열을 뚜렷히 정했다.
그런데 정씨 가문의 '장자 우대 가풍'으로 볼 때 상상할 수 없는 인사가 이뤄진 것이다. 정 명예회장이 정 부회장을 그룹회장으로 전격 승진시키는 인사를 할 때 정몽구 회장은 김영삼 차기 대통령을 만나고 있었다. 물론 정주영 명예회장의 단독 결정이었다.
이날 인사는 이후 '왕자의 난'과 현대그룹의 분가를 촉진하는 시발점이 됐다. 2년 뒤인 2000년에는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의 총괄회장에 올랐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후계자로 정몽헌 회장을 지명한 것이다. 정몽구 회장은 이에 반발해 현대자동차를 분리해 독립했다.
그럼에도 현대의 적통은 정몽헌 회장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 뒤 형제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렸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사업을 의욕적으로 펼치던 정몽헌 회장은 '대북송금' 사건에 휘말려 검찰조사를 받던 중 2003년 8월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인인 현정은씨가 회장에 올라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이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정씨 집안은 그 누구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정은 회장 체제 아래에서 현대그룹은 날로 추락했다. 현대상선 등 주력 기업의 유동성 위기로 현대건설을 비롯해 2013년 말에는 현대증권까지 내놓았다.
반면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를 굴지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시켰다. 현대건설을 되찾고, 현대증권 인수의 유력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현대그룹의 '장자'로서 사실상 현대의 적통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