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반도체 생산에 사용되는 일부 핵심소재의 수출을 규제하면서 한국 반도체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그동안 메모리반도체 수요 부진과 공급과잉으로 발생한 재고를 대량으로 쌓아두고 있어 일본의 제재에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충분해 보인다.
▲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왼쪽)과 이석희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 |
일본 NHK는 5일 "일본 소재기업들이 한국에 반도체 소재 공급을 위한 절차를 준비하는 데 분주하다"며 "하지만 승인절차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최근 일본 기업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요한 일부 소재를 한국에 수출하려면 별도로 정부기관의 승인절차를 거쳐야 하는 새 규제를 도입했다.
외교적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한국 최대산업인 반도체를 압박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과 한국 반도체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메모리반도체 생산이 일본의 규제로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점은 가장 큰 위협요소로 꼽힌다.
박유악 키움증권 연구원은 일본 정부가 앞으로 메모리반도체 필수 소재인 반도체 웨이퍼(원판)와 블랭크마스크 등으로 수출규제를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고 바라봤다.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 위반이라고 반박하며 강경한 대응을 예고한 만큼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닛케이아시안리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확보하고 있는 반도체 소재는 1~2개월치 분량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일본 정부의 수출 승인에 3개월 정도가 걸리는 만큼 반도체 생산 중단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바라봤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악의 상황을 맞아 메모리반도체 생산을 일부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실제로 실적에 받을 타격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심각한 메모리반도체 수요 부진과 공급과잉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재고가 역사상 최고 수준에 이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유진투자증권에 따르면 1분기말 기준으로 삼성전자는 193일, SK하이닉스는 124일치에 이르는 반도체 재고를 쌓아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분기도 반도체 수요 부진이 지속된 만큼 현재 재고수준은 더욱 높아졌을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수개월 동안 반도체 생산을 중단한다고 극단적으로 가정해도 고객사에 공급하는 반도체 물량 확보에 차질을 빚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이다.
▲ 삼성전자의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
결국 일본의 소재 수출규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실제 악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쌓아두고 있는 대규모 메모리반도체 재고는 그동안 반도체업황 회복을 늦추고 가격 하락을 이끌어 실적에 악영향을 미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어 왔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재고가 이제는 일본의 무역규제 여파를 방어할 수 있는 방패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반도체 생산을 줄이고 재고를 축소해 반도체업황 회복을 이끄는 한편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재에 의존을 낮출 수 있는 '일석이조'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박 연구원은 "일본의 무역제재로 한국에 수입되는 반도체 소재 가격이 높아질 수도 있다"며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반도체 소재의 국산화에 더욱 속도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