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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임주연 기자  june@businesspost.co.kr  |  2017-03-14 08: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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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 생애

김기춘은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일어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박영수 특별검사에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박정희 정부의 태동 이래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을 거치며 법과 권력의 막후를 줄곧 지켜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2대에 걸쳐 권력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1939년 11월 25일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재학중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고 34세 때 육영수 여사 살해범인 문세광씨 담당검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

박정희 정부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국장과 청와대 법률비서관을 지냈고 노태우 정권에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유신헌법 마련과 공안정국 지휘, 탄핵 관련 원칙 수립 등 한국사회의 중요한 법률적 기틀을 만들고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신한국당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3선 의원을 지냈으며 17대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후보 경선 선거대책본부 법률자문위원장을 맡았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도운 대표적 원로그룹인 ‘7인회’ 소속으로 박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잘 아는 최측근으로 평가받았고 75세로 최고령 비서실장이 됐다.

김기춘은 박근혜 게이트의 주요사건들을 기획하고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문화계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보고를 받은 직무방해죄와 이의 집행을 압박한 강요죄, 국회청문회에서 위증죄 등으로 박영수 특별검사에게 기소돼 2017년 3월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강력한 조직 장악력과 꼼꼼한 일처리로 유명하다.

◆ 활동의 공과

△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 만에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 등 박근혜 정부의 인사마다 문제가 드러나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그러나 유신으로 회귀하는 것이냐는 말도 나왔다.

김기춘은 시계를 40여 년 전으로 되돌려 곳곳에서 박정희 시대를 재현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2017년 특검 수사에서 밝혀진 김기춘의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세월호 기록 은폐시도도 권력에 비판적인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던 유신시대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김기춘 만큼 든든한 비서실장이 없었을 법하다는 관측이 나왔다. 박 대통령에게 김기춘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준 사람'이었다. 김기춘이 검사시절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수사해 저격범 문세광씨를 사형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은 ‘주군과 신하’의 관계에 가까웠다. 실제로 2017년 1월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은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이 같이 없어도 '주군'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으며, '하명'이라는 단어도 쓰더라. 충격이었다"고 밝혔다.

△ 이명박 정부, 친박계 인사로 와신상담
김기춘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 2007년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17대 대선 경선캠프에 법률지원단장을 맡았다.

2008년에 출범한 이명박 정권에서 김기춘은 나이(70세)가 많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 출마도 포기했다.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의 ‘친박 대숙청’ 대상에 속했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2009년에 비영리 공익법인인 한국에너지재단의 이사장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 정체기에 놓인 것으로 보였다. 2009년 10월에 미공개 회고록인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날인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 노무현 정부의 저격수
김기춘은 노무현 정부에서 한나라당의 원로의원으로 저격수 역할을 했다. 김기춘은 참여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을 놓고 “자기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는 사이코”라고 비난했다.

김기춘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김기춘은 한나라당 등의 막강한 지지를 등에 업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장을 맡았다.

김기춘이 헌법재판소에 소추안을 제출함으로써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시작됐다.

△ 김영삼 정부, 김기춘의 정치인 입문
김기춘은 19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정치인생이 끝날 뻔 했으나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3년에 위헌제청을 내 ‘공소취소’를 받으며 부활했다.

김기춘이 정치인으로 본격적으로 첫발을 내딛은 것이 바로 이때다. 김기춘은 김영삼 대통령의 당이었던 민자당 국책자문위원으로 위촉됐고 1996년에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4년까지 연달아 당선돼 3선 의원이 됐다.

△ 고위 법조관직 승승가도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1985년에 검찰총장이 됐다. 김기춘은 검찰총장 재직 시절 1990년에 ‘5·16 민족상(안전보장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기춘은 5공 시절의 '소외된 자'로 평가됐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의 ‘5공비리 청산'을 지휘할 적임자로 여겨졌다. 김기춘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5공 인사 49명을 구속했고 법무부장관으로 승진했다.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의 공안정국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장본인이다. 공안정국이란 용어는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보수적 지배체제로 돌아가기 위해 조성한 강압적 정치국면의 의미로 처음 쓰인 고유명사였다. 이후에는 반공주의로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됐다.

노태우 정부에서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들은 독자적인 통일논의에 적극 나섰다.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임수경 당시 외국어대 학생의 방북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탄압은 91년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수사로 정점을 이루었는데 김기춘은 당시 법무부장관으로서 공안정국을 이끌어갔다.

△ 전두환 정부와 힘겨운 자리보전
김기춘은 10.26 몇달 전에 신직수 대통령 법률특보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 법률비서관에 앉았다. 이에 따라 운좋게 화를 면하고 이후 검찰로 복귀해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에서 입지는 예전같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뒤 첫 검찰인사에서 허화평 대통령보좌관은 김기춘 공안부장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도록 해 해임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기춘은 박철언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구명을 요청했고 허화평 보좌관에게도 절절한 내용의 편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김기춘은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으로 발령났다.

김기춘은 그 뒤 이철희-장영자 사건에서 ‘이철희에게 초점을 맞춰 수사한 것은 대통령 지시 때문’이라고 국회에서 보고했다가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을 뻔 했다. 하지만 박철언씨가 또 도와준 덕에 법무연수원 연수부장으로 발령이 났고 이후 대구지검장에 올랐다.

△ 박정희 정부의 법률봉사
박정희 대통령은 거침없고 충성스런 김기춘을 아꼈다. 김기춘은 '주군'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해 유신의 기틀을 놓고 유신의 통치방식들을 만들어냈다.

김기춘과 박정희 정부의 인연은 김기춘이 대학원 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기춘은 해군 법무관 훈련 중에 5·16 군사정변을 맞았고 이후 ‘5·16장학금’(정수장학금)으로 학비 걱정없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문세광씨의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을 맡아 문세광씨의 자백과 이에 따른 사형선고를 이끌어냈고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김기춘 등에게 유신헌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김기춘은 유신헙법 관련 외국자료를 연구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11. 21)해 유신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실상 종신 대통령제의 시작이었다.

김기춘은 1974년에 중앙정보부에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중앙정보부는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씨의 비리를 조사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당시 여학생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모함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0.26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인 김재규씨였다.

김기춘은 박정희 정부 내내 충실한 법률적 해결사였다.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박정희 정부를 위해 재일교포 간첩사건을 수사했다. 2010년 국가기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작된 사건으로 결론냈고 피해자들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 비전과 과제

김기춘은 문화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는 인사들 명단인 블랙리스트를 기획하고 작성관리를 지시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와 강요죄 등으로 2017년 3월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김기춘은 김기수 법무법인 영진 대표 변호사를 비롯해 법원장 출신 김경종 변호사, 헌법재판관 출신의 법무법인 신촌 소속 김문희 변호사, 검찰 출신인 케이씨엘 정동욱 변호사 등 검찰간부와 고위법관을 지낸 전관 변호사들로 총 11명의 변호인단을 꾸렸다.

이들은 김기춘이 “특검수사대상이 아니다”는 점, “최순실을 모른다고 일관되게 밝히고있다"는 점 등을 들어 수사요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또 “(특검이 작성한)공소장의 범죄사실은 김 전 실장의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된다는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노태우 정부 당시 검찰총장을 맡았던 김기춘.

◆ 평가

김기춘은 현장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노련한 법조인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고 유신회귀와 권위주의 인사의 대표 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김기춘에 대해 사법부까지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공작정치의 부두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아 유신헌법의 법적 기틀을 마련했고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등 여러 공안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공안정국을 이끌고 유지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의 한 가운데 있었던 셈이다.

김기춘은 평검사부터 검찰총장, 법무장관, 비서실장에 이르기까지 권력지향적인 행보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기춘 실장은 “드물게도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높이 들었다.

김기춘은 비서실장 시절에 정부부처와 국회를 장악하고 여야 정치권과 창구역할을 도맡아 청와대 중심의 국정운영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이 당시 ‘기춘대원군’이나 ‘왕실장’이란 호칭이 붙었다.

김기춘의 성격은 충성스럽고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갖췄다고 알려졌다. 만사가 정확하고 꼼꼼한 편으로 유머감각도 있다고 한다.

주위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다. 집무실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70세에 이뤄졌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성당 벽화를 90세에 완성했으며, 괴테는 파우스트를 82세에 마쳤다’는 영어 문구를 걸어 놓았다.

잠시 자리에서 물러나 할 일이 없을 때도 옷을 다 차려입고 부인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넨 뒤 2층 서재로 올라가 독서, 글쓰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김똘똘’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적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청와대 참모들이 박 대통령에게 보낸 각오의 글에 ‘멸사봉공(滅私奉公·나를 버리고 공을 위해 일함)’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침)’라고 썼다.

◆ 사건 사고

△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김기춘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소영 전 청와대 교육문화체육비서관 등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박영수 특별검사에게 기소돼 2017년 3월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문화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는 인사들의 명단을 기획하고 작성해 관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출판문화진흥원 등에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의 지원을 배제하도록 강요한 혐의도 받는다.

김기춘의 공소장에는 일부 문화체육부 인사들에게 사직을 강요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와 강요죄, 국회에서 위증죄도 더해졌다.

△ 세월호 기록 은폐지시
2017년 1월 JTBC '뉴스룸'은 "김기춘이 세월호 참사 당일 'VIP(박 대통령)'의 기록물을 비공개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2014년 7월 17일 김기춘의 이런 지시가 적혀있었다.

김기춘의 지시대로 세월호 당일 기록이 지정기록물로 결정됐으면 최대 30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 외에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국회 3분의 2의 동의나 고등법원의 영장이 있어야만 열람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현재 황교안 권한대행은 지정기록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세월호 기록이 은폐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최순실 모른다’ 진술 번복
김기춘이 국정농단의 주역 최순실씨를 안다는 사실은 '정윤회 문건'(VIP측근인 정윤회 동향 감찰 보고서) 덕에 드러났다. 정윤회씨의 아내는 최순실씨였다.

김기춘은 2016년 12월7일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 출석했다. 김기춘은 최순실씨를 몰랐다고 주장했다가 '정윤회 문건'에 최씨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서야 "착각했다"며 진술을 바꿨다.

△ 김기춘-구원파, 오대양 사건과 세월호
김기춘은 1991년 법무부 장관을 맡고 있을 당시 ‘오대양 사건’의 재수사를 맡는 담당검사를 교체했다. 이는 이례적인 일로 평가돼 오대양 사건과 김기춘의 관계를 두고 의혹이 무성했다.

오대양 사건은 오대양 대표였던 박순자씨가 썼던 사채를 둘러싸고 다수의 주검이 발견된 사건이다. 오대양의 공장에서 32명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일각에서는 사채업자의 난동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봤지만 김기춘이 교체한 검사는 ‘집단자살’이라고 결론내렸다.

오대양 사채는 행방이 묘연했는데 일부는 구원파로 흘러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20여년이 흐른 후 2014년에 세월호 사건의 책임이 해운회사를 운영했던 구원파에 있다는 '구원파 책임론'이 대두되자 구원파는 그들의 건물에 ‘우리가 남이가’, ‘김기춘 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김기춘이 구원파를 비호하다가 버렸다는 의미’라는 말이 나왔다.

△ 정윤회 문건 사건
2014년 12월 세계일보 등은 비선실세 정윤회씨를 비롯한 박근혜 대통령 측근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며 국정에 개입하며 회동했는데 여기에서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설이 논의됐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보도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이후 안대희 신임총리 후보자가 낙마하는 등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문제에 실패를 거듭했는데 김기춘의 인사검증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2014년 12월 동아일보는 김기춘이 정윤회씨의 동향문건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고 김기춘은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다.

2015년 1월 검찰은 정윤회 문건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결론내렸는데 이에 앞서 2014년 12월 김기춘이 정윤회문건에 대해 '문건 유출사건-조기 종결토록 지도'라고 언급했다는 내용이 2016년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에서 발견됐다. 이에 따라 김기춘은 당시 청와대가 검찰과 수사 축소를 협의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 아들의 사고
아들 김성원씨가 2013년 말 불의의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의 이후 근황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2016년 8월22일 김기춘은 아들의 성년후견 개시를 서울가정법원에 신청했다. 성년후견제도는 의사 결정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법원이 후견인을 지정해 각종 법률행위를 대신하도록 허락하는 제도다.

△ 김기춘-성완종, 성완종리스트 사건
김기춘은 2009년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미화 1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성완종 전 회장이 적은 메모인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김기춘 이름도 있다고 성 전 회장이 언론에 알렸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의혹을 받고 일주일 뒤에 일본으로 출국해 정말 돈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돈의 액수와 날짜, 장소까지 메모에 적힌 사람은 김기춘이 유일했다. 이후에 김기춘은 관련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주도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던 김기춘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장을 맡았다. 김기춘이 헌법재판소에 소추안을 제출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시작됐다.

발단은 노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특정 정당을 지지한 선거법 위반 발언이었다. 이를 두고 김기춘은 "대통령이 감정조절 못하고 자제력이 없으며 ?휘하를 잘 감독하지 못해 국법을 위반하거나 불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면 마땅히 탄핵을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노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하면서도 파면할 만큼의 중대한 사안은 아니라고 보고 탄핵안을 기각했다.

△ 초원복집 사건
초원복집 사건은 제 14대 대통령선거를 3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이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등과 함께 부산에 있는 초원복집 식당에서 대선 관련 대책회의를 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정주영 국민당 후보,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하자는 의논을 했다.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을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만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기소했다. 그러나 김기춘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 법원에 위헌제청을 냈으며 1994년 여름 헌법재판소는 위헌결정을 내렸다.

△ 유서대필사건
김기춘이 법무부장관 시절 수사를 총지휘했던 공안정국 대표적인 진보세력 탄압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들은 통일논의를 민주화운동의 주요 이슈로 내세웠다. 이런 진보세력을 두고 전방위적으로 탄압이 이루어지던 91년 5월, 전민련(전국민주운동연합) 간부였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검찰은 역시 전민련 간부였던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재야단체는 정권과 검찰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으나 강기훈씨는 결국 3년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94년 만기출소했다. 2001년 김기설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 재일교포유학생 간첩조작 사건
1975년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등에 재학 중이던 16명의 학생이 간첩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던 김기춘은 수사를 진두지휘했으며 결국 '북괴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국내 대학에 침투해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2010년 국가기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2014년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았다.

△ 육영수 피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씨가 축사를 읽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제 38구경 권총으로 총 5발을 발사했는데 이에 맞아 육영수가 숨졌다.

문세광씨는 현장에서 검거됐는데 김기춘이 지휘하던 수사당국은 문세광의 배후로 조총련과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을 지목하며 이는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8월 24일 문세광씨는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돼 검사 김기춘의 수사를 받았고 내란목적 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죄목으로 기소돼 12월 20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 김기춘(왼쪽)과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씨.

◆ 경력

1960년 대학 3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3년~1964년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했다.

1991년~1997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지냈다.

1965년 광주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8월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났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실무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핵심조항이 담긴 유신헌법 초안작업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3년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으로 특진했다. 곧이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1974년부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 중앙정보부장 비서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공안통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74년 담당검사로 육영수 저격 사건을 맡았다. 범인인 문세광씨의 자백을 받는 등 이 사건 수사에서 세운 공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1979년 청와대 법률 비서관을 지냈다. 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법무부의 출입국관리국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하에서 검찰총장이 됐다. 1990년 2년 임기를 마치고 총장에서 물러났다.

1991년 법무부 장관이 됐다.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수사를 총지휘했다.

1993년 김기춘법률사무소를 개소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심판 때 검사 역할을 했다.

2008년 국회의원 공천에서 떨어졌다. 2009년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 제3대 이사장으로 재선임됐다. 2013년 7월부터 8월까지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2013년 8월5일 교체된 허태열 비서실장 후임으로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2015년 2월17일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2016년 9월1일 농심 비상임법률고문에 위촉됐다. 2016년 11월24일 박근혜게이트 파문과 관련해 고문자리에서 물러났다.

◆ 학력

1958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석사과정을 밟았다.

198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서울법대 동기동창의 동생이자 박찬일 변호사의 딸인 박화자씨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김성원씨는 의사고 첫째 사위는 변호사이며, 둘째 사위는 대통령직인수위 고용복지분과 위원으로 활동한 안상훈 서울대 교수다.

◆ 어록

"그 문건(정윤회 문건)에도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안 나온다. 정윤회라는 이름만 나온다. (박영선 위원이 정윤회 문건을 공개하고 첫째 장에 최씨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점이 드러나자) 착각을 했다. (박 의원이 김 전 비서실장이 2004년 한나라당 법률자문위원장을 역임할 당시 후보 검증 청문회 영상을 틀자) 죄송하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이제 최씨의 이름을 못 들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지만 최씨와 접촉은 없었다. 최씨를 모른다는 것은 아는 사이 즉 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씨에게도 물어보라. 최근에 최씨의 이름을 알았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오늘 자료를 보니 오래 전에 최씨의 이름은 알았지만 정말 최씨와는 아는 사이가 아니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불출석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저도 사실 고령이고 저도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다. 제 심장에 스텐트도 7개 박혔고 어젯밤에도 통증이 와서 입원할까 했지만 국회의 권위와 국회가 부르는 건 국민이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힘든 몸을 이끌고 나왔다. 국회가 부르면 당연히 와서 진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법률 미꾸라지'라는 비판에 대해)제가 부덕한 소치다. 국민에게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한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이 그날(세월호 침몰 당일) 청와대에 계셨다고만 알고 있다. (머리손질과 관련) 알지 못했다. 대통령 관저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른다. 제게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고 몇 시에 일어나시고 머리를 언제 하고는 저는 모른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그건 완전한 루머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없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박근혜 대통령께서 차은택이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보라 해서 공관으로 불러 만났다. 대통령이 직접 면담을 안 하시고 한 번 면담해서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이런 걸 보고하라 해서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났다. 차 씨와 10분간 차를 마셨을 뿐 차 씨의 사업에 관여한 바 없다. 언젠가 검찰이 부르면 가서 사실대로 말하겠다." (2016/11/27,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김종 전 차관의 진술에 대해)그렇게 진술했다면 정말 허위진술이다. 최씨를 알아야 소개를 하지 모르는데 어떻게 소개를 하느냐. 박정희 대통령 때 중앙정보부에서 대공수사국장을 했다. 간첩 수사를 하는 곳으로 국내 수사나 조사는 다른 국에서 했다. 최태민에 대한 정보부 조사는 우리 국에서 한 일이 아니다. 오늘 현재까지 최순실이라는 사람하고 연락하거나 접촉한 일이 없다." (2016/11/22,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저는 비서실장 하면서 그 사람이 여러 가지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런 점에서 자괴감이 들 정도. 나는 공식적인 일만 했고, 관저나 대통령 측근 비서들이 저에게 귀띔을 안 해줬기 때문에 저는 모르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무능하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몰랐다." (2016/11/22, 한 매체와인터뷰에서)

"(최순실 사태 수습대책에 관여하고 있다는 야권의 의혹 제기에) 관여하는 것이 없다. (본인이 최 씨 입국을 기획했다는 일각의 의혹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2016/11/02,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현재 시국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비서실장 당시 최순실 씨 관련 보고를 받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보고받은 일이 없고, 최씨를 알지 못한다. 만난 일도 통화한 일도 없다" (2016/11/02,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2013년 11월6일 오후 6시30분에 성 전 회장을 비롯해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 등 충청도 의원 5명과 저녁을 먹었다. 혼자 만난 것도 아니고 동료 의원들과 함께 만났던 것으로 개인적인 부탁이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2015/04/16,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성완종 리스트 관련)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 아시다시피 (퇴임 후) 언론에 나서는 것을 자제해왔지만 이 사건은 너무 억울하기 때문에 언론의 질문에 그동안 성실히 답해왔다.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든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당당히 협조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제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15/04/13,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맹세코 그런 일이 없다. 그분이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맹세코 저는 그런 일이 없고, 사람이 돌아가셨으니까 고인의 명복을 빌겠지만은 저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2015/04/10, 고 성완종 경남기업 전 회장이 1억 원을 건넨 사실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두고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제가 감히…잘 모시려고 마음을 다해…그 자체가 나라 생각밖에 없는 분이다." (2015/02/22, 사표 수리 직전,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박영옥 씨의 빈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떤 분이냐고 묻는 질문에)

"박근혜 정부는 소위 비선을 활용하는 일이 결단코 없다. 비선 실세 운운하는데 '잃어버릴 실(失)'의 실세가 있을지 몰라도 '열매 실(實)'자 실세는 없다." (2015/01/09,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결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제 소임이 끝나는 날 언제든 물러날 마음 자세를 갖고 있다. ('정윤회 문건' 유출자를 회유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 사의를 표명한 김영한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해) 사표를 받고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겠다."(2015/01/09,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자성하고 있다. 문건유출사건으로 인해 국민 여러분과 위원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참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근무자세와 기강을 철저하게 바로 잡도록 하겠다. 저를 비롯한 비서실 전 직원은 결연한 마음으로 심기일전해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정운영을 지원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하겠다." (2015/01/09,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 앞서 미리 배포한 모두발언에서)

"돌이켜보면 우리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불충(不忠)한 일들이 있어 위로는 대통령님께 나아가서는 국민과 나라에 많은 걱정을 끼친 일들이 있다. 금년에는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이곳에 일한다는 영광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있다는 이기심,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2015/01/02, 청와대 비서실 시무식에서)

"4월16일 대통령께선 외부 행사가 없었으므로 줄곧 청와대 경내에 계셨다. 유선보고와 문서보고로도 충분히 보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국가안보실장과는 통화한 사실이 있다. 긴박한 상황 하에서는 문서와 전화보고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 대통령께선 가족이 없으므로 기침해 취침할 때까지 경호관과 비서관이 언제나 근접수행한다. 경호 필요성 때문에 위치와 동선은 비밀로 돼 있어 말할 수 없다. 안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경호 비밀 때문에 말할 수 없다." (2014/08/17,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대통령 전용 헬스장은 없고 대통령 혼자만 사용하는 개인장비도 없다." (2014/11/06,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체력 관리를 위해 유명 헬스 트레이너를 채용하고 고가의 헬스기구를 구입했다는 주장에)

"누구든 명예를 침해받으면 법의 효력을 받을 수 있다. 언론 출판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허위사실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침해할 자유는 없다. " (2014/11/06,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에 대한 검찰 기소와 관련해)

"공무원이 헌신적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알지만 워낙 국가재정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무원도 이해하고 고통 분담에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개혁은 지금 하지 않으면 우리 후손에, 다음 정부에 엄청난 부담이 되고 연금제도를 계속할 수 있는가 문제가 있다." (2014/10/28,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공무원연금개혁과 관련해)

"사실을 확인하지 못해 죄송하다. 비선개입은 없다." (2014/10/28,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비선라인의 인사 개입설에 대해)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의하면 재난의 최종 지휘본부는 안행부(안전행정부) 장관이 본부장이 되는 중앙재난대책본부장이다." (2014/07/10, 세월호 참사의 컨트롤타워 논란과 관련해)

"피해 규모와 사회적 파장이 워낙 크고 깊어서 비서실은 사고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수석비서관 회의를 개최해 후속 조치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책임자에 대해서는 강력한 수사가 이뤄지고 있고, 사고 발생원인 규명 작업도 투명하고 철저하게 진행 중이다." (2014/07/07,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실장이 의원들과 밥도 못 먹는가. 소통과 친교를 하고 건의사항도 듣는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식사할 수 있다" (2014/03/07, 식사정치에 대한 논란에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전한 말)

"지금은 경제회복의 불씨를 살려서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도모해야 하고, 엄중한 안보환경 속에서 국가안보를 공고히 지켜나가야 하는 중대한 시기다. 내각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이 힘을 모아 국정을 수행해야 할 때다. 박 대통령은 전혀 개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2014/01/02, 개각설과 관련해 춘추관 기자회견에서)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차밍(매력적)하고 디그니티(위엄) 있고 엘레강스(우아)하다” (2013년 청와대 기자단 송년회에서)

“(대통령이) 어디서나 보고 받고 지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대통령 계시는 곳이 바로 대통령 집무실이다. 비서실장이나 저희 직원들은 집에서 사무실로 출근하지만, 대통령께서 아침에 일어나시면 그것이 출근이고 주무시면 그것이 퇴근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근무하고 계신다.”(2013년 국정감사에서)

“(노 대통령은) 사이코다. 자기감정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다. 그러니 나라가 이 꼬라지” (2006/ 12/ 한나라당 의원총회 자리에서)

“몸을 파는 여성은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들을 구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단속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2004/10/12, 경북지방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성매매특별법 제정과 관련)

“현 정권은 공산당이 합법화돼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하고 인공기를 훼손했다고 북측에 사죄하고 친북활동가를 민주인사로 둔갑시키는 등 친북적이고 좌파적인 정권” “노 대통령은 더 이상 나라와 국민을 혼란과 불안에 몰아넣지 말고 하야해야 한다.”(국회 법사위원장 시절인 2003/10,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대공 수사 기능은 남북 화해와 협력이 이뤄지는 요즘 더 필요하다.”(2000년 국정감사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모두 영도다리에 빠져죽자.” (1992년 초원복집에서 대선을 앞두고 지역 유력인사들과 자리에서)

“더 많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피의자의 변호인 접견권에 일시적 제한·금지가 필요하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검찰총장이던 1989년 기자회견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하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확정을 보게 됐다.”(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됐을 때 대검찰청이 발행한 '검찰' 48호에 '유신헌법 해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 활동의 공과

△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 만에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 등 박근혜 정부의 인사마다 문제가 드러나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이 됐다. 그러나 유신으로 회귀하는 것이냐는 말도 나왔다.

김기춘은 시계를 40여 년 전으로 되돌려 곳곳에서 박정희 시대를 재현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2017년 특검 수사에서 밝혀진 김기춘의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세월호 기록 은폐시도도 권력에 비판적인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던 유신시대의 산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김기춘 만큼 든든한 비서실장이 없었을 법하다는 관측이 나왔다. 박 대통령에게 김기춘은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준 사람'이었다. 김기춘이 검사시절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수사해 저격범 문세광씨를 사형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은 ‘주군과 신하’의 관계에 가까웠다. 실제로 2017년 1월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은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이 같이 없어도 '주군'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으며, '하명'이라는 단어도 쓰더라. 충격이었다"고 밝혔다.

△ 이명박 정부, 친박계 인사로 와신상담
김기춘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전 2007년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17대 대선 경선캠프에 법률지원단장을 맡았다.

2008년에 출범한 이명박 정권에서 김기춘은 나이(70세)가 많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 출마도 포기했다.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의 ‘친박 대숙청’ 대상에 속했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2009년에 비영리 공익법인인 한국에너지재단의 이사장이 되면서 정치인으로서 정체기에 놓인 것으로 보였다. 2009년 10월에 미공개 회고록인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날인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 노무현 정부의 저격수
김기춘은 노무현 정부에서 한나라당의 원로의원으로 저격수 역할을 했다. 김기춘은 참여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을 놓고 “자기 감정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는 사이코”라고 비난했다.

김기춘은 국회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김기춘은 한나라당 등의 막강한 지지를 등에 업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장을 맡았다.

김기춘이 헌법재판소에 소추안을 제출함으로써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시작됐다.

△ 김영삼 정부, 김기춘의 정치인 입문
김기춘은 19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정치인생이 끝날 뻔 했으나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3년에 위헌제청을 내 ‘공소취소’를 받으며 부활했다.

김기춘이 정치인으로 본격적으로 첫발을 내딛은 것이 바로 이때다. 김기춘은 김영삼 대통령의 당이었던 민자당 국책자문위원으로 위촉됐고 1996년에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4년까지 연달아 당선돼 3선 의원이 됐다.

△ 고위 법조관직 승승가도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1985년에 검찰총장이 됐다. 김기춘은 검찰총장 재직 시절 1990년에 ‘5·16 민족상(안전보장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기춘은 5공 시절의 '소외된 자'로 평가됐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의 ‘5공비리 청산'을 지휘할 적임자로 여겨졌다. 김기춘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5공 인사 49명을 구속했고 법무부장관으로 승진했다.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의 공안정국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장본인이다. 공안정국이란 용어는 1989년 노태우 정부가 보수적 지배체제로 돌아가기 위해 조성한 강압적 정치국면의 의미로 처음 쓰인 고유명사였다. 이후에는 반공주의로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됐다.

노태우 정부에서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들은 독자적인 통일논의에 적극 나섰다.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임수경 당시 외국어대 학생의 방북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탄압은 91년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수사로 정점을 이루었는데 김기춘은 당시 법무부장관으로서 공안정국을 이끌어갔다.

△ 전두환 정부와 힘겨운 자리보전
김기춘은 10.26 몇달 전에 신직수 대통령 법률특보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 법률비서관에 앉았다. 이에 따라 운좋게 화를 면하고 이후 검찰로 복귀해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에서 입지는 예전같지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뒤 첫 검찰인사에서 허화평 대통령보좌관은 김기춘 공안부장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하도록 해 해임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기춘은 박철언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구명을 요청했고 허화평 보좌관에게도 절절한 내용의 편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김기춘은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으로 발령났다.

김기춘은 그 뒤 이철희-장영자 사건에서 ‘이철희에게 초점을 맞춰 수사한 것은 대통령 지시 때문’이라고 국회에서 보고했다가 다시 한 번 위기를 맞을 뻔 했다. 하지만 박철언씨가 또 도와준 덕에 법무연수원 연수부장으로 발령이 났고 이후 대구지검장에 올랐다.

△ 박정희 정부의 법률봉사
박정희 대통령은 거침없고 충성스런 김기춘을 아꼈다. 김기춘은 '주군'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해 유신의 기틀을 놓고 유신의 통치방식들을 만들어냈다.

김기춘과 박정희 정부의 인연은 김기춘이 대학원 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기춘은 해군 법무관 훈련 중에 5·16 군사정변을 맞았고 이후 ‘5·16장학금’(정수장학금)으로 학비 걱정없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문세광씨의 육영수여사 저격사건을 맡아 문세광씨의 자백과 이에 따른 사형선고를 이끌어냈고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를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김기춘 등에게 유신헌법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김기춘은 유신헙법 관련 외국자료를 연구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11. 21)해 유신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실상 종신 대통령제의 시작이었다.

김기춘은 1974년에 중앙정보부에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중앙정보부는 최순실의 아버지인 최태민씨의 비리를 조사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당시 여학생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모함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0.26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인 김재규씨였다.

김기춘은 박정희 정부 내내 충실한 법률적 해결사였다.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박정희 정부를 위해 재일교포 간첩사건을 수사했다. 2010년 국가기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작된 사건으로 결론냈고 피해자들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 비전과 과제

김기춘은 문화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는 인사들 명단인 블랙리스트를 기획하고 작성관리를 지시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와 강요죄 등으로 2017년 3월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김기춘은 김기수 법무법인 영진 대표 변호사를 비롯해 법원장 출신 김경종 변호사, 헌법재판관 출신의 법무법인 신촌 소속 김문희 변호사, 검찰 출신인 케이씨엘 정동욱 변호사 등 검찰간부와 고위법관을 지낸 전관 변호사들로 총 11명의 변호인단을 꾸렸다.

이들은 김기춘이 “특검수사대상이 아니다”는 점, “최순실을 모른다고 일관되게 밝히고있다"는 점 등을 들어 수사요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또 “(특검이 작성한)공소장의 범죄사실은 김 전 실장의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된다는 것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노태우 정부 당시 검찰총장을 맡았던 김기춘.


◆ 평가

김기춘은 현장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노련한 법조인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고 유신회귀와 권위주의 인사의 대표 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김기춘에 대해 사법부까지 이용해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공작정치의 부두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을 받아 유신헌법의 법적 기틀을 마련했고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 등 여러 공안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공안정국을 이끌고 유지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의 한 가운데 있었던 셈이다.

김기춘은 평검사부터 검찰총장, 법무장관, 비서실장에 이르기까지 권력지향적인 행보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김기춘 실장은 “드물게도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높이 들었다.

김기춘은 비서실장 시절에 정부부처와 국회를 장악하고 여야 정치권과 창구역할을 도맡아 청와대 중심의 국정운영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이 당시 ‘기춘대원군’이나 ‘왕실장’이란 호칭이 붙었다.

김기춘의 성격은 충성스럽고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갖췄다고 알려졌다. 만사가 정확하고 꼼꼼한 편으로 유머감각도 있다고 한다.

주위에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을 만큼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하다. 집무실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70세에 이뤄졌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성당 벽화를 90세에 완성했으며, 괴테는 파우스트를 82세에 마쳤다’는 영어 문구를 걸어 놓았다.

잠시 자리에서 물러나 할 일이 없을 때도 옷을 다 차려입고 부인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넨 뒤 2층 서재로 올라가 독서, 글쓰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김똘똘’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적도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청와대 참모들이 박 대통령에게 보낸 각오의 글에 ‘멸사봉공(滅私奉公·나를 버리고 공을 위해 일함)’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침)’라고 썼다.

◆ 사건 사고

△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김기춘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소영 전 청와대 교육문화체육비서관 등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박영수 특별검사에게 기소돼 2017년 3월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이들은 문화계에서 정부의 지원을 배제하는 인사들의 명단을 기획하고 작성해 관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출판문화진흥원 등에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의 지원을 배제하도록 강요한 혐의도 받는다.

김기춘의 공소장에는 일부 문화체육부 인사들에게 사직을 강요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와 강요죄, 국회에서 위증죄도 더해졌다.

△ 세월호 기록 은폐지시
2017년 1월 JTBC '뉴스룸'은 "김기춘이 세월호 참사 당일 'VIP(박 대통령)'의 기록물을 비공개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2014년 7월 17일 김기춘의 이런 지시가 적혀있었다.

김기춘의 지시대로 세월호 당일 기록이 지정기록물로 결정됐으면 최대 30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 외에 아무도 볼 수 없었다. 국회 3분의 2의 동의나 고등법원의 영장이 있어야만 열람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현재 황교안 권한대행은 지정기록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세월호 기록이 은폐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최순실 모른다’ 진술 번복
김기춘이 국정농단의 주역 최순실씨를 안다는 사실은 '정윤회 문건'(VIP측근인 정윤회 동향 감찰 보고서) 덕에 드러났다. 정윤회씨의 아내는 최순실씨였다.

김기춘은 2016년 12월7일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 출석했다. 김기춘은 최순실씨를 몰랐다고 주장했다가 '정윤회 문건'에 최씨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서야 "착각했다"며 진술을 바꿨다.

△ 김기춘-구원파, 오대양 사건과 세월호
김기춘은 1991년 법무부 장관을 맡고 있을 당시 ‘오대양 사건’의 재수사를 맡는 담당검사를 교체했다. 이는 이례적인 일로 평가돼 오대양 사건과 김기춘의 관계를 두고 의혹이 무성했다.

오대양 사건은 오대양 대표였던 박순자씨가 썼던 사채를 둘러싸고 다수의 주검이 발견된 사건이다. 오대양의 공장에서 32명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일각에서는 사채업자의 난동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봤지만 김기춘이 교체한 검사는 ‘집단자살’이라고 결론내렸다.

오대양 사채는 행방이 묘연했는데 일부는 구원파로 흘러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20여년이 흐른 후 2014년에 세월호 사건의 책임이 해운회사를 운영했던 구원파에 있다는 '구원파 책임론'이 대두되자 구원파는 그들의 건물에 ‘우리가 남이가’, ‘김기춘 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김기춘이 구원파를 비호하다가 버렸다는 의미’라는 말이 나왔다.

△ 정윤회 문건 사건
2014년 12월 세계일보 등은 비선실세 정윤회씨를 비롯한 박근혜 대통령 측근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며 국정에 개입하며 회동했는데 여기에서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설이 논의됐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보도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이후 안대희 신임총리 후보자가 낙마하는 등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문제에 실패를 거듭했는데 김기춘의 인사검증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2014년 12월 동아일보는 김기춘이 정윤회씨의 동향문건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고 김기춘은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다.

2015년 1월 검찰은 정윤회 문건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결론내렸는데 이에 앞서 2014년 12월 김기춘이 정윤회문건에 대해 '문건 유출사건-조기 종결토록 지도'라고 언급했다는 내용이 2016년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에서 발견됐다. 이에 따라 김기춘은 당시 청와대가 검찰과 수사 축소를 협의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 아들의 사고
아들 김성원씨가 2013년 말 불의의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그의 이후 근황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2016년 8월22일 김기춘은 아들의 성년후견 개시를 서울가정법원에 신청했다. 성년후견제도는 의사 결정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법원이 후견인을 지정해 각종 법률행위를 대신하도록 허락하는 제도다.

△ 김기춘-성완종, 성완종리스트 사건
김기춘은 2009년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미화 10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성완종 전 회장이 적은 메모인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김기춘 이름도 있다고 성 전 회장이 언론에 알렸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의혹을 받고 일주일 뒤에 일본으로 출국해 정말 돈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돈의 액수와 날짜, 장소까지 메모에 적힌 사람은 김기춘이 유일했다. 이후에 김기춘은 관련 자료들을 모두 없애버리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주도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던 김기춘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단장을 맡았다. 김기춘이 헌법재판소에 소추안을 제출함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시작됐다.

발단은 노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특정 정당을 지지한 선거법 위반 발언이었다. 이를 두고 김기춘은 "대통령이 감정조절 못하고 자제력이 없으며 ?휘하를 잘 감독하지 못해 국법을 위반하거나 불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면 마땅히 탄핵을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노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하면서도 파면할 만큼의 중대한 사안은 아니라고 보고 탄핵안을 기각했다.

△ 초원복집 사건
초원복집 사건은 제 14대 대통령선거를 3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이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등과 함께 부산에 있는 초원복집 식당에서 대선 관련 대책회의를 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김영삼 민자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정주영 국민당 후보,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하자는 의논을 했다.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을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만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기소했다. 그러나 김기춘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 직후 법원에 위헌제청을 냈으며 1994년 여름 헌법재판소는 위헌결정을 내렸다.

△ 유서대필사건
김기춘이 법무부장관 시절 수사를 총지휘했던 공안정국 대표적인 진보세력 탄압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 당시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들은 통일논의를 민주화운동의 주요 이슈로 내세웠다. 이런 진보세력을 두고 전방위적으로 탄압이 이루어지던 91년 5월, 전민련(전국민주운동연합) 간부였던 김기설씨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검찰은 역시 전민련 간부였던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재야단체는 정권과 검찰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으나 강기훈씨는 결국 3년2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94년 만기출소했다. 2001년 김기설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의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 재일교포유학생 간첩조작 사건
1975년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부산대학교 등에 재학 중이던 16명의 학생이 간첩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던 김기춘은 수사를 진두지휘했으며 결국 '북괴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국내 대학에 침투해 통일혁명당 지도부를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2010년 국가기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작된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2014년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았다.

△ 육영수 피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청년 문세광씨가 축사를 읽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제 38구경 권총으로 총 5발을 발사했는데 이에 맞아 육영수가 숨졌다.

문세광씨는 현장에서 검거됐는데 김기춘이 지휘하던 수사당국은 문세광의 배후로 조총련과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을 지목하며 이는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따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8월 24일 문세광씨는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돼 검사 김기춘의 수사를 받았고 내란목적 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죄목으로 기소돼 12월 20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 김기춘(왼쪽)과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씨.


◆ 경력

1960년 대학 3학년 재학생 신분으로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3년~1964년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했다.

1991년~1997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졸업생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지냈다.

1965년 광주에서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8월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났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실무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핵심조항이 담긴 유신헌법 초안작업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3년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으로 특진했다. 곧이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으로 발탁됐다.

1974년부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 중앙정보부장 비서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공안통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74년 담당검사로 육영수 저격 사건을 맡았다. 범인인 문세광씨의 자백을 받는 등 이 사건 수사에서 세운 공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1979년 청와대 법률 비서관을 지냈다. 이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법무부의 출입국관리국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노태우 정권하에서 검찰총장이 됐다. 1990년 2년 임기를 마치고 총장에서 물러났다.

1991년 법무부 장관이 됐다.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수사를 총지휘했다.

1993년 김기춘법률사무소를 개소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당선되며 3선 의원이 됐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심판 때 검사 역할을 했다.

2008년 국회의원 공천에서 떨어졌다. 2009년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 제3대 이사장으로 재선임됐다. 2013년 7월부터 8월까지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2013년 8월5일 교체된 허태열 비서실장 후임으로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2015년 2월17일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다.

2016년 9월1일 농심 비상임법률고문에 위촉됐다. 2016년 11월24일 박근혜게이트 파문과 관련해 고문자리에서 물러났다.

◆ 학력

1958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해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6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석사과정을 밟았다.

198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형사법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서울법대 동기동창의 동생이자 박찬일 변호사의 딸인 박화자씨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김성원씨는 의사고 첫째 사위는 변호사이며, 둘째 사위는 대통령직인수위 고용복지분과 위원으로 활동한 안상훈 서울대 교수다.


◆ 어록

"그 문건(정윤회 문건)에도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안 나온다. 정윤회라는 이름만 나온다. (박영선 위원이 정윤회 문건을 공개하고 첫째 장에 최씨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점이 드러나자) 착각을 했다. (박 의원이 김 전 비서실장이 2004년 한나라당 법률자문위원장을 역임할 당시 후보 검증 청문회 영상을 틀자) 죄송하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이제 최씨의 이름을 못 들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지만 최씨와 접촉은 없었다. 최씨를 모른다는 것은 아는 사이 즉 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씨에게도 물어보라. 최근에 최씨의 이름을 알았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오늘 자료를 보니 오래 전에 최씨의 이름은 알았지만 정말 최씨와는 아는 사이가 아니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불출석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저도 사실 고령이고 저도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다. 제 심장에 스텐트도 7개 박혔고 어젯밤에도 통증이 와서 입원할까 했지만 국회의 권위와 국회가 부르는 건 국민이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고 힘든 몸을 이끌고 나왔다. 국회가 부르면 당연히 와서 진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법률 미꾸라지'라는 비판에 대해)제가 부덕한 소치다. 국민에게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한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이 그날(세월호 침몰 당일) 청와대에 계셨다고만 알고 있다. (머리손질과 관련) 알지 못했다. 대통령 관저에서 일어나는 사사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른다. 제게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고 몇 시에 일어나시고 머리를 언제 하고는 저는 모른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 그건 완전한 루머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이 없다." (2016/12/07,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서)

"박근혜 대통령께서 차은택이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보라 해서 공관으로 불러 만났다. 대통령이 직접 면담을 안 하시고 한 번 면담해서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이런 걸 보고하라 해서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났다. 차 씨와 10분간 차를 마셨을 뿐 차 씨의 사업에 관여한 바 없다. 언젠가 검찰이 부르면 가서 사실대로 말하겠다." (2016/11/27,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김종 전 차관의 진술에 대해)그렇게 진술했다면 정말 허위진술이다. 최씨를 알아야 소개를 하지 모르는데 어떻게 소개를 하느냐. 박정희 대통령 때 중앙정보부에서 대공수사국장을 했다. 간첩 수사를 하는 곳으로 국내 수사나 조사는 다른 국에서 했다. 최태민에 대한 정보부 조사는 우리 국에서 한 일이 아니다. 오늘 현재까지 최순실이라는 사람하고 연락하거나 접촉한 일이 없다." (2016/11/22,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저는 비서실장 하면서 그 사람이 여러 가지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런 점에서 자괴감이 들 정도. 나는 공식적인 일만 했고, 관저나 대통령 측근 비서들이 저에게 귀띔을 안 해줬기 때문에 저는 모르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무능하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몰랐다." (2016/11/22, 한 매체와인터뷰에서)

"(최순실 사태 수습대책에 관여하고 있다는 야권의 의혹 제기에) 관여하는 것이 없다. (본인이 최 씨 입국을 기획했다는 일각의 의혹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2016/11/02,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현재 시국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비서실장 당시 최순실 씨 관련 보고를 받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보고받은 일이 없고, 최씨를 알지 못한다. 만난 일도 통화한 일도 없다" (2016/11/02,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2013년 11월6일 오후 6시30분에 성 전 회장을 비롯해 이인제 새누리당 의원 등 충청도 의원 5명과 저녁을 먹었다. 혼자 만난 것도 아니고 동료 의원들과 함께 만났던 것으로 개인적인 부탁이나 그런 게 전혀 없었다." (2015/04/16,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성완종 리스트 관련)검찰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 아시다시피 (퇴임 후) 언론에 나서는 것을 자제해왔지만 이 사건은 너무 억울하기 때문에 언론의 질문에 그동안 성실히 답해왔다.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든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당당히 협조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제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15/04/13,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맹세코 그런 일이 없다. 그분이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맹세코 저는 그런 일이 없고, 사람이 돌아가셨으니까 고인의 명복을 빌겠지만은 저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2015/04/10, 고 성완종 경남기업 전 회장이 1억 원을 건넨 사실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두고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제가 감히…잘 모시려고 마음을 다해…그 자체가 나라 생각밖에 없는 분이다." (2015/02/22, 사표 수리 직전,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박영옥 씨의 빈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떤 분이냐고 묻는 질문에)

"박근혜 정부는 소위 비선을 활용하는 일이 결단코 없다. 비선 실세 운운하는데 '잃어버릴 실(失)'의 실세가 있을지 몰라도 '열매 실(實)'자 실세는 없다." (2015/01/09,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결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제 소임이 끝나는 날 언제든 물러날 마음 자세를 갖고 있다. ('정윤회 문건' 유출자를 회유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후 사의를 표명한 김영한 민정수석비서관에 대해) 사표를 받고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겠다."(2015/01/09,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자성하고 있다. 문건유출사건으로 인해 국민 여러분과 위원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참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근무자세와 기강을 철저하게 바로 잡도록 하겠다. 저를 비롯한 비서실 전 직원은 결연한 마음으로 심기일전해 대통령을 보좌하고 국정운영을 지원함에 있어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해 본연의 업무에 전념하겠다." (2015/01/09, 청와대 문건 유출 파동에 대해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 앞서 미리 배포한 모두발언에서)

"돌이켜보면 우리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하지만, 여러가지 불충(不忠)한 일들이 있어 위로는 대통령님께 나아가서는 국민과 나라에 많은 걱정을 끼친 일들이 있다. 금년에는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이곳에 일한다는 영광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있다는 이기심, 다른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2015/01/02, 청와대 비서실 시무식에서)

"4월16일 대통령께선 외부 행사가 없었으므로 줄곧 청와대 경내에 계셨다. 유선보고와 문서보고로도 충분히 보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국가안보실장과는 통화한 사실이 있다. 긴박한 상황 하에서는 문서와 전화보고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보다 신속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 대통령께선 가족이 없으므로 기침해 취침할 때까지 경호관과 비서관이 언제나 근접수행한다. 경호 필요성 때문에 위치와 동선은 비밀로 돼 있어 말할 수 없다. 안가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경호 비밀 때문에 말할 수 없다." (2014/08/17,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대통령 전용 헬스장은 없고 대통령 혼자만 사용하는 개인장비도 없다." (2014/11/06,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체력 관리를 위해 유명 헬스 트레이너를 채용하고 고가의 헬스기구를 구입했다는 주장에)

"누구든 명예를 침해받으면 법의 효력을 받을 수 있다. 언론 출판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허위사실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침해할 자유는 없다. " (2014/11/06,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에 대한 검찰 기소와 관련해)

"공무원이 헌신적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알지만 워낙 국가재정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무원도 이해하고 고통 분담에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개혁은 지금 하지 않으면 우리 후손에, 다음 정부에 엄청난 부담이 되고 연금제도를 계속할 수 있는가 문제가 있다." (2014/10/28,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공무원연금개혁과 관련해)

"사실을 확인하지 못해 죄송하다. 비선개입은 없다." (2014/10/28, 국회 운영위 국정감사에서 비선라인의 인사 개입설에 대해)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의하면 재난의 최종 지휘본부는 안행부(안전행정부) 장관이 본부장이 되는 중앙재난대책본부장이다." (2014/07/10, 세월호 참사의 컨트롤타워 논란과 관련해)

"피해 규모와 사회적 파장이 워낙 크고 깊어서 비서실은 사고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수석비서관 회의를 개최해 후속 조치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책임자에 대해서는 강력한 수사가 이뤄지고 있고, 사고 발생원인 규명 작업도 투명하고 철저하게 진행 중이다." (2014/07/07, 국회 운영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실장이 의원들과 밥도 못 먹는가. 소통과 친교를 하고 건의사항도 듣는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식사할 수 있다" (2014/03/07, 식사정치에 대한 논란에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전한 말)

"지금은 경제회복의 불씨를 살려서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도모해야 하고, 엄중한 안보환경 속에서 국가안보를 공고히 지켜나가야 하는 중대한 시기다. 내각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이 힘을 모아 국정을 수행해야 할 때다. 박 대통령은 전혀 개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2014/01/02, 개각설과 관련해 춘추관 기자회견에서)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차밍(매력적)하고 디그니티(위엄) 있고 엘레강스(우아)하다” (2013년 청와대 기자단 송년회에서)

“(대통령이) 어디서나 보고 받고 지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대통령 계시는 곳이 바로 대통령 집무실이다. 비서실장이나 저희 직원들은 집에서 사무실로 출근하지만, 대통령께서 아침에 일어나시면 그것이 출근이고 주무시면 그것이 퇴근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근무하고 계신다.”(2013년 국정감사에서)

“(노 대통령은) 사이코다. 자기감정도 조절하지 못하고 자제력이 없다. 그러니 나라가 이 꼬라지” (2006/ 12/ 한나라당 의원총회 자리에서)

“몸을 파는 여성은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들을 구제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단속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2004/10/12, 경북지방경찰청 국정감사에서 성매매특별법 제정과 관련)

“현 정권은 공산당이 합법화돼야 민주주의가 완성된다고 하고 인공기를 훼손했다고 북측에 사죄하고 친북활동가를 민주인사로 둔갑시키는 등 친북적이고 좌파적인 정권” “노 대통령은 더 이상 나라와 국민을 혼란과 불안에 몰아넣지 말고 하야해야 한다.”(국회 법사위원장 시절인 2003/10,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대공 수사 기능은 남북 화해와 협력이 이뤄지는 요즘 더 필요하다.”(2000년 국정감사에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모두 영도다리에 빠져죽자.” (1992년 초원복집에서 대선을 앞두고 지역 유력인사들과 자리에서)

“더 많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등 피의자의 변호인 접견권에 일시적 제한·금지가 필요하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검찰총장이던 1989년 기자회견에서)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 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하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확정을 보게 됐다.”(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됐을 때 대검찰청이 발행한 '검찰' 48호에 '유신헌법 해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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