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 노총 위원장과 만남
정태호는 2018년 7월3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중구 옛 서울역사에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공개로 만난 자리에 배석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5월 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변경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이후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는 노동계의 이야기를 듣고 설득하기 위해 비공개로 이들을 만났다.
정태호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문성현 노사정위원장과 함께 이날 만남에 배석했는데 일자리수석에 오른 뒤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노사정 대타협을 전제로 하는 만큼 사회적 대화는 일자리수석을 맡은 정태호에게도 중요한 과제인 셈이다.
정태호는 사회적 대화의 복원을 넘어 사회적 대화가 실질적 일자리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집중하고 있다.
△청와대 일자리수석 임명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26일 정태호를 2기 청와대 일자리수석으로 임명했다.
문 대통령은 2기 청와대에서 일자리수석과 함께 경제수석, 시민사회수석 등 3명의 수석을 교체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8년 6월26일 2기 청와대 인사 개편을 발표하며 일자리수석과 경제수석의 교체 의미를 별도로 설명했다.
임 실장은 “지난 1년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적 방향성을 정립하는 기간이었다”며 “청와대는 문재인 정부 출범 2기에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더욱 속도감 있게 실행해 성과를 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태호 신임 일자리수석은 정당과 청와대에서 정책분야를 두루 경험해 능력이 검증된 정책 전문가”라며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의제인 일자리 창출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문제 해결을 제1의 국정과제로 내세웠으나 출범 1년이 지난 2018년 7월까지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에서 정태호가 일자리수석으로 새롭게 임명되자 반장식 전 일자리수석이 존재감을 보이지 못해 이뤄진 문책성 인사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태호는 2018년 7월1일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에서 새롭게 임명된 윤종원 경제수석, 이용선 시민사회수석과 함께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단과 만나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일자리수석을 맡게 돼 정말로 어깨가 무겁다”며 “‘속도’ ‘성과’ ‘체감’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2018년 7월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인사를 마친 뒤 연단을 내려가고 있다. <연합뉴스> |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 시절
정태호는 정책기획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책기획비서관은 청와대 내에서 일자리, 경제, 사회 정책을 조율하는 요직으로 꼽힌다.
정태호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한 '광주형 일자리' 정책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형 일자리는 친환경차 생산 공장을 광주에서 조성 중인 빛그린산업단지에 유치하는 것이 뼈대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현대·기아자동차 절반 수준 연 4000만 원 대로 낮추는 대신 광주시는 노동자들에게 급여 보상 차원의 각종 혜택을 지원한다.
정태호는 문재인 정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정책기획위원회의 사무처 간사를 맡았고 정책기획위원회가 출범할 때는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20대 총선 낙선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했으나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정태호는 2016년 3월10일 단수 공천을 받아 더불어민주당 서울 관악을 후보로 확정됐다.
정태호는 당시 페이스북에 “감사하다. 관악주민의 힘으로 공천이 확정됐다. 우리 당에서는 새누리당을 이길 후보로 ’정태호‘를 선택했다”고 썼다.
정태호는 2016년 3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행자 관악구을 국민의당 후보께 단일화를 제안한다”며 공식적으로 야권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 유세를 펼쳤으나 정태호는 분열된 야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면서 2015년 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 이어 또 다시 오신환 후보에게 패배했다.
정태호는 2016년 4월13일 치러진 선거에서 4만4593표(36.35%)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오신환 후보는 4만5454표(37.05%)로 당선됐다. 표 차이는 1천 표도 나지 않았다.
이행자 당시 국민의당 후보는 2만8801표(23.47%)를 받아 3위, 19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된 이상규 민중연합당 후보는 2354표(1.91%)를 받아 4위에 올랐다.
△험난한 국회의원 도전기
정태호의 국회의원 첫 도전은 2008년 18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2월 이해찬 의원은 지역구 서울 관악을을 '정치적 제자'인 정태호에게 물려주고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울 관악을은 1988년 13대 총선부터 2004년 17대 총선까지 이해찬 의원이 내리 5선을 한 지역으로 정태호가 야권 후보로 낙점되면 무난히 당선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하지만 '이해찬'이라는 유력 후보가 떠난 서울 관악을에는 출마를 원하는 야권 후보들이 몰렸고 정태호는 당내 경선에서 김희철 전 관악구청장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김희철 전 관악구청장은 2008년 4월9일 열린 18대 총선에서 4만3235표(46.50%)를 얻어 국회에 입성했다.
정태호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관악을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졌지만 현역 프리미엄을 지닌 김희철 의원에게 또 다시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19대 서울 관악을 총선에서는 '야권 단일화'라는 진통을 겪은 뒤 이상규 통합진보당 후보가 당선됐다.
당시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당초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측의 투표 조작 논란이 일었다. 김희철 의원은 단일화 무효를 주장하며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이정희 대표는 후보직에서 사퇴해 결국 이상규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이상규 후보는 총선에서 4만3158표(38.25%)를 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오신환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33.28%를 얻어 2위,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희철 의원이 28.47%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정태호는 2014년 11월 서울 관악을 지역위원장에 뽑히면서 20대 총선 공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정태호는 관악을 지역위원장 자리를 놓고 김희철 전 의원과 맞붙어 이겼다.
정태호는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이상규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게 됐다.
정태호는 2015년 2월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3월 당내 경선에서 50.3%의 지지를 얻어 김희철 전 의원을 0.6%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처음으로 총선 본선에 진출했다.
서울 관악을이 야권 강세 지역인 만큼 이변이 없는 한 정태호의 당선이 예상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동영 전 의원의 무소속 출마라는 변수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물론 안철수 전 대표 등도 서울 관악을 선거에 총력전을 펼쳤으나 정태호는 야권표가 갈리면서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정태호는 2015년 4월29일 치러진 서울 관악을 재보궐 선거에서 2만6427표(34.20%)를 얻어 2위에 그쳤다.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가 3만3913표(43.89%)를 얻어 27년 만에 보수정당 후보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됐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동영 후보는 1만5569표(20.15%)를 얻어 3위에 그쳤다.
| ▲ 정태호가 2015년 4월28일 서울 관악을 새정치민주연합 재보궐 선거 후보시절 선거를 앞두고 관악구 삼성시장 입구 앞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철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표, 정 후보,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우윤근 당시 새정지민주연합 원내대표. <연합뉴스> |
△노무현 정부 청와대 근무
200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뒤 청와대에 들어가 2007년까지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 정무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정태호를 정무기획비서관에 임명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6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연합정부를 제안했는데 정태호는 당시 외국사례 연구를 통해 노 대통령의 구상을 뒷받침했다.
2005년 7월에는 정책조정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 대통령은 당시 정책실장 아래 정책조정비서관실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정태호를 정책조정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정태호는 그동안 정무기능과 정책기능을 모두 담당했던 것과 달리 정책기능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노 대통령은 정태호가 맡고 있던 정무기능을 분리해 윤후덕 기획조정비서관에게 맡겼다.
정태호는 이후 정책과 관련해 총리실과 청와대, 열린우리당을 연결하는 당
·정
·청의 연결고리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석달 뒤인 2005년 10월 윤후덕 기획조정비서관과 정태호의 자리를 맞바꿨다.
김만수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그동안 일을 하면서 윤 비서관은 정책조정비서관을, 정 비서관은 기획조정비서관을 맡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해 전보 인사했다”고 말했다.
2006년 4월 김만수 당시 대변인이 보궐선거 출마를 이유로 사임하자 참여정부의 5번째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던 이들은 모두 언론인 출신이거나 홍보 일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정태호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어 이례적 인사로 평가됐다. 참여정부 정책의 흐름을 잘 알고 있고 오랜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통해 갖춘 정무감각과 정치권내 폭넓은 인맥 등이 강점으로 꼽혔다.
하지만 대변인 역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8월 열린우리당과 소통하기 위해 정무팀을 새롭게 만들고 정무팀장 겸 정무비서관에 정태호를 앉혔다. 정태호는 당시 “노 대통령은 국회 및 정당의 의견을 수렴하고 당
·정 간 상호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무팀을 신설했다”고 말했다.
정태호는 정무비서관으로서 열린우리당과 국회를 오가며 정치적 현안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고 정태호는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당사를 찾아 송영길 당시 사무총장에게 노 대통령의 탈당계를 제출했다.
정태호는 2004년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일하며 노 대통령을 대신해 열린우리당 당사를 찾아 입당원서와 매월 특별당비 200만 원을 내겠다는 약정서를 제출한 경험도 있다.
정태호는 2007년 6월 대선을 준비하던 이해찬 전 총리의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 사의를 밝히고 노무현 정부 청와대를 떠났다.
△청와대 입성 이전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82학번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년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85년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 당시 서울대 학생회 협상 대표로 ‘광주사태 토론회’ 개최를 놓고 미국 대사관과 협상을 했다.
1985년 9월 ‘서울대학교 삼민투쟁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돼 1988년 2월까지 복역했다.
삼민투쟁위원회는 전국학생총연합 산하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됐다. 정태호는 삼민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석방된 뒤 1989년에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구속돼 10개월 동안 형을 살았다.
1991년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이 되기 전까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다.
1991년 평민당 관악을지구당에 입당하며 정치와 연을 맺었고 1999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8년 동안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1992년 14대 대선과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관악을 지구당 선대위 사무장을 지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발탁돼 대통령직 인수위 정책분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99년 전세보증금을 빼 미국 유학을 떠났다.
2001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민주당 정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기획예산 전문위원을 지내면서 노무현 대선 후보 선대본부에 자연스럽게 참여했고 당시 정책본부 전문위원으로 노무현 후보의 ‘150대 핵심공약’을 기획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되자 대통령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전문위원을 거쳐 참여정부 청와대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