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3기 원내대표
2018년 5월11일 20대 국회 제3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116표 가운데 78표를 얻어 38표의 노웅래 의원을 제쳤다.
홍영표는 당선 소감에서 “크게 포용하는 통큰 정치로 여의도 정치를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당선된 날 곧바로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찾아 국회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제안했다. 5월14일 원내대표 4명이 모여 드루킹 특검과 추경안을 동시에 처리하기로 합의하며 42일 만에 국회를 정상화했다.
특검법과 추경안은 다소 진통을 겪은 끝에 21일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홍문종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의 체포 동의안은 부결됐다.
홍영표는 체포 동의안 부결에 “국회의 제 식구 감싸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민주당의)이탈표가 나온 데 원내대표에게 책임이 있다”며 사과의 뜻을 나타냈다.
5월24일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상여금과 수당 일부를 포함할 필요가 있다며 당론 추진을 예고했다. 결과적으로 당론 채택은 이뤄지지 않았으나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정기상여금과 복리후생비 일부를 포함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홍영표는 “최저임금 1만 원 시대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가 정비됐다”고 평가했다.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환노위를 통과하자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에 반대하며 개정안 마련에 앞장선
홍영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5월28일 본회의에서 물 관리 일원화 3법, 생계형 적합업종 법제화 등과 함께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홍영표는 “최저임금 법안 통과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좋겠다”며 “기본급이 작고 상여금과 수당이 많은 한국 임금체계에서 불가피한 것”이라며 말했다.
그러자 노동계와 갈등은 깊어졌다. 5월30일 선거 유세를 위해 울산을 방문한
홍영표 앞을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관계자들이 가로막고 사퇴를 촉구했다. 6월1일 군산을 방문했을 때도 민주노총 전북본부 관계자들이
홍영표를 가로막았다.
이 과정에서 즉석 간담회가 진행됐는데 오히려 논란이 커졌다.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홍영표가 “문재인 찍었냐”, “민주노총이 10년간 못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민주당이 1년 만에 했다”는 발언을 했다며 부적절 발언을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홍영표는 “꼬투리를 잡고 있다”며 이들이 발언을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우리 정부에서 노동자의 삶이 개선되지 않으면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홍영표의 유세현장을 따라다니며 기습시위를 이어갔다.
홍영표는 4일 페이스북에서 “민주당과 제가 비판을 받는 것은 응당 겪어야 할 책임”이라면서도 “선거운동과 유세는 지역 유권자들에게 중요한 시간이니 유세를 방해하는 행위는 삼가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계속 민주노총과 대치가 이어지자 지방선거가 끝난 뒤 관련 토론회를 열고 직접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 ▲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운데)가 2018년 5월11일 원내대표에 당선된 후 추미애 대표와 우원식 전 원내대표에게 축하를 받고 있다. |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20대 국회에서 원내대표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원내대표 대신 환노위 위원장에 선출됐다.
2016년 7월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환노위에서 고용노동부 예비비 지출 승인안을 새누리당이 불참한 가운데 처리했다. 이에 새누리당은
홍영표 환노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국회 의사일정 불참을 선언했다.
홍영표가 유감 표명을 하면서 국회 파행은 오래가지 않았으나 새누리당의 20대 국회 첫 보이콧으로 기록됐다.
홍영표 등이 19대 때 발의했으나 폐기됐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법이 2016년 12월 환노위를 통과했다. 피해지원센터를 설립하고 정부가 피해자와 유족 등에 요양급여, 요양생활수당 등을 지급하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징벌적 손해배상 조항은 제외됐다. 이 법안은 법사위를 거쳐 2017년 1월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16년 11월에는 조정식 국회 국토위원장과 함께 사상 최장기 철도 파업 해결에 나섰다. 철도노조에 파업 철회를 제안하며 상임위 차원에서 고용노동부와 철도공사 등을 대상으로 진상조사를 약속했다. 이는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노사 양쪽의 출구를 마련하면서 12월7일 합의안 도출과 파업 종료의 마중물이 됐다.
2017년 2월에는 새누리당 의원 불참 속 MBC와 삼성 청문회 등을 의결해 새누리당 환노위 위원들이 또다시
홍영표 사퇴를 촉구하며 보이콧을 진행했다. 결국 청문회를 간사합의에 따라 정하기로 연기하면서 열흘 만에 환노위는 재개됐다.
2017년 3월 원내교섭단체 4당이 근로시간을 주당 52시간으로 줄이기로 큰 틀에서 합의했으나 환노위에서 단축안 마련에 실패했다. 정부가 바뀐 뒤 다시 환노위에서 근로시간 단축 논의를 벌여 11월 간사 합의안을 도출했으나 고용노동소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홍영표는 “합의가 되지 못해 유감”이라며 “노사정 양보와 대타협만이 모두가 상생하는 길”이라고 합의를 촉구했다.
근로시간 단축안은 해를 넘겨 2018년 2월에야 환노위를 통과했다. 기업 규모별로 시행시기를 차등적용하고 휴일근로수당 중복할증은 인정하지 않는 절충안이 마련됐다.
홍영표는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2018년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 한국GM대책TF 단장과 GM대책특별위원장을 맡아 한국GM 사태 해결을 위해 중재 역할을 했다. 한국GM 노조는 물론 댄 암만 GM 총괄사장, 배리 앵글 GM 해외사업부문 사장, 카허 카젬 한국GM 사장 등과 수차례 만나 의견 조율을 시도했다.
결국 4월24일 한국GM 노사는 회사 정상화를 위한 잠정합의안을 타결했다.
홍영표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협상이었다”며 “노조가 회사 정상화를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한 희생을 회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18년 5월10일에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를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개편하는 내용의 노사정위법 전부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환노위 여야 의원 15명 전원을 포함해 5개 정당 67명 의원이 참여했다. 노사정위법 전부 개정안은 5월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홍영표는 환노위원장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
대우자동차 퇴사 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과 함께 개혁국민정당을 만들어 조직위원장과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16대 대선 때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외곽에서 지원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 참여했다.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2004년 총선 출마를 준비했으나 변호사 출신 문병호 후보에게 밀려 공천을 받는 데 실패했다. 이해찬 의원이 국무총리로 임명되자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으로 발탁되며 공직에 발을 들이게 됐다.
방사능폐기물처리장, 새만금사업, 주한미군기지 이전, 공기업 지방 이전, 행정수도 이전 등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공기업 이전과 관련해 노조들을 설득하며 처음으로 정부와 노조 사이에 노정협약을 맺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부평을에 출마했다가 한 차례 낙선하고 2009년 4.29재보궐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이 됐다. 노동현장 출신답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내내 활동했으며 간사도 지냈다. 그 외에 민주당 노동특별위원회 위원장, 민주통합당 전국노동위원회 위원장, 원내대변인 등으로 활동했고 2012년에는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2011년 환노위에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와 관련해 청문회를 성사시켰다. 8월 청문회를 열어 조남호 회장을 출석시켰고 10월에는 사태 해결을 위한 권고안을 마련하면서 노사 갈등 해소의 발판을 마련했다.
19대 국회 때도 전반기 환노위 간사로 일했다. 환노위에서 임금피크제 도입, 육아휴직 대상 확대법안 등을 처리했고 통상임금,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근로시간 단축 공청회 등을 주도했다. 하반기에는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간사로 활동했다.
| ▲ 홍영표 민주당 의원이 2013년 11월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의원과 안철수 무소속 의원의 후보 단일화 비화를 담은 '비망록' 출판기념회에서 참석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
△선거 이력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인천 부평을에 통합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38.2%의 득표율로 43.5%를 얻은 구본철 한나라당 후보에게 뒤져 2위로 낙선했다.
2009년 구본철 의원이 선거법위반으로 400만 원의 벌금형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하자 같은 지역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50.2%의 득표율로 당선돼 18대 국회에 입성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인천 부평을 후보로 출마해 55.2%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2016년 국민의당의 등장으로 3자 구도로 치러진 제20대 총선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43.8%의 득표율로 3선을 달성했다.
△대우자동차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을 보고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 중심이 되지 않은 학생 시위로는 독재를 타파할 수 없다고 생각해 군 제대후 복학하지 않고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건설현장 잡부로 일하면서 노동자의 몸을 만들어갔고 울산 현대중공업 취업 시도 등을 하다가 1982년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소에 들어갔다. 6개월간 교육기간을 마치고 1983년 용접공으로 정식입사했다.
1984년 부평공장에서 일하던 서울대 출신 노동자의 신분 노출을 계기로 군필자 호봉 승급과 상여금 등 노동자 처우 개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1984년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고 1985년 4월 김우중 회장과 임금교섭을 하게 됐다.
김우중 회장과
홍영표는 노사 협상의 대표는 아니었으나 실질적 대표자였다. 김우중 회장은
홍영표를 한밤 중에 사장실로 불러 협상을 했다. 당시 경총의 임금인상 가이드라인은 5.2%였으나 두 사람의 몇 차례 교섭 끝에 16.4%의 임금인상에 합의했다.
이로써 대우자동차 파업은 해결됐으나
홍영표는 수배자가 됐다. 합의안에서 파업에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항을 마련했던 김우중 회장은 차 트렁크에
홍영표를 싣고 경찰 포위망을 빠져나가기도 했다. 결국
홍영표는 파업 주도 혐의로 붙잡혀 구속됐다.
1995년 대우자동차 사무직으로 복직해 런던지사에서 일하게 됐다. 김우중 회장은 영국시장에서 점유율 1%라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당시 이를 초과달성했다.
홍영표는 누비라를 타고 영국 전역을 누비면서 협상의 기술과 경영의 원리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2002년 영국에서 귀국한 후 구조조정으로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