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발전위원회 발족
2018년 2월20일 철도발전위원회를 발족하고 제1차 회의를 열었다.
철도발전위원회는 학계와 인사노무전문가, 시민단체 등 외부 전문가, 노동조합, 내부직원 등으로 구성돼 공공철도, 철도안전, 대륙철도, 노사문화, 조직인사 등 5개 분야를 중심으로 철도 발전을 위한 자문 역할을 담당한다.
첫 번째 회의에서는 작업자 안전 확보, 4차산업혁명을 접목한 안전관리, 노동이사제 도입 등을 심도 있게 다뤘다.
철도발전위원회는 앞으로 2개월 동안 매주 정기회의를 진행하며 현안에 따라 수시 회의를 열기로 했다.
오영식은 “철도발전위원회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중장기 철도 발전 로드맵을 마련하겠다”며 “철도 공공성 강화를 통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노사화합과 경영혁신을 통해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철도 해고자 복직
2018년 2월8일 철도공사 대전 본사에서 강철 철도노조 위원장과 만나 철도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다.
강철 위원장은 “이번 합의가 지난 세월을 모두 보상할 수 없지만 그동안 아픔을 치유하는 첫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며 “철도의 공공성을 지키고자 했던 조합원들의 노력과 희생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철도노조는 그동안 철도 구조개편과 철도 민영화 등에 반대하면서 수차례 파업을 진행해 조합원 수백 명이 징계, 해임, 파면을 당했다. 이 가운데 2018년 2월 기준으로 98명의 조합원이 복직하지 못했다.
해고자들은 짧게는 4년, 길게는 10여 년을 해고상태로 지냈고 해고된 채로 정년을 맞은 조합원도 있다.
오영식은 2018년 상반기 해고자 65명을 특별채용할 계획을 세웠다.
오영식은 2018년 2월13일 정부대전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상반기에 철도파업 해고자 가운데 결격사유 없는 65명을 특별채용 형태로 복직시킬 것”이라며 “나머지 해고자들은 결격사유가 해소되면 방안을 마련해 단계적으로 풀어가겠다”고 말했다.
△철도공사 사장 취임
2018년 2월6일 대전 본사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열고 8대 한국철도공사 사장에 올랐다.
그동안 대강당에서 본사 직원 전원을 모아놓고 취임식을 진행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평창동계올림픽의 수송에 전력을 다하자는 뜻에서 대회의실에서 간략하게 취임식을 열었다.
오영식은 취임사에서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은 철도의 안전에서 시작된다”며 “사람 중심, 현장 중심의 절대적 안전체계를 확립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이 철도공사의 사명이자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철도 공공성 강화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혁신을 통해 미래 철도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SR과 통합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뜻도 내비쳤다.
오영식은 취임식을 마치고 대전 본사 각 층을 돌며 부서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본사 앞 철도 해고자 천막농성장을 찾아 해고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후에는 국립대전현충원과 충북 옥천의 ‘이원성역’을 찾아 철도순직 영령에 참배했다.
철도공사는 2017년 7월 홍순만 전 사장의 퇴임 이후 7개월 만에 새로운 수장을 맞이했다.
| ▲ 오영식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2018년 2월6일 철도참전 유공자가 모셔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철도 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분향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 |
△야인 시절
2016년 20대 총선 더불어민주당 공천 과정에서 사전 여론조사 결과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컷오프됐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공천은 문재인 대표 시절 최고위원을 지낸 오영식, 전병헌 의원 등을 컷오프하면서 논란이 됐으나 오영식은 당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중앙 유세단장을 맡아 더불어민주당 선거를 도왔다.
2016년 정세균 의원이 국회의장에 오르자 전병헌 전 의원 등과 함께 국회 사무총장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오영식은 정세균 의장과 고려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친분이 두터운 것은 물론 정세균계로 분류된다.
2016년 9월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2017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와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문재인 캠프에서 조직1본부장을 맡아 당내 경선을 치르고 본선에서는 조직본부 수석부본부장으로 힘을 보탰다.
△19대 국회의원 시절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서울 강북갑 후보로 출마해 3만7352표(52.2%)를 받아 3선에 성공했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간사와 산업통상자원위원회 간사 등으로 활동했고 강북갑 지역위원회 위원장, 서울특별시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특별시당 위원장을 맡아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해 구청장 20명, 시의원 77명, 구의원 219명 선출에 기여해 서울지역 압승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정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돼 2015년 11월까지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오영식은 당시 ‘혁신과 통합을 이끄는 젊은 패기와 열정’을 기치로 내걸고 지방자치 강화, 청년정치 활성화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네거티브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정책 경쟁으로 승부하자며 ‘바람직한 정당구조를 위한 정책 자료집’을 내는 등 정책선거를 강조해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성완종 게이트, 메르스 사태 등에 강경한 목소리를 냈고 특히 1인 시위와 대국민 서명운동 등을 벌이며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강하게 반대했다.
2015년 12월 국정감사NGO 모니터단으로부터 국정감사 우수의원상을 받았다.
△17대 국회의원 시절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서울 강북갑 후보로 출마해 3만6638표(46.0%)를 받아 강북갑 지역에서 3선을 노리던 김원길 한나라당 의원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오영식은 1980년대 후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돼 3년형을 살고 나온 뒤 서울 강북구에서 한동안 과일노점상을 했는데 그때 만난 노점상과 시장상인들의 지지와 격려에 힘을 받았다고 한다.
17대 국회에서 열린우리당 공보부대표(원내대변인), 전략기획위원장, 대통합민주신당 정책위 수석부의장 등을 지냈다.
오영식이 공보부대표를 맡던 2005년 열린우리당은 정세균 대표의 지시로 ‘원내 우리당 소식’이라는 이메일 소식지를 창간하고 국회내 원내공보팀 사무실을 기자간담회 장소로 바꾸는 등 홍보를 대폭 강화했다.
오영식은 당시 “정 대표는 타이밍에 맞춰 충분하게 사실관계를 언론에 전달하면 오해가 발생할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며 “기사의 편향과 왜곡이 나타나지 않도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17대 국회 내내 산업자원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활발한 입법활동 등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7대 국회에서 법안 대표발의 건수 2위, 17대 국회 전반기 법안 가결순위 1위에 올랐고 YTN 오늘의 국감스타, 바른사회시민연대의 국감 우수의원, 3년 연속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의 국감 우수의원 등에 선정됐다.
특히 서민경제를 지키는 데 힘써 ‘재래시장육성특별법’ ‘중소기업 사업촉진에 관한 특별법안’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안’ 등을 대표발의해 국회 통과를 이끌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서울 강북갑에 출마했으나 2만5378표(44.6%)를 얻어 2만7429표(48.2%)를 얻은 정양석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16대 국회의원 시절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비례대표)로 출마했으나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2003년 3월 김영진 의원이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임명되며 의원직을 사퇴하자 의원을 승계했다.
운동권 출신에서 현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이후 운동권 출신의 국회 진출 확대에 기여했다.
전대협 출신 의원은 16대 국회에서 오영식과 임종석 의원 둘 뿐이었지만 17대 국회에서는 10여 명으로 늘어났다.
오영식은 의원직을 승계하며 상임위 배정과 관련해 “가능하다면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처음에는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2003년 6월 김원웅 의원이 상임위를 바꾸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를 떠나자 김 의원을 대신해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됐다.
2003년 10월 열린우리당 입당을 위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국회의원이 된 지 7개월 만에 의원을 잃었다.
당시 오영식을 비롯해 이재정, 이미경, 허운나, 박양수 의원 등 5명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비례대표 의원을 내려 놓았다.
오영식은 16대 국회에서 법안 발의를 한 건도 하지 않아 16대 국회 개원 뒤 단 한 건의 법률안도 발의하지 않은 의원 31명에 이름을 올렸다.
오영식은 상대적으로 짧은 의원생활로 입법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국회의원 이전
1988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과 함께 전대협 2기 의장을 지냈다.
당시는 대학 내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때로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오영식의 전대협 2기 의장 취임식에는 2만여 명의 학생들이 몰렸다.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등으로 수배돼 도피생활을 했고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문부식씨 등과 함께 ‘한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했던 혐의 등으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소 뒤 과일 판매 등으로 생활비를 번 것으로 알려졌고 1993년 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결혼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들어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본격 입문했다.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출마해 당선에 실패했지만 2003년 의원을 승계 받아 국회에 입성했다.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선거대책본부 청년위원장,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청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