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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대북 억제력 강조하는 '레이저 김'
이규연 기자 nuevacarta@businesspost.co.kr 2014-11-03 02: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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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 김관진 국가안보실 실장



김관진은 1949년 8월27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1972년 육군사관학교를 제28기로 졸업했다.

1972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1999년 육군 제3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2004년 합동참보본부 작전본부 본부장이 되었다. 2006년 11월부터 2008년 3월까지 제33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역임했다.

2010년 12월 제43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돼 2014년 6월까지 일했다. 2014년 6월부터 제2대 청와대 국가안보실 실장으로 옮겼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육군사관학교 28기로 군대에 입문한 뒤 35사단장과 2군단장 및 합참의장 등을 맡으면서 정책부서와 야전부대 경험을 고루 쌓았다. 특히 전략과 정책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졌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절 동기생 중 1명만 선발하는 독일 유학시험을 통과해 1969년부터 3년 동안 독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는 등 재원으로 꼽혔다.

군에서 일하면서 중간보고를 생략한 ‘원스톱 업무처리’를 도입했다. 추진력이 있고 의사결정을 할 때 소신에 따른 의견을 내놓는 등 강한 리더십과 인화력을 모두 갖췄다는 평가를 듣는다.

부하들이 의견을 내놓을 때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자유롭게 서로의 뜻을 교환하도록 장려한다고 알려졌다. 다만 한 번 방향을 정하면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연평도 포격도발 직후인 2010년 12월4일 국방부 장관에 발탁됐다. 육군참모총장 출신 인사들이 주로 맡았던 국방부 장관 자리에 합동참모의장 출신으로 임명된 데다가 전임자인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보다 육사 1기수 선배라는 점 때문에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전투형 부대', '정신교육 강화', '관료적 풍토 쇄신'을 화두로 던지며 군 개혁을 추진했다. 2011년 1월 모든 군대에 내린 ‘장관서신 1호’에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 임하며 강조한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을 인용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국방부 장관에 내정됐던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비리혐의로 물러나면서 유임됐다. 이를 통해 김관진은 정권교체 후에도 장관에 유임되는 첫 인물이 되었다. 이후 2014년 6월까지 3년6개월 동안 장관으로 일하면서 1987년 이후 자리를 오래 지킨 국방부 장관이 됐다.

북한의 도발에 늘 강력한 대응의지를 밝혀 ‘레이저 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북한의 도발원점 및 지휘세력 타격 등 강성발언을 자주 했다.

북한이 가장 싫어했던 국방부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 당국은 김관진의 국방부 장관 재임기간 동안 ‘특등 호전광’이나 ‘괴뢰패당 우두머리’ 등 원색적인 용어로 비난했다. 윤일병 폭행치사 사건이 드러난 2014년 8월 김관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북 억지력을 높인 반면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에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부 장관 취임 후 군령권(작전, 정보)과 군정권(인사, 군수) 통합을 주축으로 한 상부지휘구조 개편을 추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재임기간 동안 북한 무인기 발견 및 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의혹사건 등이 발생한 것도 약점으로 지목된다.

2014년 6월1일 박근혜 정부의 제2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내정됐다.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4년여 간 국방부장관으로 국방을 책임져왔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외교안보장관회의의 구성원으로 안보와 외교, 통일 분야 정책결정에 참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2년 3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육군 제15보병사단 대대장 및 작전참모로 일했다. 1990년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여단 여단장으로 임명됐다. 1992년 합동참모본부 군사전략과 과정이 됐다. 1994년 대통령비서실 국방담당관을 역임헸다.

1996년 육군 비서실 실장이 됐다. 1998년 육군 전략기획처 처장으로 선임됐다. 1999년 육군 제35사단 사단장이 된 뒤 2000년 육군 기획관리참모부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2년 육군 제2군단 군단장이 됐다.

2004년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 본부장을 역임했으며 2005년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2006년 11월 제33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된 뒤 2008년 3월까지 역임했다. 2010년 12월 제43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2014년 6월부터 지금까지 제2대 청와대 국가안보실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학력

1968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9년 독일 육군사관학교로 유학해 3년간 공부한 뒤 1972년 육군사관학교 28기 학사학위를 땄다.

◆ 가족관계

부인 김연수와의 사이에서 3녀를 뒀다.

◆ 상훈

2008년 미국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 상훈

2008년 미국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어록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결코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2010/12/04, 국방부 장관 취임식에서 북한이 추가도발하면 자위권 차원에서 강력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위기는 곧 기회다. 2011년 새해에 우리 모두가 완벽한 전투태세를 갖추는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세로 적을 압도하는 전투형 부대를 만들어 가자.” (2011/01/03, 장관 취임 후 전군에 내린 첫 ‘장관서신 제1호’에서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늘 전투태세를 갖춘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침과대적을 인용하며)

“북한이 도발하면 자위권 차원에서 도발원점을 타격하겠다.” (2012/12/19,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현장에서 북한이 임진각에서 ‘삐라’를 뿌리면 군사적 타격을 시행하겠다고 밝힌 것에 관한 대응책을 설명하면서)

“본의 아니게 집단 따돌림이 GOP 총기사고의 동기가 된 것처럼 오해를 불러와 유가족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2014/06/27, 2014년 6월25일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현안질의 현장에서 제22사단 GOP(일반전초) 총기 난사 사건의 원인을 집단 따돌림으로 돌리는 듯한 발언을 한 것에 희생자 유가족들이 반발하자 낸 대국민 성명문에서)

“전시작전권 전환 조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비한 군의 능력 및 한·미 간 대응능력, 북한의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독자적 대비 능력, 전반적 안보 상황이다.” (2014/10/28, 국회운영위원회 안보실 국정감사에 출석해 한국-미국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에서 무기한으로 재연기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 평가

육군사관학교 28기로 군대에 입문한 뒤 35사단장과 2군단장 및 합참의장 등을 맡으면서 정책부서와 야전부대 경험을 고루 쌓았다. 특히 전략과 정책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졌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절 동기생 중 1명만 선발하는 독일 유학시험을 통과해 1969년부터 3년 동안 독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는 등 재원으로 꼽혔다.

군에서 일하면서 중간보고를 생략한 ‘원스톱 업무처리’를 도입했다. 추진력이 있고 의사결정을 할 때 소신에 따른 의견을 내놓는 등 강한 리더십과 인화력을 모두 갖췄다는 평가를 듣는다.

부하들이 의견을 내놓을 때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자유롭게 서로의 뜻을 교환하도록 장려한다고 알려졌다. 다만 한 번 방향을 정하면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연평도 포격도발 직후인 2010년 12월4일 국방부 장관에 발탁됐다. 육군참모총장 출신 인사들이 주로 맡았던 국방부 장관 자리에 합동참모의장 출신으로 임명된 데다가 전임자인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보다 육사 1기수 선배라는 점 때문에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전투형 부대', '정신교육 강화', '관료적 풍토 쇄신'을 화두로 던지며 군 개혁을 추진했다. 2011년 1월 모든 군대에 내린 ‘장관서신 1호’에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 임하며 강조한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을 인용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국방부 장관에 내정됐던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비리혐의로 물러나면서 유임됐다. 이를 통해 김관진은 정권교체 후에도 장관에 유임되는 첫 인물이 되었다. 이후 2014년 6월까지 3년6개월 동안 장관으로 일하면서 1987년 이후 자리를 오래 지킨 국방부 장관이 됐다.

북한의 도발에 늘 강력한 대응의지를 밝혀 ‘레이저 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북한의 도발원점 및 지휘세력 타격 등 강성발언을 자주 했다.

북한이 가장 싫어했던 국방부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 당국은 김관진의 국방부 장관 재임기간 동안 ‘특등 호전광’이나 ‘괴뢰패당 우두머리’ 등 원색적인 용어로 비난했다. 윤일병 폭행치사 사건이 드러난 2014년 8월 김관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북 억지력을 높인 반면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에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부 장관 취임 후 군령권(작전, 정보)과 군정권(인사, 군수) 통합을 주축으로 한 상부지휘구조 개편을 추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재임기간 동안 북한 무인기 발견 및 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의혹사건 등이 발생한 것도 약점으로 지목된다.

2014년 6월1일 박근혜 정부의 제2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내정됐다.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4년여 간 국방부장관으로 국방을 책임져왔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외교안보장관회의의 구성원으로 안보와 외교, 통일 분야 정책결정에 참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기타

강호문 삼성전자 부회장과 서울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서로 친한 사이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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