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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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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안모자 실적. | ||
△실적부진 기업 인수 뒤 다시 키워
백성학은 미국 지게차회사 ‘클라크’와 한국 버스회사 ‘자일대우버스’를 인수해 부진한 실적을 다시 끌어올렸다.
영안모자는 2003년 클라크의 모체인 클라크 미국본사 및 한국생산법인을 인수했다. 클라크는 1903년 설립돼 1917년 세계 최초로 지게차를 발명한 기업이다. 2000년 4월 파산해 경매에 부쳐졌는데 한국법인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수차례에 걸쳐 백성학에게 인수를 요청했다고 한다.
백성학은 미국 제조업계 호황을 예감하고 멕시코 공장 등을 정리한 뒤 미국시장에만 집중했고 클라크는 세계 10위권 안에 다시 들어갔다.
영안모자는 2003년에 자일대우버스도 인수했다. 자일대우버스는 1955년 신진공업사로 버스제조업을 시작한 뒤 2002년 대우버스로 변경됐는데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백성학의 인수 결정 뒤 자일대우버스는 세계 80여개 나라를 대상으로 버스를 공급하고 있다. 영안모자 계열사 가운데 가장 많은 실적을 내는 회사로 탈바꿈했다.
영안모자는 2012년 버스를 판매하는 회사인 ‘자일대우자판’도 인수했고 이 회사를 통해 버스판매를 위한 영업과 렌터카사업을 하고 있다.
백성학은 2004년과 2010년 쌍용차 인수전에도 뛰어들었지만 접전 끝에 각각 중국 상하이자동차와 인도 마힌드라그룹에게 쌍용차를 빼앗겼다.
△숭의학원 인수
백성학은 1999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어려움을 겪던 이준 삼풍백화점 회장으로부터 숭의학원을 인수했다.
숭의학원의 모태는 새뮤얼 A 마펫 선교사가 1903년 평양에 세운 숭의여학교다. 한경직 목사는 마펫 선교사가 세운 자작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신학문을 배웠다. 한 목사는 1999년까지 숭의학원 이사장을 지냈고 백성학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백성학은 숭의학원 이사장 임기를 마친 뒤 아내인 윤순희씨를 숭의학원 이사장에 앉혔다.
△목장 운영
영안모자는 1972년 소와 말을 키우는 원주목장을 운영하기 시작해 포천목장, 금곡목장, 제주 양지목장까지 목장 수를 확대했다. 2010년에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와나링에서도 목장을 세웠다.
△해외사업 확대
백성학은 모자사업에서 1966년 일본에 첫 수출을 시작으로 미국까지 진출했다. 1969년 월마트 바이어가 한국으로 그를 찾아와 월마트 모자의 60%를 맡겼다.
영안모자의 제품을 일본업체가 납품받은 뒤 ‘made in Korea’를 떼고 ‘made in Japan’만 붙여 팔았는데 한 상자를 수정하지 못해 영안모자의 제품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백성학은 1971년 한국에 판매를 중단하고 수출에만 전념하게 됐다. 당시 고유상표를 개발해 15개 나라에 영안 상표를 단 모자를 수출했다. 특히 1973년 백성학은 LA다저스 야구모자를 선보였고 세계의 모자왕으로 등극했다.
1970년대 중반에 모자 뿐 아니라 천과 플라스틱, 원단가공 등의 공장을 세운 뒤 모자의 원가를 낮췄다. 이런 노력을 통해 영안모자는 1978년에 1천만 달러 규모 수출을 달성했다.
영안모자는 1985년에 코스타리카 공장을 설립하며 모자공급을 안정화하기 위해 생산기지를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영안모자는 현재 캐나다와 미국, 멕시코, 홍콩을 중심으로 판매법인을 운영하고 미국 3개, 멕시코 1개, 중국 1개, 스리랑카 2개, 방글라데시 2개, 베트남 1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5·16군사정변, 위기를 기회로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제복 스타일의 재건복을 입어야 했고 모자시장이 크게 위축되자 영안모자도 매출이 줄어들었다.
백성학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폐업한 모자가게의 재고를 사들이고 고급화전략을 추진했다. 때마침 수입금지 조치가 내려져 영안모자로 손님이 몰렸다.
백성학은 이때 전국에 대리점 형태의 유통망을 구축했다. 1964년 패션업계 최초로 대중광고를 시작하기도 했다.
△영안모자의 태동
백성학은 10살에 전쟁고아가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함경도 원산에 살고 있었는데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원산만에 갔다가 1·4후퇴 때 피난민 대열에 떠밀려 남하하는 배를 타게 됐다.
이후 미군부대 심부름꾼과 식당 종업원, 병원 청소부, 구두닦이 등 가리지 않고 일하다가 모자공장에까지 가게 됐다. 그는 하루 18시간 이상 근무하며 모자제조기술과 점포 및 공장관리를 배웠다.
백성학은 일을 배운지 3년째인 19세가 되던 해에 18만 원을 들고 청계천4가 개천가에 영안모자를 세웠다.
미국 백화점 카탈로그를 입수해 다양한 종류의 모자를 만드는 데 열중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는데 그 일행의 복장이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 모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영안모자의 매출이 빠르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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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과 경영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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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성학씨는 1959년 서울 청계4가에 모자가게를 차렸다. | ||
“대한민국에서는 깨끗하지 않으면 못 산다. 내가 돈 벌려고 했으면 준 재벌 됐을 거다. 내가 머리 나빠서 돈 못 버는 게 아니다. 양심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비자금도 만들고 로비도 하고 그러지 않으면 돈 못 번다. 그런데 우리 같은 규모로 그렇게 했다간 죽는다. 그래서 대기업, 중견기업 많이 죽어나갔다. 그런데 비자금 없이 그냥 내 돈 쓰면 깨끗하다. 그게 바로 나의 특이한 노하우다.” (2016/7/15,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어묵장사가 사양길에 접어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어묵으로 세계시장을 뚫어야 한다. 해외로 나가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2017/5/21,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친미라고 불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큰 도움을 준 나라다. 친미로 누가 따로 덕본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보수건 진보건 다 덕을 봤다. 친미해서 나쁠 게 뭐가 있나?” (2013/5/2, 한겨레21과 인터뷰에서)
“어려운 격동기였던 지난 1959년 노점으로 시작한 영안모자가 이만큼 성장하게 된 것은 해외 바이어는 물론 영안의 임직원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꼭 하여야 한다는 신념과 ‘친절’이라는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생 세일즈맨 정신으로 살면 안되는 것도 실현이 가능하게 된다.” (2009/4/30, '영안모자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내가 앞장서서 정운찬 교수가 서울대 총장이 되도록 뛰었다.” (2009/4/30,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영안모자 창립 50주년' 축하연에서)
“옛 iTV 직원들의 고용승계는 최근 사회문제화된 양극화 해소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재입사를 희망하는 직원들은 최대한 고용승계하겠다. 그렇게 될 경우 전체 250명 규모의 새 민방 직원의 80% 정도를 옛 iTV 직원들로 채우게 될 것이다.” (2006/5/1,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선진 기업일수록 노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새 민방의 경우 신입사원을 뽑을 때부터 내가 직접 노조 가입을 권유하겠다. 오너가 마음의 문을 열고 깨끗한 경영을 한다면 노사가 대립각을 세울 이유가 전혀 없다. 1975년 영안모자 노조가 설립될 때만 해도 내가 직접 나서 노조 설립을 유도했었다. 노사간 신뢰를 가지려면 모든 것을 오픈해야 한다. 법인 설립이 확정되면 노조원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겠다.” (2006/5/1,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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