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상호 강원특별자치도지사는 2026년 7월1일 오후 강원대학교 백령아트센터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강원도 제공> |
△강원특별자치도지사 취임
우상호는 2026년 7월1일 제40대 강원특별자치도지사에 취임했다.
우상호는 2026년 7월1일 오후 강원대학교 백령아트센터에서 열린 강원특별자치도지사 취임식에서 “청정 자연이 성장 동력인 강원을 만들고 물·바람·햇빛·청정에너지가 첨단 기업을 불러오는 강원을 열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미 강원도에 2개의 대기업이 AI 데이터센터 건립을 위해 최대 100조원의 투자를 시작했다”며 “18개 시·군과 손잡고 역량을 결집해 하나 된 힘으로 강원의 도약을 반드시 이뤄내겠다”이라고 말했다.
우상호는 청정 자연을 기반으로 한 성장, 청년의 도전과 기회 확대, 지역 균형 발전, 글로벌 관광 거점화, 평화경제 실현 등 5대 핵심 도정 방향을 제시했다.
우상호는 물·바람·햇빛 등 청정에너지를 활용해 첨단기업 유치를 확대하고, 창업 장벽을 낮춰 청년들이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시·군별 특성에 맞는 산업을 육성해 지역 소득을 높이고, 세계적 수준의 트레킹 코스를 조성해 ‘아시아의 스위스 강원’으로 관광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이와 함께 평화경제특구 조성과 DMZ 일대의 생태·평화 자원화를 통해 이를 세계적 관광·경제 자산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비전도 제시했다.
우상호는 2026년 7월1일 ‘AI 데이터센터 유치 TF 설치 및 운영계획’을 1호 결재로 추진했다. 이번 TF는 우상호의 1호 공약인 ‘AI 데이터센터 유치’를 전담하기 위해 신설된 조직이다. 1단장·2팀 체계, 총 10명 규모로 구성됐다.
앞서 2026년 6월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 국민 보고회’에서 강원특별자치도가 AI 데이터센터 주요 후보지로 부각됐다.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는 경기·호남·영남 등 주요 권역을 중심으로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등 첨단 산업을 육성하는 대규모 개발 구상이다. 이에 따라 GS는 동해에 2.4GW 규모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을, SK는 강원을 포함한 권역별 AI 데이터센터 투자 구상을 제시했다. 이러한 산업 투자 흐름은 우상호 강원도정의 핵심 정책 추진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 ▲ 우상호 강원특별자치도지사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2026년 6월4일 춘천시 더불어민주당 강원도당에서 당선이 확실시된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강원특별자치도지사 당선
이재명 정부 초대 정무수석을 지낸 우상호는 ‘대통령이 보낸 사람’을 내세워 강원특별자치도지사에 당선됐다.
우상호는 2026년 6월3일 열린 강원특별자치도지사 선거에서 최종 개표 결과 43만7583표(51.81%)를 얻어
김진태 국민의힘 후보(40만6950표·48.18%)를 3만633표 차로 제치고 승리했다.
우상호가 강원특별자치도지사에 당선되면서 더불어민주당은 4년 만에 강원도정을 다시 이끌게 됐다.
우상호는 당선 직후 “강원도의 획기적인 변화를 위해 제가 구상했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잘 실천해 나가겠다”며 “저를 지지하지 않은 분들도 다 통합의 마음으로 함께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우상호는 2026년 3월1일 출간한 저서 ‘대통령
이재명과의 동행’에서 이 대통령으로부터 강원도지사 출마를 권유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우상호는 선거 기간에서 ‘대통령이 보낸 사람’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중앙 정부와 여권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통해 강원도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상호는 선거 기간 내내
김진태 후보의 핵심 도정 사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정책 차별화에 나서는 한편, 중도·보수층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전략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우상호는
김진태 후보가 역점 사업으로 추진해 온 행정복합타운 조성 사업에 대해 재원 조달 방안이 불분명하고 사업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며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우상호는 민선 8기 도정에서 시작된 5천억 원 규모의 도청사 신축 이전 사업에 대해 행정의 연속성을 고려해 계속 추진하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또 레고랜드 개발과 중도 부지 활용 문제, 공약 이행률, 지역 균형발전과 교통·의료 인프라 확충 등을 주요 쟁점으로 내세우며 현 도정의 성과를 비판하고 새로운 발전 전략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우상호는 도정 교체를 핵심 기조로 내세우며
김진태 후보와 치열한 정책 공방을 벌였다.
| ▲ 우상호 강원도지사 예비후보(오른쪽)가 2026년 5월11일 강원 춘천시 스카이컨벤션에서 열린 민주당 강원 공천자대회에서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로부터 공천장을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
△‘더불어민주당 1호 공천’, 강원특별도지사 후보로 나서
우상호는 2026년 1월19일 대통령실 정무수석 직을 내려놓고 강원특별자치도지사 선거 출마 준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우상호를 6·3 지방선거 강원도지사 선거 후보로 공천했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틀어 민주당의 ‘1호 공천’으로, 이광재 전 강원지사의 양보로 당내 경선 없이 본선에 직행하게 됐다.
더불어민주당 공천관리위원회는 2026년 2월27일 “우상호 전 수석을 강원특별자치도지사 후보로 단수 공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이수 더불어민주당 공관위원장은 우상호를 두고 “1987년, 6월 항쟁 최전선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1999년 민주당에 입당해 27년간 당을 굳건히 지켜왔다”며 “지금까지 당을 지탱해 온 우 후보의 탁월한 역량이 강원도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엔 정무수석에 임명돼
이재명 정부의 연착륙, 성공적 국정 운영을 위해 헌신했다”면서 “지금까지 당을 지탱해 온 우 후보의 탁월한 역량이 강원특별자치도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강조했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은 “광역 기초단체장과 의원을 다해서 2천명이 훨씬 넘는 공천이 있을 것인데 그 중에 1호 공천”이라며 “강원특별자치도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강원지사 후보로 확정된 우상호는 2026년 2월27일 페이스북에 “이번 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며 “강원도민 속으로 더욱더 깊이 들어가 반드시 도민의 선택을 받겠다”고 밝혔다.
| ▲ 우상호 강원도지사 당선인이 2026년 6월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이한열 동산에서 열린 제39주기 이한열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자격으로 추모식 참석
우상호는 강원도지사 당선인 신분으로 2026년 6월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이한열 동산에서 열린 제39주기 이한열 추모식에 참석했다.
우상호는 이 자리에서 “박종철 열사가 숨졌을 때 두려움을 가졌지만 이 열사의 피격으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며 “오늘은 이 사람으로 인해 두려움을 이겨낸 그때의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것이 민주주의 회복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되새기는 자리”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식에서는 민주유공자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민주유공자법은 4·19와 5·18을 제외한 다른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유공자로 지정해 본인과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24년 5월 국회 본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의결됐으나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유공자법과 관련해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2026년 5월29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분(민주유공자)들이 대한민국 민주화, 6·10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며 “하반기 국회가 구성되면 가장 우선순위로 처리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앞서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지명됐을 때 우상호는 2025년 6월9일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이한열동산에서 열린 고 이한열 열사 38기 추모식에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자격으로 참석해 “힘이 닿는 한 민주유공자예우관련법(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책임지고 관철하겠다”고 밝혔다.
우상호는 “지난 겨울과 이번 대선, 광장의 많은 분을 보며 이한열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는 게 아닌가 감동을 여러 번 느꼈다”며 “추모식을 통해 다시 한번 민주주의에 대한 소중함을 절실히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유족을 대표해 나선 이한열 열사의 큰 누나 이숙례씨는 다른 민주화운동 유가족의 명예 회복을 당부했다.
연대생이었던 이한열 열사는 1987년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우상호는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고 이 열사 장례 때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후로도 우상호는 이한열 추모사업회에서 활동해왔으며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2년 1월 배은심씨가 별세했을 때도 우상호가 호상(護喪)을 맡았다.
| ▲ 우상호 청와대 정무수석이 2026년 1월18일 청와대에서 6·3 지방선거 강원도지사 선거 출마를 위해 사직한 뒤 기자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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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초대 정무수석 맡아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6월7일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정무수석에, 이규연 전 JTBC 고문을 홍보소통수석에, 오광수 변호사를 민정수석에 각각 임명했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이번 인선과 관련해 “
이재명 대통령은 ‘모든 국민을 섬기고 아우르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에 따라 국민통합과 소통을 책임질 적임자들을 선택했다”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실은 우상호 정무수석 임명을 두고 “여야 상생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춘 인물로 통합의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며 “오랜 의정 경험을 바탕으로 국정 전반에 대한 높은 이해와 합리성, 뛰어난 정무 감각을 겸비해 대통령실과 국회의 가교역할을 훌륭히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우상호는 임명 직후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대표 권한대행, 김용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김선민 조국혁신당 대표대행, 천하람 개혁신당 대표대행, 김재연 진보당 상임대표,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 한창민 사회민주당 대표 등을 예방해
이재명 대통령의 인사말을 전하고 정국 협조를 당부했다.
우상호는 2025년 6월10일 오후 국회를 찾아
우원식 국회의장을 포함한 여야 지도부를 예방했다. 11일에는 조국혁신당·개혁신당·진보당 대표, 12일에는 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 대표를 잇따라 예방했다.
대통령실은 2025년 6월10일 보도자료를 통해 우 수석이 우 의장과 여야 지도부를 만나 국정 전반에 대한 협력과 소통을 당부하고 국회와 협치 강화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가 국회·정치권의 소통·협력·타협을 강화해 민생 위기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행보로 실질적 협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설명이다.
우상호는 “민생 앞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며 “야당과도 진지하게 협의하고,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면서 협치의 가교 역할을 성심껏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싱크탱크 더미래연구소장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내 최대 의원 모임인 ‘더좋은미래’(더미래)와 싱크탱크 더미래연구소가 2025년 4월21일 공동으로 정책자료집을 발간했다. 이번 자료집은 ‘불평등과 격차 완화’를 핵심 열쇠말로, 향후 대한민국의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료집에는 공공의료, 국민연금, 돌봄, 교육, 부동산, 노동, 농업, 검찰개혁, AI 등 총 11 개의 주제가 담겼으며, 이들 주제는 내부 토론뿐 아니라 외부 전문가들의 연구와 분석 결과도 반영했다 .
더미래연구소 소장인 우상호는 “심각한 불평등과 격차는 극우 정치와 사회적 분열의 근원이 됐다”며 “이번 대선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 정의롭고 따뜻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정책자료집은 더좋은미래 소속 국회의원 및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집필했으며, 향후 대선 국면에서 당의 정책 플랫폼과 공약 개발에 실질적인 기초 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
앞서 더미래와 더미래연구소는 2025년 2월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불평등과 격차 해소’ 연속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는 ‘보건·복지 분야, 공공의료 확충 및 돌봄 복지국가 실현’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더미래는 지금 민주당이 해결해야 할 사회 문제를 격차 해소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진보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미래는 이날을 시작으로 ‘농업·농촌’, ‘부동산·교육’을 주제로 연속 토론회를 가진 뒤 2025년 3월12일에는 ‘진보의 새로운 모색’이라는 주제로 총정리 토론회를 열었다.
더미래는 2014년 민주당에서 개혁 성향의 초ㆍ재선 연구 모임으로 출범한 당내 정책 모임이다. 이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며 친명·친문 등 계파를 초월한 중도·합리적 성향의 의원 모임으로 자리를 잡았다. 제 21대 국회에선 50여 명까지 숫자가 늘었고, 22대 국회에서 조직을 재·개편해 2025년 현재는 현역 의원 35명이 더미래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22대 총선에서 ‘민주당 1호 불출마’ 선언
우상호는 2024년 제22대 총선을 맞아 더불어민주당의 1호 총선 불출마자가 됐다. 2년 전부터 불출마 결심을 했던 그는 2023년 11월 중앙당에 불출마 확인서를 제출하면서 이를 공식화했다.
우상호는 자신이 불출마를 선택했던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들었다.
첫번째는 ‘국회 내에서 더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는 “국회의원을 하면서 대통령 탄핵까지 했다”며 “그 이상의 역할을 국회에서 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두번째는 초·재선 때의 열정이 식었다는 점이다.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빈도 수가 늘면서 지역구 관리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우상호는 “마음만 먹으면 ‘선수’를 더 늘릴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신 광역단체장에 도전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맞아 당내 경선에 출마한 바 있다. 하지만 박영선 전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에게 서울시장 민주당 후보 자리를 내주면서 경선에서 탈락했다.
제22대 총선 불출마 이후로는 강원도지사 도전설이 정치권에 돌았다. 그의 고향이 강원도 철원이다.
우상호는 강원지사 출마설을 두고 “아직 지역은 정하지 않았다”며 “광역단체장에 도전하고 싶은 이유는 행정 등의 결정권이 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통 진보인사로서 내 철학과 소신을 펼쳐보이고 싶다”고 덧붙였다.
| ▲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3년 3월7일 오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10.29 이태원참사 독립적 조사기구 특별법 "왜 필요한가"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위 위원장 맡아
우상호는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조특위를 이끌었다.
우상호는 2023년 1월17일 국조특위 활동을 끝마치며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위정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책임 떠넘기기식 발언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기간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우상호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문책하지 않는 일을 두고 “책임자들의 무책임함을 더 키우는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매우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정조사에서 서울시·용산구의 인파관리 대책 미흡, 경찰의 신고 대응 체계 붕괴, 대통령실의 위기대응 체계의 허술함 등 참사 발생 원인과 책임 규명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예비조사 단계에서 유가족, 생존자, 상인 등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부분을 한계점으로 짚었다. 독립적인 조사 기구를 설립해 참사 당일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우상호는 남은 과제로 “형사 처벌을 위한 노력은 특검(특별검사)으로 가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만들기 위해선 별도의 조사 기구를 만들어서 전수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부상자·목격자 전언을 바탕으로 세세하게 사건을 재구성해봐야 한다. 이를 기초로 평지 또는 비탈진 데서 인파 이동은 어땠는지 등을 조사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만들어야 유사한 유형의 인파 사고를 막을 수 있지 않겠나.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여야가 조사위원들을 추천해서 그분들이 전체 사건을 들여다보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앞서 우상호는 2022년 11월24일 더불어민주당의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됐다.
우상호는 과거 민주당 원내대표로서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 특별조사를 이끌었던 경험이 있다.
이태원참사 국정조사는 첫 회의부터 여야 사이 이견 노출로 순탄치 않은 모습을 보여 위원장인 우상호의 역할에 관심이 집중됐다.
우상호는 과거 세월호 참사 당시 유가족들과 소통을 하면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경험도 있다.
△‘지지율 역전’ 약속 지킨 비대위원장
우상호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2022년 8·28 전당대회에서
이재명 전 대선 후보가 신임 당 대표에 선출됨에 따라 그에게 바통을 넘기고 ‘평의원’으로 돌아갔다.
앞서 우상호는 2022년 6월7일 의원총회에서 비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사흘 뒤인 6월10일 당 중앙위 의결로 ‘우상호 비대위’를 공식 출범했는데 79일 만에 임무를 마무리한 셈이다.
4선의 우상호는 2022년 3·9 대선과 같은해 6·1 지방선거 연패로 격랑에 휩싸인 당을 수습할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86(80년대 학번·60년대생) 그룹’의 대표주자인 우상호는 비교적 계파색이 옅다는 점이 강점으로 꼽혔다.
우상호는 비대위 기간 안정적 당 운영을 통해 선거 패배 후유증을 어느 정도 씻고 당내 갈등을 큰 잡음 없이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매주 일요일마다 기자 간담회를 열어 현안에 대응하며 대여 전선의 전면에 서는 한편 언론과의 소통에도 적극 나섰다.
간담회 등을 통해 서해 피살 공무원 사건이나 북송 어민 사건 등 전임
문재인 정부 시절 일어난 일들에 대한 여권의 공세에 철통 방어에 나서는 한편
윤석열 정부의 ‘국정 난맥상’에 대한 대여 공세를 주도했다.
우상호가 ‘강한 야당’, ‘유능한 민생 야당’을 표방한 것에 발맞춰 원내에서는 고유가·고물가·고금리·고환율 시대에 직장인과 서민 등이 어려움을 겪는다며 ‘민생우선실천단’을 발족, 여러 현장을 시찰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비대위원장 우상호는 “지지율을 역전시키고 떠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떠나게 됐다.
지방선거 참패 후 20%대까지 떨어진 민주당 지지율이 여당인 국민의힘을 앞서는 여론조사 결과들이 속속 나왔기 때문이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양당간 지지율 추이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우상호는 2022년 8월26일 고별 기자회견에서 “25∼26% 정도에서 머물렀던 정당 지지율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야 지지율이 비슷하거나 조금 앞서는 것 보면, 국민들이 민주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필요하다고 해주는 것 같다”고 자평했다.
유상호는 새 지도부의 과제를 두고 “정책과 노선에 대해 근본적으로 점검했으면 좋겠다.
윤석열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면 반사이익으로 지지율을 올릴 수 있으나, 정작 민주당의 새로운 행동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면 2년 뒤 총선에서 고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우상호는 제 20대 대선에서는
이재명 후보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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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시절 두 차례 서울시장 도전
우상호는 2021년 4월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같은 해 3월1일 치러진 민주당 당내 후보 경선에서 박영선 전 중소기업벤처부 장관과 맞붙었다가 패했다. 우상호의 서울시장 도전은 이번이 두 번째다.
민주당 경선은 당원(50%)·여론조사(50%) 투표로 진행됐다. 우상호는 득표율 30.44%로 박영선 전 장관(69.56%)에 패배했다.
앞서 우상호는 2021년 4월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가장 먼저 서울시장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는 2020년 12월13일 일찌감치 출마 선언을 하며 ‘서울, 다시 시작’, ‘준비된 서울시장’을 기치로 내걸었다.
앞서 우상호는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참여해 박영선, 박원순 후보와 대결했고 지지율 14.1%로 3위를 기록했다. 우상호는 2011년 보궐선거 당시 범야권 후보였던 박원순 전 시장 캠프에서 공동 대변인을 맡은 바 있다.
| ▲ 우상호 더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가 2017년 2월11일 오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촛불집회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주도
우상호는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다.
국정농단 사태가 탄핵정국으로 이어지자 우상호는 초반부터 진영 대결로 가면 보수진영이 결집하고 탄핵소추안에 필요한 새누리당 내 40석이 넘어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우상호는 “정의당처럼 탄핵과 하야 움직임을 같이 갈 생각은 없다”고 말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직접 약속하는 2선 후퇴 등 절충안을 제시하는 온건 전략을 폈다. 진영 대결 인상을 주지 않도록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 측에도 물러서 있는 게 좋겠다고 전했고 문 전 대표 쪽도 납득했다.
이러한 우상호의 전략은 촛불집회와 맞물려 시너지를 냈다.
문재인 전 대표의 거국내각 제안이 거부되자 촛불집회 규모가 급속도로 불어났다. 친박계에 불만을 품고 있고 국정농단의 책임을 공유하기 싫어한 비박계는 우상호와 협상했다. 여기에서 도출된 절충안인 조기하야 요구를 청와대가 거부하자 민주당은 결국 탄핵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2016년 12월2일 탄핵소추안 상정이 불발되고 다음날 촛불집회에 230만여 명이 나오는 등 촛불민심이 거세졌다.
우상호는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중요한 역할을 다른 정당에 대부분 양보했다. 탄핵소추안 제안설명은 김관영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진행하고 헌법재판소를 담당할 탄핵소추위원단장은 비박계인 권성동 의원이 맡겠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탄핵의 상징적 장면을 넘겨주는 대신 탄핵안 가결을 위한 표 계산에 집중했다.
2016년 12월9일 기준 국회 구성은 새누리당 128석, 더불어민주당 121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무소속 7석이었다. 재적의원 300명 가운데 200명이 찬성해야 탄핵안이 가결된다. 우상호는 의결 당일 당 지도부에 222표 내지 226표가 확보됐다고 보고했다. 결과는 234표가 나왔다. 민심의 압박을 못 이긴 새누리당 의원들이 추가로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됐다.
우상호는 이에 앞서 백남기 농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릴 수 있도록 힘썼다.
2016년 9월12일 국회에서 백남기 농민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2015년 11월14일 제1차 민중총궐기 대회 현장에서 고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의식을 잃은 지 304일 만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이 ‘백남기 청문회’를 열겠다고 처음 선언한 것은 우상호 원내지도부 출범 직후인 2016년 5월26일이었다. 국민의당과 정의당까지 야3당이 합의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그해 8월 대우조선해운 구조조정 문제가 국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권 실세들이 청와대 서별관에 모여 구조조정 문제를 졸속으로 합의했고 부실을 야기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우상호는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협상을 벌여 최경환 의원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서별관 청문회’ 증인에서 제외하는 대신 백남기 청문회를 여는 것으로 합의했다. 당시 민주당의 정치적 실익이 크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의외의 결과라는 반응과 더불어 민주당의 무능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백남기 청문회의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청문회장에 출석한 강신명·이철성 전현직 경찰청장은 혐의를 부인하고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기까지 전개된 과정을 볼 때 백남기 청문회는 ‘촛불혁명’의 징검다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썰전’ 출연해 배우 우현, 안내상과 학생운동
우상호는 2018년 2월11일 저녁 방송된 JTBC ‘썰전’에서 연세대학교 동문인 배우 우현, 안내상과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일화를 털어놨다.
이날 방송된 썰전에는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진 서울대생 고 박종철 열사의 31주기를 맞아,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의 선두에 섰던 우상호가 출연했다.
이날 방송에서 공개된 사진에는 박종철 열사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우상호와 그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배우 우현의 모습이 담겼다.
우상호는 “저의 신혼집에서 안내상, 우현과 함께 지냈다”라며 두 배우와의 남다른 인연을 전했다.
우상호는 “우현씨는 당시 집회를 주도하는 연세대 사회부장이었다”며 “사진을 잘 보면 우현 씨 머리는 삭발을 한 상태인데, 이는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 조치를 발표했을 때 연세대 학생들이 항의하는 의미로 머리를 깎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상호는 “우현에게 ‘단식을 할래? 삭발을 할래?’ 했는데 우현이 굶는 건 못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우현이 삭발을 하고 내가 단식을 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MC 김구라씨가 “안내상씨도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셨는데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질문했다.
우상호는 “당시 집회는 총학생회 집행부가 주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유시민 작가는 “내가 알기로는 안내상씨는 지하에서 더 과격한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우상호는 1988년 미국 문화원 도서관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던 안내상을 언급하며 “안내상씨는 미국을 못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국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배우 안내상씨는 1988년 폭탄 미수사건으로 총포·도검· 화약류 단속법 위반으로 8개월 복역한 바 있다.
△서대문 지역구에서 연세대 동문 이성헌과 여섯 차례 맞붙어
우상호는 1988년 총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평화민주당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이후 2000년 제16대 총선를 앞두고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에 '젊은 피'로 영입됐다. 서울 서대문구갑 지역에 출마해 득표율 45.16%를 얻었지만 연세대 81학번 동문인 이성헌 신한국당 후보(47.01%)에게 밀려 낙선했다.
우상호는 4년 뒤인 제 17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대문갑에서 이성헌 의원과 다시 맞붙었다. 이성헌 후보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총선 직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후폭풍이 불면서 전세가 역전됐다. 우상호는 46.06% 득표율을 얻어 이성헌 후보를 2.25%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국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제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치러진 데다 당시 서울 전역에서 뉴타운 공약 바람이 불면서 이성헌 후보가 현역인 우상호를 상대로 약 8% 차이의 격차를 보이며 설욕에 성공했다.
이후 제 19대 총선에선 수도권에서 MB 심판론이 대세가 돼 우상호가 현역인 이성헌 후보를 8.73%포인트 차이로 여유 있게 따돌리며 국회에 재입성했다.
제 20대 총선에선 이성헌과 우상호의 다섯 번째 맞대결이 성사됐다. 서로 2승2패를 주고 받으면서 누가 3선 고지에 먼저 깃발을 꽂을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당 사무부총장을 지낸 이성헌 후보는 친박 인사임을 강조하면서 집권여당 3선 의원의 힘을 강조했다. 반면 다른 선거구와 달리 국민의당 후보가 없어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인 우상호는 박근혜 정부 심판론으로 맞불을 놓았다. 결과는 우상호 후보(54.88%)가 두 자릿수가 넘는 넉넉한 격차(14.61%포인트)로 3선 고지에 올랐다.
| ▲ 우상호 연세대 총학생회장(앞줄 가운데)이 1987년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진 뒤 열린 영결식에서 영정을 들고 있다. 우현 연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이 옆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다. 우현씨는 나중에 배우가 됐다. <우상호 의원 페이스북> |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6월항쟁 이끌어
우상호는 군부독재에 마침표를 찍은 1987년 6월항쟁의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우상호는 원래 학생운동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대 전역 후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 운동권 대학생들의 모습이었는데 우상호는 이례적으로 군 복무 중에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의 소개로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여했다. 문학을 함께 공부했던 친구 박래군씨가 먼저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우상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박래군씨는 나중에 인권운동에 평생 헌신했다.
1987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학생운동 문화의 변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화염병과 투석전 중심의 학생운동에서 다수가 참여하는 온건한 운동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에 강성 학생운동 활동가들로부터 비판도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 이야기를 하던 도중 전두환도 잘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우상호가 학생회장으로서 대학생 시위를 비폭력으로 전환하자 학생들의 참여가 급격하게 늘었다.
전두환 정권이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내놓자 야당, 시민사회, 학생운동이 강경해지는 가운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이에 서울의 학생운동 진영은 대규모 집회를 추진하고 집회 전날인 1987년 6월9일 예비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우상호의 대학 후배인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이후 6월항쟁 과정에서 우상호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우상호는 2026년 4월24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987년 6월 항쟁 당시 잡혀갔을 때는 이한열 열사가 죽어서 검찰에 항의하러 갔다가 덕수궁 앞에서 붙잡혔다”며 “죄목은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한 것이 ‘국가모독죄’라는 것이었다. 내가 출소했더니 그 법이 없어졌더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