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대책위원장 올라 선거 패배 수습 임무 맡아
우상호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대선과 지선의 연이은 패배로 수렁에 빠진 민주당을 수습해야 하는 임무를 맡았다.
민주당은 2022년 6월7일 의원총회를 열어 우상호를 비대위원장으로 추인했다. 4선 이상 중진 의원들이 우상호를 추천했고 이에 의원들이 사실상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비대위원으로는 초선의원 대표로 이용우 의원, 재선 대표로 박재호 의원, 3선 대표로 환경부 장관 출신의 한정애 의원이 참여했다.
원외 인사로는 김현정 원외위원장협의회장이 비대위에 포함됐으며 당연직으로 박홍근 원내대표가 이름을 올렸다.
이후 민주당 중앙위원회는 6월10일 비대위 인준안을 통과시켰다. 전체 중앙위원 625명 가운데 72.32%인 452명이 투표했으며 찬성 419명(92.7%), 반대 33명(7.3%)으로 집계됐다.
비대위 공식출범 이후 여성·청년 몫 비대위원으로 지방선거에서 최연소 도의원으로 당선된 서난이 전북도의원이 선임됐다.
우상호는 8월28일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를 선출할 때까지 당을 이끈다. 민주당은 6월17일 전당대회준비위원회를 출범하고 전대 준비에 착수했다.
| ▲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과 이재명 의원이 2022년 6월24일 충남 예산군 덕산리솜리조트에서 열린 '새롭게 도약하는 민주당의 진로 모색을 위한 국회의원 워크숍'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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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시절 서울시장 두 차례 도전
우상호는
문재인 정부에서 통일부장관 후보로 오르내렸다.
문재인 정부 첫 통일부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오른 바 있으나 일축했다. 그 뒤
문재인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에는 조명균 장관이 임명됐다.
2020년 6월 들어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김연철 통일부 장관이 물러났고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내고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은 우상호와
이인영 의원,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유력한 후임 통일부 장관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우상호는 또다시 입각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이인영 의원이 통일부 장관에 올랐다.
우상호는 내각에 참여하는 대신 서울시장에 두 차례 도전했다.
우상호는 2018년 1월21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를 통해 "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도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서울시장에 출마하려 한다"고 말하며 서울시장 도전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7년 말부터 민주당 후보 적합도 조사를 비롯해 다자 구도와 각 정당 후보의 가상대결 등 모든 경우의 수를 전제로 한 여론조사에서 항상 1위를 차지했다.
박원순 시장의 아성에 도전하려던 당내 주자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출마를 접었고 우상호와
박영선 의원,
박원순 시장의 3파전 구도가 굳어지면서 박 시장으로 '당심 쏠림' 현상이 가속화했다.
이에 우상호와
박영선 의원은 30%대 득표율로 2위를 확보한 상태에서 박 시장의 득표율을 50% 이내로 묶은 뒤 결선투표에서 진짜 승부를 낸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구상은 박 시장의 압승으로 무산됐다.
민주당이 4월18일부터 4월20일까지 권리당원 ARS투표(50%)와 휴대폰 안심번호 여론조사(50%)로 경선을 실시한 결과 박 시장은 66.3% 지지율로 승리했다.
박영선 의원은 19.6%, 우상호는 14.1%를 각각 기록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문 사건 및 사망 이후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열리자 우상호는 다시 서울시장에 도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선에서 30.44% 득표에 그쳐 69.56%를 얻은
박영선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박영선 후보조차 본선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완패를 당하면서 향후 우상호가 서울시장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서울시장에 당선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졌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비례대표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훗날 당선 이후 각종 문제가 밝혀지면서 논란 끝에 제명된 양정숙 의원과 김홍걸 의원의 비례대표 공천을 걸러내지 못한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주도
우상호는 원내대표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했다.
국정농단 사태가 탄핵정국으로 이어지자 우상호는 초반부터 진영 대결로 가면 보수진영이 결집하고 탄핵소추안에 필요한 새누리당 내 40석이 넘어오지 않을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
우상호는 "정의당처럼 탄핵과 하야 움직임을 같이 갈 생각은 없다"고 말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직접 약속하는 2선 후퇴 등 절충안을 제시하는 온건적 전략을 폈다. 진영 대결 인상을 주지 않도록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 측에도 물러서 있는 게 좋겠다고 전했고 문 전 대표 쪽도 납득했다.
이러한 우상호의 전략은 촛불집회와 맞물려 시너지를 냈다.
문재인 전 대표의 거국내각 제안이 거부되자 촛불집회 규모가 급속도로 불어났다. 친박계에 불만을 품고 있고 국정농단의 책임을 공유하기 싫어한 비박계는 우상호와 협상했다. 여기에서 도출된 절충안인 조기하야 요구를 청와대가 거부하자 민주당은 결국 탄핵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2016년 12월2일 탄핵소추안 상정이 불발되고 다음날 촛불집회에 230만여 명이 나오는 등 촛불민심이 거세졌다.
우상호는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중요한 역할을 다른 정당에 대부분 양보했다. 탄핵소추안 제안설명은 김관영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진행하고 헌법재판소를 담당할 탄핵소추위원단장은 비박계인 권성동 의원이 맡겠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탄핵의 상징적 장면을 넘겨주는 대신 탄핵안 가결을 위한 표 계산에 집중했다.
12월9일 기준 국회 구성은 새누리당 128석, 더불어민주당 121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무소속 7석이었다. 재적의원 300명 가운데 200명이 찬성해야 탄핵안이 가결된다. 우상호는 의결 당일 당 지도부에 222표 내지 226표가 확보됐다고 보고했다. 결과는 234표가 나왔다. 민심의 압박을 못 이긴 새누리당 의원들이 추가로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됐다.
우상호는 이에 앞서 백남기 농민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릴 수 있도록 힘썼다.
2016년 9월12일 국회에서 백남기 농민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2015년 11월14일 제1차 민중총궐기 대회 현장에서 고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의식을 잃은 지 304일 만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이 '백남기 청문회'를 열겠다고 처음 선언한 것은 우상호 원내지도부 출범 직후인 2016년 5월26일이었다. 국민의당과 정의당까지 야3당이 합의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그해 8월 대우조선해운 구조조정 문제가 국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권 실세들이 청와대 서별관에 모여 구조조정 문제를 졸속으로 합의했고 부실을 야기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우상호는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협상을 벌여 최경환 의원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서별관 청문회' 증인에서 제외하는 대신 백남기 청문회를 여는 것으로 합의했다. 당시 민주당의 정치적 실익이 크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의외의 결과라는 반응과 더불어 민주당의 무능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백남기 청문회의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청문회장에 출석한 강신명·이철성 전현직 경찰청장은 혐의를 부인하고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기까지 전개된 과정을 볼 때 백남기 청문회는 '촛불혁명'의 징검다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우상호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4.13 총선으로 민주당이 오랜만에 다수당이 된 데다 대선을 한 해 앞둔 시점이라 누가 원내대표가 되는지에 관심이 쏠린 선거였다.
우상호는 1차 투표에서 경쟁자인 우원식 의원에게 4표 차로 졌으나 이어진 결선 투표에서 63 대 56 일곱 표 차로 역전승을 거뒀다.
우상호는 원내대표로서 초선의원들이 활동할 공간도 열어줬다.
통상 3선 이상은 원내대표나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재선의원은 상임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입법 우선순위를 정하는 재량권이 주어진다. 반면 초선의원들은 당내 중진과 계파, 당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거수기'역할에 그친다는 지적이 있다.
우상호는 의원 선수에 상관 없이 대정부 질의나 국정감사를 이끌어갈 대표 의원을 배당하는 '의원책임제'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20대 국회 활동에 민주당 의원 중 53명에 이르는 다수 초선의원들이 자발성을 지니고 참여하면서 주요 태스크포스(TF)나 국정조사에서도 초선의원들이 활약할 수 있게 됐다. 대정부 질문이나 국정감사에서 고민한 부분을 입법하라고 권장했기에 법안의 완성도가 올라간 것도 긍정적 변화로 평가받았다.
우상호는 박근혜 정부의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안을 통과시켜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2016년 9월24일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이 가결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이자 헌정사상 여섯 번째로 국회에서 국무위원 해임 건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김재수 장관 해임 건의안 통과는 20대 국회의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4.13 총선으로 16년 만에 여소야대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다수 야당이 정부 여당에 승리를 거둔 사건이었다. 국민의당이 당론을 정하지 않은 가운데 우상호는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와 함께 해임 건의안을 발의하고 주도했다.
해임 건의안 통과 뒤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재수 장관이 버티며 물러나지 않아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국무위원은 모두 스스로 물러났던 전례가 깨졌지만 이 시기 이후 국정감사가 시작됐고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정계에 입문해 서대문구에서 연세대 동문 이성헌과 여섯 차례 맞붙어
우상호는 1988년 총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평화민주당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이후 2000년 16대 총선를 앞두고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에 '젊은 피'로 영입됐다. 서울 서대문구갑 지역에 출마해 득표율 45.16%를 얻었지만 연세대 81학번 동문인 이성헌 신한국당 후보(47.01%)에게 밀려 낙선했다.
우상호는 4년 뒤인 17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대문갑에서 이성헌 의원과 다시 맞붙었다. 이성헌 후보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총선 직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로 후폭풍이 불어 전세가 역전됐다. 우상호는 46.06% 득표율을 얻어 이성헌 후보를 2.25%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국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에 치러진 데다 당시 서울 전역에서 뉴타운 공약 바람이 불면서 이성헌 후보가 현역인 우상호를 상대로 약 8% 차이의 격차를 보이며 설욕에 성공했다.
이후 19대 총선에선 수도권에서 MB 심판론이 대세가 돼 우상호가 현역인 이성헌 후보를 8.73%포인트 차이로 여유 있게 따돌리며 국회에 재입성했다.
20대 총선에선 이성헌과 우상호의 다섯 번째 맞대결이 성사됐다. 서로 2승2패를 주고 받으면서 누가 3선 고지에 먼저 깃발을 꽂을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당 사무부총장을 지낸 이성헌 후보는 친박 인사임을 강조하면서 집권여당 3선의 힘을 강조했다. 반면 다른 선거구와 달리 국민의당 후보가 없어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인 우상호는 박근혜 정부 심판론으로 맞불을 놓았다. 결과는 우상호 후보(54.88%)가 두 자릿수가 넘는 넉넉한 격차(14.61%포인트)로 3선 고지에 올랐다.
우상호는 20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첫 원내대표를 맡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21대 총선에서 우상호와 이성헌의 여섯 번째 맞대결이 성사됐다. 4년 전과 비교해 이상헌 후보의 득표율(41.64%)이 소폭 상승했지만 우상호가 53.24% 득표율로 4선에 성공했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6월항쟁 이끌어
우상호는 군부독재에 마침표를 찍은 6월항쟁의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우상호는 원래 학생운동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대전역 후 운동권과 멀어지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 운동권 대학생들의 모습이었는데 우상호는 이례적으로 군 복무 중에 학생운동을 결심하고 제대 후 오연호 현 오마이뉴스 대표의 소개로 사회과학 세미나에 참여했다. 문학 친구였던 시민사회활동가 박래군씨가 먼저 학생운동에 뛰어들면서 우상호에게도 영향이 갔다고 한다.
1987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어 학생운동 문화를 바꾸었다. 화염병과 투석전 중심에서 다수가 참여하는 온건한 운동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에 강성 지하서클로부터 고초를 겪기도 했다. 운동권 사람들과 전두환 대통령 이야기를 하던 도중 전두환 대통령도 잘한 점이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에게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학생회장이 된 우상호가 학생운동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전환시키자 학생들의 참여가 급격하게 늘었다.
전두환 정권이 4.13 호헌조치를 내놓자 야당, 시민사회, 학생운동이 강경해지는 가운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이에 서울의 학생운동 진영은 대규모 집회를 추진하고 집회 전날인 1987년 6월9일 예비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우상호의 대학 후배인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이후 6월항쟁 과정에서 우상호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