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후보자에 지명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2022년 4월3일 한덕수를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2008년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14년 만이다.
윤석열 당선인은 "정파와 무관하게 오로지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국정의 핵심 보직을 두루 역임하신 분"이라며 "민관을 아우르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각을 총괄하고 조정하면서 국정과제를 수행해나갈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한덕수는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받은 직후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자실에서 소감을 발표했다.
한덕수는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내외적 경제와 지정학적 여건이 매우 엄중한 때에 국무총리로 지명되는 큰 짐을 지게 돼 영광스러우면서도 매우 무겁고 큰 책임을 느낀다"며 "행정부가 중심이 되는 정책을 꾸준히 만들고 치열한 토론과 소통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협치와 통합이 굉장히 중요한 정책 요소가 될 것"이라며 "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윤 당선인과 행정부, 입법부, 국민과 협조하며 좋은 결과를 내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한덕수는 국가의 중장기적 운영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4대 과제로 국익 외교와 국방 자강력, 재정 건전성, 국제수지 흑자, 생산력 높은 국가를 제시했다.
한덕수는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4월10일 8명의 국무위원 후보자 추천서에 자필서명했다.
아직은 총리 후보자일 뿐이어서 헌법상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할 수 없지만 그에 준해 추천을 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총리 후보자의 국무위원 추천에 관한 법 규정도 없다.
한덕수는 이에 대해 "말하자면서 (총리 후보자가) 사인을 한 것"이라며 "내각과 대통령 사이 협력의 가치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인정하는 것을 인수위 단계에서부터 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 ▲ 2017년 6월26일 한덕수 전 주미대사(왼쪽 세 번째)가 문재인 대통령(왼쪽 두 번째), 이홍구 전 주미대사(왼쪽), 홍석현 전 주미대사와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간담회장으로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명박 정부 초대 주미대사 지내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지냈음에도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대사에 임명됐다. 주미대사는 국내 의전상으로는 총리보다 낮은 장관급에 해당하지만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중요도가 높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덕수를 주미대사로 발탁한 것은 오바마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결정으로 풀이됐다.
한덕수는 미국 유학파이면서 김대중 정부의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시동을 걸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직속 한미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 겸 한미FTA 특보를 지내며 한미FTA 막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에서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뒤 한미FTA 재협상을 시사하는 발언이 잇따라 나오자 이명박 정부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한덕수를 주미대사에 임명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아울러 진보 성향의 이전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인사를 주미대사로 보냄으로써 미국의 민주당 정부인 오바마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 했다는 풀이도 나왔다.
주미대사에서 퇴임한 직후인 2012년 2월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한덕수가 무역협회장에 선임된 데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한미FTA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강행처리된 뒤 민주당이 '폐기', '재재협상' 등을 외치며 정부·여당과 강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한덕수에게 한미FTA 이행 과정을 챙기는 일을 맡긴 것으로 분석됐다.
무역협회장 시절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지론에 따라 매년 12개 지방지부를 순회하며 420여 개 기업의 애로사항을 듣고 무역업계의 해외시장 진출 확대를 지원했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
2004년 2월 이영탁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이 총선에 차출되면서 한덕수가 참여정부의 2대 국무조정실장으로 공직에 복귀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하며 고건·이해찬 총리와 손발을 맞췄다.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이전 등에 관한 정부 업무를 지원하면서 정무·안보 관련 경험을 쌓았다.
2005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됐다. 재임 기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금융-산업자본 분리 정책을 이끌었다. 쌀에 부과하는 관세를 완전 폐지하는 쌀 시장 개방으로 농민들로부터 쌀 세례를 받기도 했다.
2006년 이해찬 국무총리가 삼일절에 골프를 친 사건으로 사퇴한 뒤 한명숙이 국무총리에 임명될 때까지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겸임했다.
부총리 퇴임 직후인 2006년 8월부터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미 FTA 협상을 주도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3월 국무총리에 임명돼 2008년 2월까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총리 재임 중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뒤에 북한 내각총리 김영일과 남북총리회담을 했다. 이 외에 여야와 소통하며 국민연금법, 장기요양보험법, 기초노령연금법 등을 입법하는 성과를 냈고,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에도 힘을 보탰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미FTA 추진
김대중 정부 시절 1998년 3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냈다.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최초로 추진했고,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관련 실무도 수행했다. 당시 여러 차례 산업자원부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2001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탁된 데 이어 이듬해 경제수석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000년에 중국이 한국산 휴대폰 수입관세를 인하하는 대신 한국이 중국산 마늘 수입 규제를 완화하는 이면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른마 '마늘 파동'이 일어나자 2002년 협상 책임을 지고 공직생활을 접었다.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김영삼 정부 때 통상 분야에서 활약
한덕수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에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휘하의 산업담당비서관을 맡았다. 1994년 청와대에서 나와 관리관으로 승진하며 상공부로 복귀해 기획관리실장, 통상무역실장을 지냈다.
통상무역실장으로 일하는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추진과 대일본 무역규제 해제의 실무를 맡았고, 한미 자동차 협상에 정부 대표로 참여해 결렬 직전이었던 협상을 타결시켰다.
1996년 차관으로 승진해 1997년 3월까지 특허청장을 지냈다. 1997년 3월부터 1998년 3월까지 통상산업부 차관으로 근무했으며, 그 사이에 IMF 사태가 발생해 이를 수습하는 업무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0년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역복무와 겹쳐 경제관료로서의 사실상 첫발은 경제기획원에서 떼었다.
1977년 미국으로 유학 가 197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2년 부처간 교류 때 상공부로 자리를 옮겨 과장으로 재직하다가 휴직계를 제출하고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가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만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다시 상공부에서 근무하다가 1989년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상공부 중소기업국 국장에 임명됐다.
1990년 산업정책국장을 맡아 우리나라 산업정책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공업발전법'을 만들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가운데 산업 관련 정책의 실무도 맡았다.
1992년 이사관으로 승진한 뒤 1993년 1월 전자정보공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