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정치

[Who Is ?] 한덕수 국무총리

관료 출신 참여정부 총리, 진영 오가는 처신의 달인 [2022년]
김남형 기자 knh@businesspost.co.kr 2022-04-14 0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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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한덕수 국무총리
▲ 한덕수 국무총리.

한덕수는 국무총리이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총리로 임명돼 새 정부의 국정수행을 진두지휘한다.

1949년 6월18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경제학과)을 졸업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3학년 때 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발을 들였다.

상공부에서 대외 경제협력을 담당하는 직책을 두루 거쳤고 김대중정부에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중국의 한국산 휴대폰 수입규제와 한국의 중국산 마늘 수입규제를 맞바꿔 완화하기로 한 '한중 마늘협상' 관련 파동으로 경제수석에서 경질돼 잠시 공직생활을 떠났다.

노무현정부에서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으로 공직에 복귀해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체결지원위원장을 맡아 한미FTA 협상을 주도한 뒤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이명박정부에서 주미대사로 활동했고 박근혜정부에서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지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통 관료 출신으로 꼼꼼하면서도 성품이 원만하고 일처리를 합리적으로 한다는 평을 받는다.

경영활동의 공과


△국무총리 후보자에 지명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2022년 4월3일 한덕수를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2008년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14년 만이다.

윤석열 당선인은 "정파와 무관하게 오로지 실력과 전문성을 인정받아 국정의 핵심 보직을 두루 역임하신 분"이라며 "민관을 아우르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각을 총괄하고 조정하면서 국정과제를 수행해나갈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한덕수는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받은 직후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자실에서 소감을 발표했다.

한덕수는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내외적 경제와 지정학적 여건이 매우 엄중한 때에 국무총리로 지명되는 큰 짐을 지게 돼 영광스러우면서도 매우 무겁고 큰 책임을 느낀다"며 "행정부가 중심이 되는 정책을 꾸준히 만들고 치열한 토론과 소통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협치와 통합이 굉장히 중요한 정책 요소가 될 것"이라며 "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윤 당선인과 행정부, 입법부, 국민과 협조하며 좋은 결과를 내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한덕수는 국가의 중장기적 운영을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4대 과제로 국익 외교와 국방 자강력, 재정 건전성, 국제수지 흑자, 생산력 높은 국가를 제시했다.

한덕수는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4월10일 8명의 국무위원 후보자 추천서에 자필서명했다.

아직은 총리 후보자일 뿐이어서 헌법상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행사할 수 없지만 그에 준해 추천을 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총리 후보자의 국무위원 추천에 관한 법 규정도 없다.

한덕수는 이에 대해 "말하자면서 (총리 후보자가) 사인을 한 것"이라며 "내각과 대통령 사이 협력의 가치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인정하는 것을 인수위 단계에서부터 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Who Is ?] 한덕수 국무총리
▲ 2017년 6월26일 한덕수 전 주미대사(왼쪽 세 번째)가 문재인 대통령(왼쪽 두 번째), 이홍구 전 주미대사(왼쪽), 홍석현 전 주미대사와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간담회장으로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초대 주미대사 지내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지냈음에도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대사에 임명됐다. 주미대사는 국내 의전상으로는 총리보다 낮은 장관급에 해당하지만 미국과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중요도가 높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덕수를 주미대사로 발탁한 것은 오바마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한 결정으로 풀이됐다.

한덕수는 미국 유학파이면서 김대중 정부의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시동을 걸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직속 한미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 겸 한미FTA 특보를 지내며 한미FTA 막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에서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뒤 한미FTA 재협상을 시사하는 발언이 잇따라 나오자 이명박 정부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한덕수를 주미대사에 임명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아울러 진보 성향의 이전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인사를 주미대사로 보냄으로써 미국의 민주당 정부인 오바마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 했다는 풀이도 나왔다.

주미대사에서 퇴임한 직후인 2012년 2월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한덕수가 무역협회장에 선임된 데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한미FTA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강행처리된 뒤 민주당이 '폐기', '재재협상' 등을 외치며 정부·여당과 강경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한덕수에게 한미FTA 이행 과정을 챙기는 일을 맡긴 것으로 분석됐다.

무역협회장 시절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지론에 따라 매년 12개 지방지부를 순회하며 420여 개 기업의 애로사항을 듣고 무역업계의 해외시장 진출 확대를 지원했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
2004년 2월 이영탁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이 총선에 차출되면서 한덕수가 참여정부의 2대 국무조정실장으로 공직에 복귀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하며 고건·이해찬 총리와 손발을 맞췄다. 이라크 파병, 행정수도 이전 등에 관한 정부 업무를 지원하면서 정무·안보 관련 경험을 쌓았다.

2005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됐다. 재임 기간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금융-산업자본 분리 정책을 이끌었다. 쌀에 부과하는 관세를 완전 폐지하는 쌀 시장 개방으로 농민들로부터 쌀 세례를 받기도 했다.

2006년 이해찬 국무총리가 삼일절에 골프를 친 사건으로 사퇴한 뒤 한명숙이 국무총리에 임명될 때까지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겸임했다.

부총리 퇴임 직후인 2006년 8월부터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미 FTA 협상을 주도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3월 국무총리에 임명돼 2008년 2월까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냈다.

총리 재임 중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뒤에 북한 내각총리 김영일과 남북총리회담을 했다. 이 외에 여야와 소통하며 국민연금법, 장기요양보험법, 기초노령연금법 등을 입법하는 성과를 냈고,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에도 힘을 보탰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미FTA 추진
김대중 정부 시절 1998년 3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냈다.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최초로 추진했고, 칠레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관련 실무도 수행했다. 당시 여러 차례 산업자원부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2001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탁된 데 이어 이듬해 경제수석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000년에 중국이 한국산 휴대폰 수입관세를 인하하는 대신 한국이 중국산 마늘 수입 규제를 완화하는 이면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지며 이른마 '마늘 파동'이 일어나자 2002년 협상 책임을 지고 공직생활을 접었다.

이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김영삼 정부 때 통상 분야에서 활약
한덕수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에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휘하의 산업담당비서관을 맡았다. 1994년 청와대에서 나와 관리관으로 승진하며 상공부로 복귀해 기획관리실장, 통상무역실장을 지냈다.

통상무역실장으로 일하는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추진과 대일본 무역규제 해제의 실무를 맡았고, 한미 자동차 협상에 정부 대표로 참여해 결렬 직전이었던 협상을 타결시켰다.

1996년 차관으로 승진해 1997년 3월까지 특허청장을 지냈다. 1997년 3월부터 1998년 3월까지 통상산업부 차관으로 근무했으며, 그 사이에 IMF 사태가 발생해 이를 수습하는 업무를 맡았다.

△공무원 시절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0년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역복무와 겹쳐 경제관료로서의 사실상 첫발은 경제기획원에서 떼었다.

1977년 미국으로 유학 가 197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2년 부처간 교류 때 상공부로 자리를 옮겨 과장으로 재직하다가 휴직계를 제출하고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가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만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다시 상공부에서 근무하다가 1989년 부이사관으로 승진해 상공부 중소기업국 국장에 임명됐다.

1990년 산업정책국장을 맡아 우리나라 산업정책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 '공업발전법'을 만들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가운데 산업 관련 정책의 실무도 맡았다.

1992년 이사관으로 승진한 뒤 1993년 1월 전자정보공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한덕수 국무총리
▲ 한덕수 전 총리가 2022년 4월3일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에서 국무총리에 지명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국무총리 인사청문회에서 전관예우 논란과 이해충돌 의혹 등을 놓고 공세를 펼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이를 잘 넘기는 것이 당면 과제다.

총리 후보자에 지명된 직후에는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총리를 지냈으니 민주당의 임명동의를 이끌어내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공직에서 떠난 뒤 법무법인에서 받은 고액의 고문료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인사청문회 통과가 쉽지 않게 됐다.

한덕수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면 김종필·고건 전 총리에 이어 보수와 진보 정권을 오가며 총리를 지내는 세 번째 국무총리가 된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총리가 되면 새 정부 국정의 연착륙을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한덕수는 새 정부의 과제로 경제 성장과 국익 중심 외교, 재정건전성 유지, 외환시장 대응, 생산성 제고 등을 강조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과 탈원전 정책에 대해서는 재고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최근 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공급망 재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을 계기로 한미동맹은 안보 문제일 뿐 아니라 경제 문제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떠오르고 있다.

한덕수는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대사를 지낸 '미국통'인데다 한미 통상 분야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해온 만큼 국무총리가 되면 한미동맹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 평가
[Who Is ?] 한덕수 국무총리
▲ 2009년 2월26일 한덕수 주미대사(오른쪽)가 청와대에서 신임장을 받은 뒤 이명박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덕수는 통상 분야에서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온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다.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서 출발했지만 공직생활의 대부분을 통상 분야에서 보냈다.

정부의 성향을 가리지 않고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에서 온갖 요직을 두루 거쳐 '처신의 달인'으로 불린다. 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고, 이명박 대통령 취임 뒤에는 주미대사로 임명돼 주목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가 특히 초기 인사에서 전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이들에게 냉정했던 점을 고려하면 한덕수가 주미대사에 임명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자신의 고향이 전북 전주임을 밝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호남출신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있어 본적을 숨기거나 고향을 드러내지 않는 호남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부총리 취임 후 정책 일관성을 위해 색깔 없는 경제부총리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무색무취하다는 이미지가 생기기도 했다. 한덕수는 자신을 "변화를 지향하는 합리적 시장주의자"로 규정했다.

일을 꼼꼼하게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일 집중도가 뛰어나다. 성품이 원만하고 일처리를 합리적으로 하며 조율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변에서 '일이 취미인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일벌레로 살아왔다고 한다.

시장경제와 경제개방에 대한 소신이 뚜렷하다. 관료로서 자리를 옮길 때마다 '시장 중심으로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인물'이라거나 '외국인 투자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말을 들었다.

영어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문장이 눈에 띄면 메모하거나 숙지해 두었다가 실제로 사용해 통상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만에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파이기도 하다. 박사학위 논문이 워낙 뛰어나 하버드대학에서 교수 요원으로 남아달라고 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때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을 보좌하며 국가적 위기 상황을 넘기는 데 힘썼다. 이해찬 총리 체제에서는 당정간 정책 조율을 맡아 '책임총리'를 뒷받침하는 '책임실장' 역할을 담당했다. 부처별 업무의 총괄과 조정을 별 잡음 없이 해내 분권형 국정운영 체제의 연착륙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젊을 때 주말마다 등산과 테니스를 즐길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수석, 서울대 전체 3등으로 졸업해 대법원장상을 받았다. 당시 서울대는 수석 졸업생에게 대통령상, 차석 졸업생에게 국회의장상, 3등 졸업생에게 대법원장상, 4등 졸업생에게 문교부장관상을 주었다.

키가 180cm로 동년배 평균 키에 비해 장신이다.

박사 논문으로 '외부충격, 조정과 성장'(1984)을 썼다.

사건사고
△전관예우 및 고액보수 논란
한덕수는 2017년 12월부터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기 직전까지 4년4개월 동안 법무법인 김앤장에서 고문으로 재직하며 고문료로 18억 원을 받았다.

과거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물러난 뒤인 2002년 11월부터 2003년 7월까지 김앤장 고문으로 활동할 때는 1억5천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덕수는 총리에 지명된 후 "고액연봉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국민 눈높이로 봐서는 그런 측면도 있을 수 있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한 국민 여론은 부정적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2022년 4월11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 후보는 법률사무소에서 4년4개월여 동안 근무하며 약 20억 원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위 공직자가 퇴임 후 민간기업에서 고문이나 사외이사로 재직하는 관행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63.2%가 '부적절하다'고 대답했다. '적절하다'는 17.6%, '잘 모르겠다'는 19.2%로 집계됐다. 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한덕수는 에쓰오일에서도 2021년 3월부터 사외이사로 재직하며 8천만 원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청문 요청안 자료에 따르면 한덕수 본인과 배우자의 재산은 모두 82억 원이 넘는다. 2012년 4월 주미대사에서 물러나고 신고한 재산이 40억6700만 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공직을 떠나 있던 10년 동안 재산이 2배로 늘어난 셈이다.

△론스타의 거래에 개입한 의혹
한덕수가 2002년 11월부터 8개월 동안 론스타의 국내 법률대리인인 김앤장에 재직한 것을 두고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매각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시민단체인 투기자본감시센터는 2022년 4월6일 한덕수가 론스타의 외환은행 불법매각을 은폐한 책임자라고 주장하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 의혹은 2007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한덕수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을 때에도 제기됐다. 당시 한덕수는 인사청문회와 국회 인준 절차를 통과해 총리에 임명됐다.

한덕수는 론스타 외환은행 인수·매각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부인했지만 인사청문회에서 이 의혹이 다시 한 번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는 로비스트 제도가 합법화돼있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만 로비를 할 수 있다. 대형 법무법인들은 정관계 로비를 위해 고문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는 불법이 아니다.

△이해충돌 논란
한덕수가 미국 석유회사에 자택을 임대한 사실이 있어 이해충돌 가능성이 제기됐다.

한덕수는 1993년 통상·산업 분야 고위직으로 근무하면서 서울시 종로구 적선동에 있는 본인 명의의 자택을 미국 석유회사 모빌(현 엑슨모빌)의 한국법인 오일코리아에 거액의 선금 수령 후 장기간 임대했다.

1995년에는 해당 법인이 1억6천여만 원의 근저당을 설정했는데, 이는 임대료 선지급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모빌은 국내 에너지 공기업 등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고 있었다.

한덕수가 그 전에 같은 주택을 세계 최대 통신업체인 AT&T에 임대해 6억 원의 임대수익을 올린 사실도 알려졌다.

한덕수는 임대계약을 직접 하지 않고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서 했으며 업무와의 연관성은 없다는 해명을 내놨다.

△장인 주택 헐값 매입 논란
한덕수는 장인으로부터 주택을 시세보다 낮게 매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뉴스버스는 2022년 4월8일 한덕수가 1989년 장인으로부터 서울시 종로구의 단독주택을 3억8천만 원에 매입했는데 1990년 1월 기준 해당 주택의 공시지가는 8억 원 정도였다며 저가매매 방식으로 증여세를 포탈한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한덕수는 인사청문준비단을 통해 "주택을 구입한 1989년은 공시지가가 도입되기 전"이라며 "단독주택 거래량이 많지 않은 지역이라 시가 산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정부의 과세 기준을 참고해 3억8천만 원을 내고 주택을 구입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주택 구입에 따른 세금과 공과금을 모두 납부했으며 적정 가격으로 매매했기 때문에 국세청으로부터 별도로 증여세 납부 통지를 받은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2007년 3월 총리 인사청문회 당시에도 같은 내용을 소상히 설명드린 바 있다"고 덧붙였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한덕수 국무총리
▲ 2007년 4월24일 한덕수 국무총리(왼쪽)가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1970년 제8회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1979년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 경협총괄 사무관이 됐다.

1989년 상공부 중소기업국장으로 승진했다.

1993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실 통상산업비서관을 맡았다.

1994년 상공자원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옮겼다.

1994년 통상산업부 통상무역실장을 맡았다.

1996년 특허청 청장에 임명됐다.

1997년 통상산업부 차관으로 옮겼다.

1998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본부장을 맡았다.

200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에 임명됐다.

2001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맡았다.

2003년 산업연구원 원장에 선임됐다.

2004년 국무총리국무조정실 실장을 맡았다.

2005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 임명됐다.

2006년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7년 38대 국무총리에 임명됐다.

2007년 FTA 국내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주미 대한민국대사관 대사로 파견됐다.

2012년 28대 한국무역협회 회장에 선임됐다.

2015년 청소년적십자 사업후원회 고문을 맡았다.

2015년 기후변화센터 이사장을 맡았다.

2021년부터 에쓰오일 사외이사로 활동했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 학력

1961년 서울 재동초등학교를 나왔다.

196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1년 서울대학교 경제학를 졸업했다.

1979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 가족관계

슬하에 자녀는 없으며 서양화가로 1년 연상인 배우자 최아영과 둘이 살고 있다.

◆ 상훈

1971년 대법원장상을 수상했다.

1992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3년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

2007년 칠레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12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 기타

2022년 4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국회로 보낸 국무총리 인사청문 요청안 자료를 보면 한덕수 본인과 배우자의 재산은 모두 82억5937만 원이다.

1971년 5월부터 1974년 4월까지 군복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2013년 '알기 쉬운 무역실무 길라잡이'를 출간했다.

어록
[Who Is ?] 한덕수 국무총리
▲ 2014년 12월18일 한덕수 무역협회장(왼쪽)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시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경제5단체 초청 해외진출 성과 확산 토론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동계는 우리 경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둥이다. 그러나 노동의 환경도 세계적 경제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다. 노동계가 단순히 노사간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대립하고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세계의 모든 나라와 좋은 노사관계에 있어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의 발전과 산업의 발전, 4차 산업혁명의 환경 속에서 우리 노동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도 중요한 문제다." (2022/04/12, 인사청문회준비단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노동계와의 관계 설정을 묻는 질문에)

"최저임금이라는 것은 노사 사이 협의에서 결정할 일을 정부가 개입해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은 굉장히 신중하고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최저임금이 너무 올라가면 기업이 오히려 고용을 줄이는 결과가 와서 서로 루즈-루즈 게임이 된다." (2022/04/05, 인사청문회준비단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최저임금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새로 지명되는 총리로서 윤석열 대통령을 모시고 행정부가 중심이 되는 정책을 꾸준히 만들고 치열한 토론과 소통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정책들을 만드는 데 노력해 나가겠다. 여기에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협치, 통합 이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 정책의 요소가 될 거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대내외적으로 경제와 지정학적 여건이 매우 엄중한 때에 국무총리 지명이라는 아주 큰 짐을 지게 돼 영광스러우면서도 매우 무겁고 큰 책임을 느낀다." (2022/04/03, 서울서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원회 기자실에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소감을 발표하며)

"우리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하지 않으면 9조 달러 규모의 교역, 2.2조 달러 규모의 원자재 교역에서 빠지게 된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한국이 12개 나라에 1200억 달러 정도 수출하는데 (TPP에 참여하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일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2015/01/06, 한국경제TV 인터뷰에서)

"과거 우리 무역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항상 세계가 놀랄 만한 저력을 발휘하며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뤄냈다. 수출입국 50년의 자신감과 열정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도전과제에 맞서 ‘제2의 무역입국’을 향해 나서야 한다.” (2015/01/01, 2015년 무역협회 신년사에서)

"시간이 가면서 계속 FTA 이행 상황을 리뷰하고 언제라도 관세 인하에 관해 어느 한 쪽이 제기하면 논의하도록 하는 조항이 있다. 자동차 부분은 (오히려) 우리 기업에서 예외로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자동차 부품도 큰 것은 일단 예외조치했지만 많은 부품들은 FTA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2014/11/10, 한중FTA에서 자동차가 양국 모두의 양허(관세철폐) 대상에서 제외된 것과 관련해 기자간담회에서)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한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얘기다. 제도 자체를 선진국으로 올린다는 것이고, 국제적 기준이 지금 우리 제도는 아닌 것 같다." (2007/05/22, 국무회의에 앞서 '취재 선진화' 방안과 관련해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미FTA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이자 기회다.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만 정부는 우리 미래를 위해 한미FTA는 꼭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가고 있다." (2007/03/29, 국무총리 지명자로서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70%에 이르는 한국이 FTA를 외면하면 통상고아로 전락할 것이다. 21세기는 통상교섭의 시대이며 FTA는 교역을 증진시키는 현대판 실크로드다." (2006/09/21, 경찰청이 마련한 강연회에서)

"중국산 마늘에 대한 세이프가드가 발동되면서 휴대폰과 철강의 중국 수출 길이 막혔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청와대도 화가 났다. 한 달 동안 협상을 진행했는데 한국정부 내부에 세이프가드는 다시 하지 말자는 합의가 형성됐다. 협상 타결 뒤 박수가 터졌고 언론도 환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뒤 한국정부가 은폐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외환은행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마늘 얘기를 꺼냈다. 개인적 잘잘못을 떠나 맥락은 같으며 억울한 면이 있다. 마늘과 외환은행의 기본 골격은 같다고 본다." (2006/07/06, 정례 브리핑 뒤 기자간담회에서 경제부총리 퇴임 소회를 밝히며)

"감세정책은 국가 재정에 여유가 있을 때나 세율이 너무 높아 구조개혁이 필요할 때 취하는 것이다. 재정 여유가 없는 우리 정부로서는 재정의 건전성 차원에서 감세정책을 취할 수 없는 입장이다." (2005/10/27,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한나라당이 감세정책을 제안한 것에 대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허구다. 비판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신자유주의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워싱턴 컨센서스로 불리는 신자유주의는 개방화, 자유화, 민영화 등만 있는 것인데,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내용에는 인적개발을 위한 투자, 경쟁 탈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 등도 들어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정책인 것이다. 어느 나라도 일방적으로 그런 정책(신자유주의)만을 펴는 곳은 없다. 미국도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의 제도를 갖고 있지 않나." (2005/10/21, 기자간담회에서 ‘정부 내부에 신자유주의 논란과 관련한 토론이 있는가’라는 기자 질문에)

"부동산 투기는 끝났다. 집값은 2003년 10·29대책 이전 수준으로 안정되는 게 바람직하다." (2005/08/31, 부동산 대책을 발표한 뒤 기자회견에서)

"지속적으로 안정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인 양극화를 해결해야 한다. 양극화 현상이 지속된다면 성장잠재력과 사회통합의 기반이 크게 훼손된다.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해 강하고 경쟁력 있는 분야는 세계무대에서 뛰고 달릴 수 있도록 하고 취약분야는 조속히 이를 뒤따르도록 해야 한다." (2005/03/15, 경제부총리 취임식에서)

"분권과 자율이라는 국정 원칙보다 조정 메커니즘이 적절한가 하는 문제에 우선권을 둬야 한다." (2003/05/29, 참여정부 출범 100일을 앞두고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정부출범 평가 심포지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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