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출신도, 타고난 부자도 아니지만 집념과 끈기로 넷마블게임즈를 국내 2대 게임공룡으로 성장시켰다.
호기심이 강하고 목표로 한 것은 무조건 이뤄야 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초등학생 시절 학원에 다니고 싶어 4개월 동안 신문배달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성격이 무척 세심하다고 한다. 넷마블 창업초기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기도 했다. 홈페이지를 어떻게 구축해야 이용자에게 호감을 얻을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방준혁은 개인이 일에 완전히 매몰될 수 있도록 회의나 외근이 없는 ‘개인업무시간’을 별도로 제공한다. 대기업이 업무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2000년대 이후에야 이 같은 시스템을 도입한 것과 달리 방준혁은 벤처사업 초기 시절부터 이 같은 시스템을 도입했다.
역량있는 직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 회사가 거둔 성과는 100% 직원의 공으로 돌린다.
넷마블이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로 있던 시절 모회사에게 받은 성과금 30억 원을 모두 직원들에게 나눠준 일이 대표적인 예다.
동료와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방준혁은 넷마블게임즈 대표를 맡고 있는 권영식 대표와 1998년부터 사업을 함께 하고 있고 대학원 졸업을 위해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한 직원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시킨 일화가 있다.
시장을 읽고 새로운 수를 내놓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PC온라인게임의 수익화 모델이 월정액 요금밖에 없던 시절에 방준혁은 게임을 일단 무료로 내놓은 뒤 일부 아이템을 유료로 판매하는 전략을 국내에서 처음 도입해 큰 성과를 거뒀다.
위기에 처한 CJ넷마블의 부활을 이끌 때에도 방준혁의 능력이 빛을 발휘했다. 방준혁은 스마트폰의 보급속도가 시장의 예상보다 빠르다는 점을 인지한 뒤 CJ넷마블의 사업 중심을 PC온라인게임에서 모바일게임으로 빠르게 옮겼다.
‘다함께 차차차’와 ‘모두의 마블’ 등 당시 넷마블게임즈가 내놓은 모바일게임은 대거 흥행에 성공했고 방준혁은 모바일게임 사업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공격적으로 밀어부치는 승부사 기질이 있다. CJ넷마블에서 모바일게임의 성공가능성을 맛본 뒤 이 사업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넣어 결국 넷마블게임즈가 2015년 연매출 1조 원을 돌파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방준혁은 지난해 글로벌사업 확대전략을 밝힌 뒤 정확히 1주일 만에 미국 2위 모바일퍼즐게임 기업 ‘SGN'을 인수하기도 했다.
넷마블게임즈는 경쟁기업보다 해외사업 역량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지녔는데 해외사업 확대전략에 힘입어 2015년에 해외매출 비중을 28%까지 높였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98년 인터넷영화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했다.
1999년 위성인터넷 사업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셋톱박스 등 인프라 구축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또 실패를 맛봤다.
1999년 게임기업 ‘아이팝소프트’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투자자를 모집해주는 등 외부에서 도움을 줬다. 방준혁은 이 인연으로 아이팝소프트의 사외이사로 재직하며 게임업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2000년 아이팝소프트가 또 한번 위기에 처하자 CEO에 올랐다. 회사 이름을 ‘넷마블’로 바꾸고 온라인게임사업을 시작했다. 넷마블의 설립자본금은 1억 원이었고 설립 당시 직원 수는 고작 8명이었다.
2002년 PC온라인게임 시장에서 국내 최초로 부분 유료화 모델을 도입해 성공을 거뒀다. 최초의 부분 유료화 모델이 도입된 게임은 '캐치마인드'였다.
2003년 넷마블 사업확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장기업이던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로 편입했다. 이 때 넷마블의 이름은 ‘플래너스’로 바뀌었다.
2003년 5월 모회사인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 지분을 흡수했다. 국내에 유례가 없는 자회사의 모회사 인수였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놓고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고 표현했다.
이 결정으로 넷마블은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가 보유하고 있던 콘텐츠 기획과 생산, 마케팅 등에 대한 노하우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다. 게임 퍼블리싱 사업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2004년 넷마블은 CJ그룹에 편입됐고 이름은 CJ인터넷으로 변경됐다
방준혁은 이 대가로 800억 원에 이르는 주식 부자반열에 올랐다. 또 3년간 CJ인터넷 경영권을 보장받아 대기업의 조직문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2006년 건강이 나빠져 CJ인터넷 사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5년 동안 야인으로 지내면서 커피체인점 ‘할리스’ 지분을 인수했다 매각하기도 했고 포장지제조업과 소재사업 등 게임과 상관없는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방준혁이 물러난 뒤 CJ인터넷은 CJE&M 게임사업부문으로 변경되었으며 2011년 방준혁은 CJE&M에 ‘CJE&M 총괄상임고문’으로 복귀했다.
2014년 CJE&M이 CJ넷마블을 물적분할해 자회사인 CJ게임즈와 통합하면서 통합 CJ넷마블이 탄생했는데 방준혁이 CJ넷마블 최대주주에 올랐다. 방준혁은 당시 중국 최대 게임기업인 텐센트에게 5억 달러에 이르는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2014년 10월 CJ넷마블의 이름을 넷마블게임즈로 바꾸고 이사회 의장을 맡아 현재까지 넷마블게임즈를 이끌고 있다.
◆ 학력
◆ 가족관계
◆ 상훈
2016년 3월17일 '2015년도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에 선정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인증패를 받았다.
2015년 12월15일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5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인터넷기업대상에서 정보통신부장관상을 수상했다.
2003년 골든브랜드 윤리경영대상을 받았다.
◆ 상훈
2016년 3월17일 '2015년도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에 선정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인증패를 받았다.
2015년 12월15일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5년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주관하는 올해의 인터넷기업대상에서 정보통신부장관상을 수상했다.
2003년 골든브랜드 윤리경영대상을 받았다.
어록
“올해 모든 사업의 초점은 글로벌에 맞춰져 있다.”, “해외에 진출했지만 실패도 많이 했는데 안 되더라도 될 때까지 해외사업을 키워야 한다.” (2016/02/18 제2회 NTP에서 넷마블게임즈가 매출 1조 원에 만족하지 않고 글로벌 대형 게임사로 발돋움 하겠다며)
“가상현실 기기의 발전상황으로 봤을 때 가상현실게임이 대유행 하기에는 아직 무리이다.” (2016/02/18 제2회 NTP에서 가상현실이 주목받고 있지만 기기가 무겁고 불편해 보편화는 시기상조라며)
“다음 목표는 글로벌 게임사업 강자로 도약하는 것.” (2015/11/12 ‘지스타2015’ 행사장에서 기자와 만나)
“너무 뒤에만 있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대중 앞에 서겠다.” (2015/07/15 제1회 NTP에서. 그동안 ‘은둔의 경영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는데 앞으로는 대중앞에 더 자주 나서겠다며)
“넷마블게임즈를 비롯한 국내 게임회사들은 해외기업들과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 “해외시장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여기서 도태될 수 있다는 절박함의 표현이다.” (2015/07/15 제1회 NTP에서)
“국내에서 1, 2위는 중요하지 않다.”, “세계시장에서 강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지적재산권과 개발정신이 강한 엔씨소프트와 파트너십이 필요했다.” (2015/02/17 엔씨소프트와 상호지분투자 및 사업에서 제휴하기로 한 이유를 설명하며)
“넷마블게임즈와 엔씨소프트는 게임을 글로벌화해서 성공하고자 하는 DNA가 똑같다.”, “넷마블게임즈는 모바일게임의 글로벌 시장경험과 기술적 노하우가 많다.” (2015/02/17)
“엔씨소프트의 경영진이 미래지향적으로 경영해나가는지 살펴볼 예정.” (2015/02/17 엔씨소프트와 넥슨의 경영권 분쟁에서 넷마블이 백기사 역할을 맡게 된 것에 대해)
“세계에 넷마블 로고송을 울리게 하겠다.” (2014/03/26 중국 최대 게임기업인 텐센트에게 5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한 소감을 밝히며)
“안정된 연봉과 백그라운드를 원하면 대기업으로 가고 사생활을 원하면 공무원을 해라.” “나는 일에 젊음을 바칠 자세가 돼 있는 사람을 원한다.” (방준혁의 인재관)
◆ 평가
명문대 출신도, 타고난 부자도 아니지만 집념과 끈기로 넷마블게임즈를 국내 2대 게임공룡으로 성장시켰다.
호기심이 강하고 목표로 한 것은 무조건 이뤄야 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초등학생 시절 학원에 다니고 싶어 4개월 동안 신문배달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성격이 무척 세심하다고 한다. 넷마블 창업초기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하기 위해 며칠 밤을 새기도 했다. 홈페이지를 어떻게 구축해야 이용자에게 호감을 얻을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방준혁은 개인이 일에 완전히 매몰될 수 있도록 회의나 외근이 없는 ‘개인업무시간’을 별도로 제공한다. 대기업이 업무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2000년대 이후에야 이 같은 시스템을 도입한 것과 달리 방준혁은 벤처사업 초기 시절부터 이 같은 시스템을 도입했다.
역량있는 직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 회사가 거둔 성과는 100% 직원의 공으로 돌린다.
넷마블이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로 있던 시절 모회사에게 받은 성과금 30억 원을 모두 직원들에게 나눠준 일이 대표적인 예다.
동료와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방준혁은 넷마블게임즈 대표를 맡고 있는 권영식 대표와 1998년부터 사업을 함께 하고 있고 대학원 졸업을 위해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한 직원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시킨 일화가 있다.
시장을 읽고 새로운 수를 내놓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PC온라인게임의 수익화 모델이 월정액 요금밖에 없던 시절에 방준혁은 게임을 일단 무료로 내놓은 뒤 일부 아이템을 유료로 판매하는 전략을 국내에서 처음 도입해 큰 성과를 거뒀다.
위기에 처한 CJ넷마블의 부활을 이끌 때에도 방준혁의 능력이 빛을 발휘했다. 방준혁은 스마트폰의 보급속도가 시장의 예상보다 빠르다는 점을 인지한 뒤 CJ넷마블의 사업 중심을 PC온라인게임에서 모바일게임으로 빠르게 옮겼다.
‘다함께 차차차’와 ‘모두의 마블’ 등 당시 넷마블게임즈가 내놓은 모바일게임은 대거 흥행에 성공했고 방준혁은 모바일게임 사업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공격적으로 밀어부치는 승부사 기질이 있다. CJ넷마블에서 모바일게임의 성공가능성을 맛본 뒤 이 사업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넣어 결국 넷마블게임즈가 2015년 연매출 1조 원을 돌파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방준혁은 지난해 글로벌사업 확대전략을 밝힌 뒤 정확히 1주일 만에 미국 2위 모바일퍼즐게임 기업 ‘SGN'을 인수하기도 했다.
넷마블게임즈는 경쟁기업보다 해외사업 역량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지녔는데 해외사업 확대전략에 힘입어 2015년에 해외매출 비중을 28%까지 높였다.
◆ 기타
어릴 때 지독한 가난을 겪으며 일찍 사업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30대 초반에 2번이나 벤처사업에 도전했다 실패를 경험했다. 방준혁은 이를 통해 벤처사업이 성공하려면 콘텐츠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넷마블게임즈를 지휘하면서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은둔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넷마블게임즈가 2015년 매출을 기준으로 국내 2대 게임기업에 오르자 대중과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사람을 뽑을 때 학력이나 배경 등을 전혀 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에 애정이 없는 일류대 출신보다 학력은 나쁘더라도 회사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뭉친 직원을 더 선호한다.
넷마블 초기부터 구직자의 상세한 이력보다는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면접으로 직원을 뽑았다고 한다. 3명의 면접자에게 1시간 동안 날카로운 질문을 연달아 던지는 면접 스타일을 보인다.